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소진
나는 나를 자주 오해했다. 멀티가 가능한 인간인 줄 알았다. 회사, 집, 자기 계발 모두를 성공시키겠다고 동분서주했다. 내 몸과 정신은 영원히 닳지 않고 쓸 수 있는 풀충전 배터리가 장착된 줄 알았다.
Fire. 자주 불타올랐다. 솟구친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연료를 왕창 쏟아 부었다. 비축해 놓은 연료가 부족해지면 에너지 드링크과 진한 커피를 마셔가며 미래의 나에게 에너지를 빌려왔다. 언제까지고 연료를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Burnout! 소리 없이 전원이 꺼졌다.
처음에는 내가 방전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다 하기 싫을까.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 너무 당연해서 한 번도 의식해보지 못한 숨쉬기조차 스텝이 꼬였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춰졌다. 내 삶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세상 속도에 맞춰 보겠다는 노력을 멈추지 못했다. 알람 개수만 늘어났다. 특별히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자주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삶의 멀미가 시작되고 있었다.
완전히 방전이 될 때까지는 번아웃이 뭔지도 몰랐고, 조금 이상하다 싶을 때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뭐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노력하면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면 돼. 게으르고 나약해져서 그래. 정신 차리자. 매일 아침 실패하면서도 매일 다시 나를 일으켰다.
결국 완전히 방전되고 나서야,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숨도 못 쉬고 일상이 엉망진창이 된 후에야, 그제야, 바닥에 누워 꼼짝도 못 하게 된 나를 발견했다. 내 몸에서 탄내가 진동했다. 5분 단위로 맞춰져 있던 알람만 시간에 맞춰 울릴 뿐, 일어서지 못했다. 일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책임감 하나로 회사 출퇴근만 겨우 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을 버리는 느낌. 쓸모없는 사람이 돼가는 느낌. 자기혐오가 거세게 일어났다.
사람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전문가의 도움도 받고, 약도 먹어야 한다. 열이 펄펄 나는데, 정신력으로 버틴다고 열이 내릴까? 약 없이 이불 뒤집어쓰고 버틴다고 해결이 될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래야 할 때였다. 살고 싶다면 ‘나 잘 살아요’ 코스프레를 벗어던지고 도움을 청해야 했다. 이런 일에도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 때 알았다. 모든 일이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을. 게으르고 나약하다는 말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충전하는데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충전 중이긴 하지만. 전문가의 도움도 받았고,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강박을 멈췄다. 때로는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 힘들게 했지만, 탄내가 진동하는 내가 견디기가 더 힘들었으므로 버텼다. 무엇보다 3년간 가장 노력했던 점은 완전 0이 될 때까지 방전되지 않도록 배터리 충전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일단 한 번 방전되면 충전기를 콘센트에 다시 꽂기까지 오래 걸리고 충전시간도 곱절은 더 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사실, 마음이 망가지면 몸이 아프고, 몸이 아프면 마음이 망가진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요즘 나는 나에게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어디에 충전기를 꽂아야 충전이 잘 되는지, 배터리는 얼마나 남아있는지 자주 확인한다. 숨 고르기를 잘해야 오래 뛸 수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나를 잘 재우고, 잘 먹고, 잘 쉬게 해 주는 일, 자주 하늘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해주고, 예쁜 카페에도 데리고 가고, 거울도 보면서 근사하게 꾸며 주기도 하면서 나를 돌본다. 나를 땔감 삼아 나를 다 태워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