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여행을 자주 다니는 가족이 아니었다. 아버지 직업 특성상 어디 멀리 가기도 힘들었고, 지방에 간다 해도 명절에 조부모님 댁에 잠깐, 아니면 휴가철에 바닷가 2~3일 정도가 전부였던 걸로 기억한다. 대신에 사는 곳 주변에서 맛집 찾기를 하며 못다 한 여행 욕구를 채웠다. 부모님은 보통의 한국 사람답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여기는 분들이라, 잘 먹어야 안 아픈 거라며, 맛있는 걸 먹이는 걸로 말 대신 애정을 표현하셨다. 그 기대감에 걸맞게 나는 딱히 가리는 것 없이 먹는 걸 좋아했고, 나중에는 전국을 돌며 미식 여행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꿀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걸 인생의 낙으로 여겼다.
하지만 거너를 따라온 미국은 그런 내게 재앙 비슷한 나라였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먹을 게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보통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헛웃음을 친다. 내가 다시 미국에 유명한 음식이 뭐가 있냐고 되물으면 햄버거, 피자, 핫도그 외에 나열하지 못한다. 물론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는 세상 온갖 새로운 음식들이 모이는 곳이니, 그곳에서는 음식이 없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미국 도시, 그것도 한국인 한 명 없는 남쪽 도시에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시골에서야 다양한 식당이 많이 없다는 걸 납득할 수 있지만, 보통의 중소도시에도 음식 종류가 굉장히 한정되어 있다. 해산물이라고 해도 연어, 대구, 새우, 굴 정도이며, 한국에서 흔히 보는 오징어도 마트에서는 살 수가 없다. 사실 굴요리나 바닷가재는 가격이 매우 비싸 1년에 한두 번 사 먹을까 말까다. 요리 방법도 그냥 굽거나 튀기거나 둘 중 하나다. 야채, 과일 종류도 한국에 비하면 다양하지 않고, 고기 또한 먹는 부위가 정해져 있다. 심지어 이상하게 감자,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도 그렇게 맛있지 않아 자주 먹지 않는 식재료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많은 미국인들이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가 거의 없는 듯하다. 미국인들의 엄청난 편식을 보고 제대로 느꼈다.
물론 내 주변 미국인에 한정된 경험만 갖고 이렇게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접한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늘 먹는 것만 먹고, 새로운 음식에 굉장한 두려움을 보였다. 어릴 때 편식하면 엄마한테 등짝을 맞아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먹는 것만 먹다 보니 각종 음식 알레르기도 심하다. 처음 거너를 만났을 때 양파, 두부, 굴 등 안 먹는 식재료가 꽤 많아서 완전 편식쟁이라고 생각했는데, 미국에 와서 보니 거너는 아주 골고루 밥 잘 먹는 착한 남편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시어머니만 봐도 단순히 싫다는 이유로 안 먹는 게 너무 많아서 외식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또 다른 미국 친구는 타국으로 출장을 가면, 맥도널드만 찾는다. 미국 아이들의 학교 도시락, 직장인들의 점심 메뉴는 그냥 샌드위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현재의 미국 음식 문화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산업화에 들어서면서 빨리 고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가 각광받았고, 패밀리 레스토랑을 메뉴를 봐도 뭔가 음식을 연구하며 개발한 메뉴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주로 얻을 수 있고 평소 먹어왔던 것 위주로 만들어진 요리들이다. 산업화 단계를 벗어난 지금은 그 음식들이 비만의 주범이 되는 식단임에도, 식문화라는 게 생각보다 보수적인지라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지만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세계를 이끌어가는 혁신적인 기업들이 계속해서 탄생하는 미국에서, 왜 그렇게 음식분야에서만큼은 도전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 또 하필이면 난 음식에 진심인 나라 사람이라 이렇게 먹는 걸로 힘들어하는 건지.
봄이 되면 돋아나는 산뜻한 산나물이 그립고, 여름이면 살얼음 동동 띄어 먹는 냉면 육수가 목구멍을 훑어줬으면 좋겠다. 가을에는 통통한 전어회가 생각나고 겨울에는 길거리에서 양손 가득 호호 불며 사 먹는 붕어빵과 계란빵이 아른거린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온갖 고기와 내장을 넣어 먹는 얼큰한 국밥은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꿈에 나오는데, 내 부족한 요리 솜씨와 없는 식재료로 이곳에서 만들어먹기도 역부족이니 아쉬운 대로 유튜브 먹방을 보다 침만 한가득 흘린다. 한국인이 한국음식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데, 미국인인 거너도 음식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걸 보면 역시 우리나라 음식이 먹을 게 많긴 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