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네루다의 시를 읽으며

단상(斷想)

by 낭만소년

오래전에 썼던 글을 올립니다.

다시 보니 낯이 뜨거워집니다.

이 낯간지러움을 무릎쓰고 내보냅니다.

그 시간의 나를 보냅니다.



오늘도 방문하여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인의 육체


여인의 육체, 새하얀 언덕과 새하얀 허벅지,
알몸을 내맡길 때 그대는 어김없이 하나의 우주,
나의 우악스런 농부의 몸이 그대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이가 튀어나오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내 곁에서 날아가버렸고,
밤은 맹렬한 기세로 내 안으로 파고 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그대를 무기처럼
다듬었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그러나 복수의 시각은 닥치고,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알몸, 이끼 낀 몸을, 탐욕스럽고 한결같은 젖가슴을.
아, 가슴팍의 술잔이여! 초점없는 눈이여!
아, 은밀한 곳의 장미여! 느릿느릿 시름에 겨운 목소리여!


내 여인의 육체, 나는 그대의 매력에 매달릴 것이다.
나의 갈증, 끝없는 갈망, 가늠할 수 없는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권태가 흐르고
끝없는 고통이 흐르는 컴컴한 강바닥

(이종욱 역)


한 여자의 육체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
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정현종 역)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터널처럼 어두 컴컴한 심연을 지닌 외로웠던 한 사내가 있다. 외로움은 그의 존재방식이었다. 남을 믿지 않았기에, 고독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 남자.


생존의 방식으로서의 고독과 그 남자의 끝없는 갈망이라는 주제는 고독의 축과 수직으로 교차되는 존재의 축이라는 2차원 내에서이다.


나는 고독하다 고로 존재한다.



영화 <제 3의 사나이>에서



이 단언적인 문장은 나의 주위를 둘러싼 다른이들의 관계를 삭제시키며 등장한다. 사실 나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늘 가족, 친구, 동료, 선후배 심지어 귀여운 펫들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그들. 명확하게 3인칭으로 지칭되는 그들이 나일 수 없지 않는가. 나는 3인칭으로서의 그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다.


주어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목적어로 환원되지 않는 나.

나는 나를 소유한다는 언표의 불가능.


나는 그 어느누구도 지울 수 없는 고유한 나로써 정립한다. 이 고유한 나의 존재성을 가족, 성, 민족, 국가라는 커다란 동일성의 우산 아래로 모아 하나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나는 나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해” 그 얼마나 격렬한 투쟁을 거쳐야 하는지.


“나의 갈증, 끝없는 갈망”이 나로 하여금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일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자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오히려 갈증과 갈망이 가능한 것일게다.


과연 누가 나에게 나의 존재함을 던져 주었는가, 이 무거운 삶의 고통을?


세상에서 가장 몸서리처지도록 무섭고 두려운 것, 그것은 모든 존재가 침묵하는 정적-어둠속에서도 바스락 거리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이며, 밤의 그 “맹렬한” 존재론적 “기세” 앞에서, 내가 내 자신의 것으로 떠맡은 나의 존재함을 듣는 순간. 새삼스럽게도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는 숨막히는 밤의 정적과도 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내가 나를 마주대하며 정립해야 하는 이 모든 것들은 그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기에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어쩌면 살-ㅁ, 혹은 존재함은 “가늠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나에게 떠맡겨져 있는 상황속에서, 그 무거운 멍에 혹은 짐을 나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하는 여정과 같다.


존재한다는 것은 “끝없는 고통이 흐르는 컴컴한 강바닥 ”이 지나는 터널의 외로움을 안고서, 살아감의 무거운 멍에를 홀로 짊어지고 소실점 너머로 걸어가는 것이다.


영화 <제 3의 사나이>에서


그 걸어감의 도정에서 에로스는 시작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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