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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 Dec 29. 2022

1.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고 싶었던 것들과 송별회


피아노, 오일파스텔 그리기, 캘리그라피, 프랑스 자수, 영어·일본어·한자 공부, 서예, 영화 공부, 철학 공부. 그리고 작가.


시작은 항상 창대하였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작은 공연장에서 연주를 꿈꿨다. 오일파스텔로 그림을 시작하고서는 개성 있는 인물 그림으로 인정받는 아티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캘리그라피와 서예를 할 때는 적어도 작은 개인 전시는 할 수 있겠지 생각했다. 휴직하면서 서예 박물관 수업까지 들었는데……. 프랑스 자수는 작은 공방을 꾸려 조기 퇴직할 생각이었는데, 단 한 개도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영어·일본어·한자 공부를 하면서 최소한 그 나라 여행 갔을 때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실력이 올라 올 줄 알았다.

영화사 공부를 하면서 영화평론가를 꿈꿨고, 철학 공부를 하면서는 인문학 강사가 되어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밤마다 글을 쓰면서 ‘나 이러다 베스트셀러 작가되면 어쩌지’라는 상상하면서 혼자 낄낄거렸다.


그리하여 이 수많은 시도와 꿈들은 흔적을 남겼다. 먼지 쌓인 디지털 피아노, 둘째 색연필로 전락한 전문가용 오일파스텔, 붙박이장에 처박혀 버린 화선지, 벼루, 10개도 넘는 붓, 붓통, 서예관련서적, 하다만 자수틀, 어학 책들과 유효기간이 지난 듣다 만 인터넷 강의 목록, 책을 열면 쩌억 소리 날 것만 같은 두꺼운 새 책들. 노트북에 쓰다만 690여 개의 파일들.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마다 그 분야에서 뭔가 돼야겠다, 이것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빠졌다. 일단 장비부터 장전하고, 분야에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모았다. 당시에 나는 빨리 결과를 보고 싶었다. 들이는 시간보다 갑절 성공하길 바랐던 것 같다. 돈과 시간을 들인 만큼 ‘뽕’(?) 뽑고 싶은 마음. 처음 할 때는 재미있었는데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커지는 패배감 때문에 힘들었다. 이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하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새로운 시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취미 부자로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다만 나는 그것에 한 걸음 나가서 꼭 무엇이 되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아. 이래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을지도 몰라. 뭐라도 해야 하는데, 되어야 하는데.


마음이 무척 괴로웠던 중에 함께 독서 모임 하는 s를 만났다.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 심리상담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대학원 다니면 나중에 심리상담사 자격증도 딸 수 있고 나중에 심리상담 센타도 열 수 있겠다며 부러움을 쏟아내자 s는 의외로 무척 담담하게 대답했다.


“뭐가 꼭 되지 않아도 한다는 것 자체로 그냥 만족한다면 되지 않을까? 꼭 뭐가 되어야 하나?” 


나에게 담담하게 꼭 뭐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s는 공부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즐겁게 공부하면서 자격증을 따는 건 덤이고 선물이라고 말했다. s가 뭔가 되려고 했다면 어쩌면 지금 하는 공부가 해내야 하는 과제가 되어 무겁게 느끼지 않았을까. 부담을 내려놓고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억지로 뭔가가 되려고 애쓰기보다 지금 하는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s의 여유 있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s의 모습은 지금까지 뭔가 되려고 애쓰며 중압감에 시달리던 내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왜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나에 대한 의미 부여를 꼭 결과로만 평가하려고 했을까. 내가 세상을 보는 눈도 결과에 초점이 맞춰진 건 아닐까. 완벽한 완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할까.


인생이란 그림을 그리는데 완벽하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전시하고 싶었던 마음을 내려두었다. 큰 그림을 본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 구상만 하고 있었던 나를 캔버스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당겨 두기로 했다. 그리고 언젠가를 기약하며 되고 싶었지만 완성할 수 없었던 것들을 꼭 붙들고 있었던 것들과 송별회를 시작했다. 꼭 내 인생의 그림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감탄이 나올 만한 것이 될 필요는 없다. 그저 나라는 서명으로 완성될 수 있는 그림. 그것이라면 되지 않을까. 하하. 무엇이 꼭 되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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