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미국이라는 나라를 방문했을 때는 12월 말, 성탄절이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거너는 미국에서 중요한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위해 고향집을 방문하고 싶어 했고, 그 귀향길에 나도 함께 했다. 밤늦게 도착한 거너의 고향집에 처음 들어가서 놀란 점은 인테리어 장식이었다.
성탄절에 트리를 꾸미는 건 한국에서도 하는 거니 놀랍지 않지만, 식탁보부터 화장실 수건걸이, 전기 코드 꽂는 콘센트까지 전부 성탄절 장식으로 꾸민 게 놀라웠다. 실내뿐만 아니라 밖을 나서면 더 난리도 아니었다. 시골 동네라 별로 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집집마다 반짝이는 전구가 둘러져 있고 거대 산타 풍선에, 심지어 어떤 집은 루돌프가 잔디를 깎고 있기까지 했다. 그때는 미국인들의 성탄절 사랑이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에 직접 살아보니 그들의 꾸미기 열정은 핼러윈, 추수감사절, 세인트 페트릭스 데이 등 시즌마다 중요한 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발휘되는 것이었다. 집 안팎으로 장식물을 설치하느라 여념이 없고, 마트에 가보면 휴지 한 장까지도 명절 및 기념일용 물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나는 내 몸하나 꾸미는 것도 못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콘셉트용 집 꾸미기에 열을 올리는 미국인들의 열성이 신기했다. 더 재미있는 건, 이들이 코스튬에도 진심이라는 것이다.
본래 핼러윈은 어린아이들만 코스튬을 입고 사탕이나 초콜릿을 얻으러 다니는 줄 알았다. 물론 아이가 있는 집은 그게 보통이지만 가족 전부 영화 히어로나 만화 캐릭터로 콘셉트를 잡고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술집이 많은 유흥 거리는 여기가 현실 세계인지 영화 속인지 헷갈릴 정도로 요란한 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는 성인들이 길거리에 가득이다. 재택근무를 하는 우리 시엄마조차 이 시기에는 가발과 화장으로 변장을 하고 영상 통화 회의에 참가할 정도니 얼마나 미국인들이 가장(假裝)에 진심인지 알 수 있다. 코스튬을 입는 날로 제일 유명한 게 핼러윈이지만, 각종 축제까지 합치면 1년에 꽤 여러 번 된다. 미국 남부에 살고 있는 나는 2월에 ‘마디그라’라는 축제 때 코스튬을 입고, 3월에는 ‘세인트 페트릭스’ 데이를 축하하는 이벤트로 초록색 옷을 입는다. 4월과 5월에는 지역 축제의 일환으로 ‘중세 시대 페스티벌’, ‘르네상스 페스티벌’ 같은 곳에 참여하는데, 그때는 중세 시대 복장을 입어야 한다. 게임 속에 나오는 ‘판타지 중세시대’가 콘셉트이라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들처럼 뾰족 귀를 붙이고 요정 옷을 입는 사람들, 마법사, 근위기사, 수도승 등 다양한 코스튬을 입고 축제장을 휘젓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정말 콘셉트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다시 핼러윈을 장식하기 위해 이 시기에만 여는 ‘팝업 스토어’들도 있는데, 옷은 물론이고 스티커, 움직이는 장식품, 가장(假裝)용 화장품까지 없는 게 없어서, 이 가게 쇼핑으로만 좀비 영화 하나 문제없이 찍을 것만 같다. 바로 그다음 달부터 연속으로 있는 추수감사절과 성탄절까지 잘 치르면 1년의 꾸미기 스케줄이 무사히 마무리된다.
나도 미국의 이런 콘셉트 문화에 맞춰 살면서 다시는 입지 않을 코스튬 의상이 계속해서 쌓여간다. 물론 이런 게 싫다면 참여 안 하면 되지만, 막상 때가 되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콘셉트에 맞게 집을 꾸미고 코스튬을 입는 이웃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이번에는 무슨 장식품을 살까, 무슨 의상을 입어 볼까 검색하고 고르고 있다. 애들이 하면 귀엽지만 내가 하면 유치하게도 보이는 이런 코스튬 놀이를 열심히 하게 되는 이유는, 어릴 때 영화 속 만화 속 주인공들을 꿈꾸며 동경했던 그 어린 시절의 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원래 제일 신나는 건 크게 의미 없는 유치한 것들이 아닌가. 옷 하나로, 장식품 하나로 오늘 하루 다른 내가 되어 보는 경험은 반복되는 어른의 일상을 다시 이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재미가 되기도 한다. 보통 타국의 가서 그 나라의 새로운 규칙과 문화를 익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것처럼 오히려 따르고 싶은 문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