남편은 적극적이지는 않아도 미국 정치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을 두고 사는 평범한 미국인이다. 그래서 중요한 선거에는 되도록 투표권을 행사하려고 하고, 가끔은 지지하는 당 행사에 참여할 때도 있다. 이런 남편과 같이 살면서 미국에서 화제가 되는 정치 뉴스를 주워듣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에 한국 뉴스만큼의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중요한 선거가 있다며 근처 초등학교에 간다고 했다. 투표 자체가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고, 멀리 가는 게 아닌데도 따라가고 싶었다. 투표장 안에는 못 들어가겠지만 미국 투표장 바깥은 어떤 분위기인지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이 컸다. 그래서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근방 초등학교로 함께 향했다.
투표소로 쓰이는 학교 주변에는 후보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캠페인 차량 몇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투표날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 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으려 홍보를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선거 당일은 아니었고, 우리가 간 날은 사전 투표를 진행하는 날이었기에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할 줄 알았건만, 캠페인 버스부터 투표를 위해 줄 서 대기하는 사람들까지, 투표장은 꽤나 북적였다.
투표소 안까지는 못 들어가겠지만, 대기할 때만큼은 남편과 같이 있어도 될 것 같아 함께 줄을 서 기다리다가 교실 문 앞까지 올만큼 줄이 짧아졌을 때, 나는 슬그머니 줄에서 이탈하려고 했다. 그때 선거 관리인단으로 보이는 사람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는 선거권이 없어요. 그냥 궁금해서 남편이 투표하는 걸 따라왔을 뿐이에요."
그러자 그는 놀랍게도 상관없다며 남편과 함께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네? 저는 미국인이 아닌데요?"
"괜찮아요. 투표하는 동행인과 함께 움직이셔도 됩니다."
신분증으로 선거권 유무를 확인 후에 투표용지를 받을 수 있고, 투표소 안에는 투표자 본인만 들어갈 수 있는 게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투표소 안에 같이 들어간다 해도 내가 투표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투표의 모든 과정에 동행해도 된다고 허락하는 일 자체가 신기했다. 들어가도 된다는 걸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던 나는, 남편과 함께 좁은 투표소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투표용지를 받고 원하는 후보자 이름 옆에 도장을 찍는 방식인데,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아예 투표용지가 없었다. 투표소 안에는 처음 보는 신기한 기계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옛날에 회사에서 쓰던 팩스 기계처럼 생긴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사용하는 투표 기계였다. 아날로그 기계처럼 회색 화면에 검은색 글씨와 칸막이만이 떴고, 그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서 원하는 후보자에게 표를 날리는 방식이었다. 모든 투표소가 같은 기계 방식의 투표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간 곳은 이렇게 종이 없이 진행하는 투표소였다.
남편이 버튼을 누르며 투표를 진행하는 걸 지켜보다가 같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대기하던 직원이 투표해줘서 고맙다며 투표 인증 스티커를 나눠주었다.
"아, 저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그냥 투표하는 걸 옆에서 봤을 뿐이에요."라고 답하자, 직원은 투표하는 걸 옆에서 도와줘서 고맙다며 나에게도 투표 인증 스티커를 건넸다. 선거권이 없는 내게도 투표소에 들어갈 기회를 주고, 수고했다고 얘기해 주는 그들을 보며, 실제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중요한 선거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는 착각이 들었다.
평생 한국 시민권을 유지하고 싶은 내게, 남의 나라 투표소는 사는 동안 절대 볼 수 없는 미지의 영역 같은 거라 생각했는데, 이리도 간단하게 투표 전 과정을 보게 되니 신기하면서 얼떨떨했다. 뭐가 맞는 건지,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선거 관리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들여보냈으니 아주 특별한 예외는 아닐 거다. 여전히 미국 선거권이 없는 내가 굳이 또 투표소를 찾을 일은 이제 없다. 그래도 가끔 선거철이 찾아오면 책상 위에 붙여둔 그날의 투표 인증 스티커를 보며, 나도 마치 투표를 한 듯한 기분만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