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한한 공간들의 영원한 침묵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파스칼,『팡세』)
지난 번에 번역하여 올린 글 「고통의 기독교, 그리스도의 고뇌」에 이어 우나무노 Miguel de Unamuno의 『기독교의 고뇌 Agony of Christian』 의 9장을 번역해 올린다.
이 글을 읽으면서 파스칼의『팡세』를 참조하면 좋겠고, 이미 번역해 올린 셰스토프의 에세이「겟세마네의 밤 : 파스칼의 철학」도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초역이므로 오역이 있을 수 있다. 발견되는 즉시 수정하겠다. 인용된 문헌의 국내 번역본이 있는 경우 찾아서 이를 밝힐 것이다. 특히 우나무노가 인용한『팡세』의 경우 단장(短章)의 분류 번호가 한국어 번역본과 차이가 있다. 조만간 번역본 확인을 거칠 것이다.
오늘도 방문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9장 파스칼의 믿음
구체적 사례를 통해 말하자면, 블레즈 파스칼의 영혼 속에서 기독교가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를 위해 나는 파스칼의 믿음에 대해 그의 탄생 300주년 기념일인 1623년 6월 19일에 작성한 내용을 간략한 추가 설명과 함께 기술하겠다:
파스칼이 우리에게 남긴 작품들, 특히 그의 『팡세 Pensées』를 읽는 것은 철학을 연구하도록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알아가는 것, 영혼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고통의 성소로 들어가 영혼이 가시옷 아래에서 완전히 드러난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사람은 또 다른 인간이 될 것이기 때문에, 파스칼 자신이 『팡세』 64에서 지적한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나는 몽테뉴의 글에서 읽는 모든 것을 그가 아닌 나 자신 안에서 발견한다.” (국역, 단장 689, 415쪽)
위험이라고 했는가? 아니다, 그 속에 위험은 없다. 파스칼의 끝없는 힘은 그를 느끼는 독자만큼이나 많은 파스칼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그를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독자만큼이나. 그리고 그는 그의 고통스러운 신앙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살아 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에게 제 파스칼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스페인 사람이라서, 나의 파스칼도 당연히 스페인 사람일 것이다. 파스칼은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그는 『팡세』에서 두 차례에 걸쳐 성 테레사St. Teresa 를 인용하며 그녀의 깊은 겸손함, 즉 그녀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두 명의 스페인 사람을 연구했는데, 그 중 한 명은 몽테뉴를 통해 연구했다. 두 명의 스페인 사람, 또는 정확히 말하면 두 명의 카탈루냐 사람: Sabiude와 마르티니Martini, 『신앙의 단검 Pugio fidei』의 저자이다. 하지만 나는 바스크인이며, 즉 두 배로 스페인인 나는 그에게 영향을 미친 두 명의 바스크인Basque 정신을 구분할 수 있다: 포르-루아얄Port-Royal의 진정한 창시자인 생시랑 신부Abbe de Saint-Cyran와 예수회Society of Jesus 창시자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이다. 프랑스 포르-루아얄 장세니즘 Port-Royal Jansenism과 예수회교단 Jesuitism라는 두 극단이 서로 잔인하게 싸웠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 두 극단은 모두 바스크인들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아마도 그들의 전쟁은 내전보다 형제 간의 전쟁, 거의 쌍둥이 형제 간의 전쟁과 같았을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투쟁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형제 간의 전쟁은 파스칼의 영혼 속에서도 벌어졌다.
파스칼은 예수회 신부들이 쓴 책들을 통해 로욜라의 정신에 감동받았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이 예수회들을 꿰뚫어 보았고, 이그나티우스의 원래 정신을 억압하려는 무지한 자들을 인식했을 것이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편지들 중에는 파스칼의 영혼을 연구하는 데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편지가 있다. 바로 1553년 3월 26일 로마에서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들과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로, 여기서 그는 순종의 세 단계를 정립한다.
첫 번째 단계는 “명령된 것을 실행하는 것이며, 이 단계는 순종의 이름을 받을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이 단계는 두 번째 단계로 승화되지 않는 한 이 덕의 가치를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는 상급자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만드는 것이며, 명령의 효과적인 실행뿐 아니라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동일해지는 감정적 일치를 포함한다. . . . 그러나 자기 자신을 완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바치는 것을 추구하는 자, 즉 의지를 초월하는 자는 자신의 이해력을 바쳐야 한다(이것이 또 다른, 가장 높은 순종의 단계이다). 이는 단순히 상급자와 함께 원하는 것뿐 아니라, 상급자와 함께 느끼며, 자신의 판단을 상급자의 판단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는 경건한 의지가 이해력을 기울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순종하는 자는 상급자가 느끼는 것을 자신도 느끼도록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그는 상급자가 진리라고 선언하는 것을 진리로 믿어야 한다. 이 순종을 합리화하기 위해 체계적인 회의주의(회의(懷疑)scepsis는 명백하지 않은 것을 합리화하는 과정이다)를 통해, 예수회는 파스칼이 반대한 “카톨릭 개연론probabilism”을 창안했다. 그는 자신 안에서 그것을 느끼고 그 위험을 직감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the wager”에 해당하는 변증은 개연론적probabilist 논증 이상이 아닌가?
파스칼의 반항적인 이성은 세 번째 단계의 복종에 저항했지만, 그의 감각은 그에게 그쪽으로 끌려갔다. 1705년 클레멘트 11세Clement XI 교황은 교황 교서 『비네암 도미니 Vineam Domini Sabaoth』에서 교회에 의해 비난받은 문제에 대해 존중하는 침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교회의 결정이 정의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진심어린 믿음만이 충분하다고 선언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파스칼은 그런 선언을 받아들였을까?
파스칼은 본질적으로 순종적이지 않았고, 결코 자신의 이성을 길들일 수 없었으며, 가톨릭 교리에 설득되기는 했지만 결코 확신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순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순종할 때를 모르는 것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자”(“manque de savoir ού il faut se soumettre”)는 이성의 진정한 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팡세』 268). 이 '해야만 한다 falloir'는 무엇인가? 그는 “복종은 이성의 올바른 사용이며, 이는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이다” (269)라고 스스로에게 말했고, “이성은 복종해야 할 순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코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270)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교황은 그에게 복종 서약을 하지 않은 학자들을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873)고 생각했으며, 교황 무류성 교리Papal Infallibility(876)에 반대했다. 이는 예수회 복종 교리의 최종 단계로, 판단의 복종은 가톨릭 신앙의 기반이다.
파스칼은 순종을 추구했다. 그는 순종을 설교했고, 자신에게도 설교했다. 그는 울부짖으며en gemissant 찾았지만 찾지 못했고,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그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의 믿음은 설득의 문제였지, 확신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의 믿음? 하지만 그는 무엇에 믿었을까? 모든 것은 믿음과 신앙이 무엇으로 이해되는지에 달려 있다. “마음은 이성이 아닌 마음으로 하나님을 느낀다. 이것이 믿음이다: 마음으로 느낀 하나님, 이성으로가 아닌” (278).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단순한 사람들이 “이성 없이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분을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랑을 주신다. 그분의 마음은 믿도록 기울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이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한, 우리는 믿음에서 비롯된 유효한 믿음을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 (284).
유효한 믿음! 다시 한 번 개연론과 내기론과 마주친다. 유효한! 그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썼다: “이성이 이성적이라면...” (73). 가난한 수학자, ‘생각하는 갈대'인 파스칼, 블레즈 파스칼은 예수께서 '내가 너를 생각하며 고통 중에 계셨을 때’ 그 피의 방울을 흘리신 그 블레즈 파스칼은 이성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유효한 믿음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순종과 습관에서 그것을 찾았다:
" 이것은 자연스럽게 당신을 믿게 만들 것이며, 당신을 진정시킬 것이다... 당신을 마비시킬 것이다 [vous abestira]. ‘하지만 바로 그것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왜? 무엇을 잃을 것이 있을까?" (233).
무엇을 잃을 것이 있을까? 여기에는 공리주의적utilitarian, 개연론적, 예수회주의적, 비합리주의적 논리가 있다. 이 확률 계산은 우연과 비합리성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파스칼은 믿었을까? 그는 믿고 싶었다.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라는 또 다른 개연론자에 따르면, 수학적 지식을 갖추고 명석한 정신과 객관성의 감각을 지닌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믿음의 형태가 바로 '믿고자 하는 의지'이다.
파스칼은 합리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신의 존재 증명(242)에 반대했으며, “정통적인 저술가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자연에 의존한 적은 결코 없었다”고 지적했다. (243); 그리고 그가 언급한 “믿음의 세 가지 길”인 “이성, 습관, 계시”(245)에 대해, 편견 없이 파스칼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가 이성을 통해 믿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원하더라도 이성을 통해 믿을 수 없었으며, 자신이 설득한 것을 결코 확신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개인적인 비극이었다. 그는 내면의 독단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선호한 회의주의를 통해 구원을 찾으려 했다.
1870년 바티칸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교리적으로 무오류로 선포된 텍스트인 바티칸 공의회 교령에서, 하나님 존재가 합리적이며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고 부인하는 자에게 저주가 내리쳤다. 심지어 그 부인자denier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말이다. 이 저주가 파스칼을 저주했을까? 파스칼이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기보다는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분을 찾았을지라도, 진공 실험이나 과학적 작업에서 그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그분이 없으면 소멸될 것 같은 느낌을 피하기 위해 그분을 필요로 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추측이 아닐 것이다.
파스칼의 내면적 삶은 복음서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는 비극이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마가복음 9:24).
이 감정은 물론 정확히 믿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고 싶은 갈망을 나타낸다.
파스칼이 '마음의 인식 connaissances de coeurs'에 대해 말할 때 언급하는 진실은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며, 그가 잘 알고 있듯이 현실도 아니다. 그의 모든 노력은 자연 세계 위에 또 다른 초자연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초자연적인 세계의 객관적 현실성에 대해 확신했는가? 확신은 아니었지만, 설득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설교했다.
파스칼의 입장과 그가 반대했던 피론주의자들, 즉 파스칼이 자신도 그들 중 하나라고 느꼈기 때문에 반대했던 피론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한 가지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이렇다: 파스칼은 절망하지 않았고, 의심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부정이나 회의주의scepsis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교리를 요구했고, 자신을 어리석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것을 추구했다. 그의 논리는 변증법적이지 않고 논쟁적이었다. 그는 정반대의 합일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모순을 받아들였다. 프루동Proudhon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파스칼과 같았다:
“승리가 아닌 투쟁만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135).
그는 승리를 피했고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 승리가 결국 그의 이성이 신앙을 이기는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생에서 인간에게 벌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전쟁은 그들에게 가져다주려고 온 전쟁을 빼앗는 것이다” (498).
파스칼은 평화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연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연은 바로 이성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완전히 발달한 인간, 즉 자신의 이성을 인식하는 이성적 존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인간에게 로욜라의 방식에 따른 세 번째 순종의 단계가 수용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럼 은총이란 무엇인가? 또 다른 비극적인 회피이다. 파스칼이 최고 존재Supreme Being에게 간청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을 때(233), 그는 자신의 이성이 복종하도록 요청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복종했는가? 파스칼은 복종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죽음과 죽음 속에서만 평안을 찾았다. 오늘날 그는 우리 중 그의 벌거벗은 영혼을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영혼으로 만진 이들에게서 살아남아 있다.
파스칼은 포르-루아얄의 은둔자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자신도 은둔자였지만, 그는 수도사가 아니었다. 그는 독신이나 순결에 대한 서약을 하지 않았다. 그가 독신으로 죽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시민이었고, 시민적 인물civic man이었으며 심지어 정치적 인물이었다. 그의 예수회 반대 운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시민적이었고, 그의 『시골 친구에게 보낸 편지 Lettres Provinciales 』는 정치적이었다. 여기서 파스칼의 내재된 모순 중 또 다른 하나, 기독교의 고통이 그에게서 표현된 또 다른 뿌리가 드러난다.
『시골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쓴 같은 사람이 『팡세』를 썼다. 두 작품은 같은 근원에서 비롯되었다.
참고로, 이들은 '팡세 Pensees'라고 불리며 '사상 Idees'이 아니다: 이들은 사유thoughts이며, 관념ideas이 아니다. 관념은 단단하고 고정된, 형식화된 것이다; 사유는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하며 자유로운 것이다. 사유는 더 깊은 생각으로 이어지지만, 관념은 다른 관념과 충돌한다. 사유는 행동 중인 관념이나 관념의 형태를 띤 행동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관념은 교리이다.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파스칼의 『팡세』는 논쟁을 형성한다, 투쟁적인 논쟁을. 그가 계획했던 변증론을 썼다면, 우리는 『팡세』와 완전히 다른 것—그리고 훨씬 열등한 것—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본질상 『팡세』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투쟁적인 것은 변증론적이지 않다.
나는 러시아 작가 레프 셰스토프의 「겟세마네의 밤 : 파스칼의 철학」을 읽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췌한다:
만약 그들이 그곳에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면,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그는 그러한 법정에서 비난받을 수 있고 아직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암시하지 않는다. 신앙에 의한 구원과 인간이 참되고 합리적으로 유지해온 모든 것을 등지고 지지하는 그의 신비로운 "은혜grace" 개념에 대한 말은 거의 없다. 파스칼이 그것을 완성했다면 그 목적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진 생각보다 덜 대답했을 「기독교를 위한 고통Apology for Christianity」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미래의 작업을 위해 남겨둔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파스칼의 좋든 싫든 bon gre mal gre, 억견deraisonnements, 비이성적인 논리를 받아들인다.
우리 생각에 셰스토프는 역사가 이단자들에게 무자비하다고 말할 때 오류를 범한다—파스칼은 이성으로부터의 이단자였으며—그리고 그의 성소에 촛불을 켜도 아무도 파스칼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다. 파스칼은 실제로 귀기울이고 있으며, 고난agony 속에서 귀기울이고 있다; 셰스토프는 그를 듣기 때문에, 그가 그 훌륭한 연구를 쓴 것이다.
셰스토프는 말한다.
우리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는 파스칼이 아니라 데카르트이며, 우리는 파스칼이 아니라 데카르트의 진리를 받아들인다.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철학말고 또 어디서 찾을 수 있단말인가? 이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파스칼은 존경은 받지만 지나쳐 가는 사람이다. 항소할 수 없는 평결인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지만 자신이 경외admiration와 사랑으로 걸어온 길을 정말로 우회할 수는 없다. 단테의 ‘앞만보고 지나가라(guarda e passa)’는 경멸받는 자들을 위한 것이지, 경외받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즉 사랑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한, 철학에서 진실을 정말로 추구하는 것일까? 철학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형이상학일 것이다. 하지만 형이상학 외에도, 사랑 너머의 ‘메타-에로틱’, 고통과 꿈 너머의 '메타-아고닉meta agonic'이 존재한다.
『편지』는 『팡세』와 같은 정신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다른 갈등의 경험, 모순으로 가득 찬 또 다른 글을 대표한다. 이 편지에서 예수회를 비판하는 기독교인은 그들의 인간적, 너무도 인간적인 par trop humain 본성, 그들의 시민적·사회적 측면을 명확히 인식한다. 그는 그들의 느슨한 도덕성으로 인해 가능해진 타협 없이는 세상에서 윤리적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예수회의 은총 교리, 혹은 오히려 자유 의지 교리가 정상적인 시민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교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그는 모든 것이 반기독교적임을 느낀다. 따라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윤리학이 칼뱅주의와 얀센주의와 마찬가지로 예수회 윤리학만큼이나 기독교의 고통에 기여함을 볼 수 있다.
사실, 근본적으로 그리고 외관과는 달리, 윤리와 종교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윤리나, 혹은 도덕이라고 말하자면—윤리라는 말은 조금 교조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선한 사람이 되는 것과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다르다. 법을 어기지 않고 죽은 사람들도 있고, 또한 결코 어떤 선한 것도 원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반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도둑은 다른 범죄자가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며 신성모독을 저지른 것을 꾸짖으며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예수께로 돌아서서 말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스도는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누가복음 23:39-43)
죽음의 순간에 회개한 도둑은 그리스도의 왕국,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왕국, 육체의 부활을 믿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에게 성경에 기록된 첫 조상들이 타락한 에덴 동산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모든 다른 기독교인—심지어 모든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회개할 것임을 믿어야 한다. 또한 죽음 자체가 회개와 속죄의 한 형태임을, 죽음이 죄인을 정화함을 믿어야 한다. 카탈루냐의 뛰어난 시인 후안 마라갈Juan Maragall이 칭송한 강도 Juan Sala y Serrallonga는 교수대에서 죽기 전, 탐욕, 욕망, 정욕, 탐욕, 분노, 도둑질, 살인에 대한 속죄로 교수 집행관에게 말했다.
“나는 신앙고백을 외우며 죽을 것이나, 내 목에 매듭을 걸기 전에 '나는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파스칼은 『편지』에서 경찰의 도덕적 가치—실질적으로 경찰의 도덕적 가치—를 예수회의 엄격히 종교적이며 위안적인 가치에 맞서 옹호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후자가 순수한 종교에 맞서 사례주의적 도덕관을 갖춘 유연한 경찰력을 대표하고 있었을까? 두 주장 모두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사실 두 종류의 경찰, 두 가지 도덕관, 두 가지 종교의 유형이 존재한다. 이 이중성은 기독교의 고통과 우리 문명의 고통의 근본 원인이다. 『편지』와 『팡세』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은 그 자체로 모순된다.
심연 l’abime/abyss이 아니었다면 파스칼은 『편지』의 파스칼로 남았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편지』를 쓰면서 심연을 발견했으며, 더 정확히 말하면 『편지』는 『팡세』와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도덕의 깊이를 탐구하면서 그는 종교에 이르렀고, 로마 가톨릭과 얀센주의 가톨릭을 파헤치면서 그는 기독교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가톨릭의 깊이에 있으며, 종교는 도덕의 깊이에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 모순과 고통의 인물은 예수회주의가 수동적인 정신적 복종과 암묵적인 신앙의 교리로 모든 투쟁과 고통을 죽이고, 그와 함께 기독교의 생명 자체를 죽인다는 것을 예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칼은 절망의 순간에 유명한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그것은 당신을 믿게 만들고 당신의 이성을 마비시킬 것입니다 cela vous fera croire et vous abestira”
물론 기독교인은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다(s’abetir)—그는 이성적 자살을 저지르는 것이 허용된다. 그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은 타인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다—타인의 지성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예수회가 하는 일이다. 다만, 타인을 마비시키고 죽이려는 시도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도 마비되고 죽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아이처럼 대하는 그들은 그 용어의 가장 슬픈 의미에서 자신들이 유아적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회 신부, 특히 스페인 예수회 신부보다 더 유치한 것은 없다. 그들의 가짜 현명함은 순수한 전설에 불과하다. 누구든지 그들을 속일 수 있으며, 그들은 가장 큰 거짓말을 믿고 삼킬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현재 진행 중인 역사, 오늘의 역사는 마법 같은 코미디의 한 종류이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간다. Leo Taxil 같은 자들이 그들을 속였다. 그들 속에서 기독교는 고통받지 않는다: 투쟁하지도 않고 살아가지도 않으며, 죽고 묻혀 있다. 예수 성심 숭배 hierocardiocracy 는 기독교 종교의 무덤이다.
“그 질문을 나에게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저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교회Holy Mother Church에는 그 답을 아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스페인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교리문답서인 Astete 신부(예수회)가 작성한 교리문답서에 등장하는 특정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리고 해당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암묵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특정 사항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그들 자신도 잊어버리고 암묵적인 신자만큼이나 무지해졌다.
반교회주의자 알랭Alain은 그의 『기독교에 대한 고찰Propos sur Le christianisme』에서 이렇게 썼다:
“파스칼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반대한다; 그는 정통 이단자이다.”
정통 이단자! 정말로! “정통 이단자orthodox heretic”라는 표현은 용어 자체에 치명적인 모순을 내포한다. 두 대립되는 용어가 서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다른(heteros) 교리가 옳을 수 있기(orthos)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여전히 전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단자라는 용어는 더 명확하다. 이단자haereticus는 스스로 교리를 선택하는 자, 자유롭게 생각하는 자—자유롭게? 정말로?—그리고 올바른 교리를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자, 그것을 창조할 수 있는 자, 다른 사람들이 고백한다고 말하는 교리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자이다. 파스칼의 기하학 연구 과정에서 유사한 과정이 있지 않았나? 성 바울은 어딘가에서(현재 참고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내 생활 일정상 찾아볼 수 없다) 특정 교리에 대해 자신이 이단자라고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해 저는 이단자입니다”라고 그는 단호히 말한다. 나는 그의 그리스어를 번역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서 텍스트를 다룰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의 의미를 요약하면:
“이 문제에 대해 저는 일반적인 것이 아닌 제 개인적, 사적인 의견을 고백합니다.”
그는 이 점에 대해 일반적 상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검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개별적 감각을 선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누가 개인적 감각이나 해석이 때로는 일반적 상식의 원리를 발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누가 이단이 정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모든 정통은 처음에는 이단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관념을 재고하고, 재창조하며, 아이디어를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들의 악한 마법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이단자 파스칼은 가톨릭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이 고백한다고 알려진 아이디어를, 생각으로 전환하고, 교리를 삶의 진리로 만들며, 정통성을 재창조했다. 이 과정은 암묵적인 신앙, 예수회 '전문가charcoal burner의 신앙'과 정반대였다.
이성을 스스로의 의지로 마비시키고 순수한 고독 속에서 바보s'abetir가 되려는 자는 '바보bete'를 지배할 것이며, 야수를 지배하고 그보다 더 진정으로 초월할 것이다. 반면, 상급자에게 시체처럼 복종하는 자는, 제3단계의 복종에 따라 지성을 포기하고 상급자가 가장 좋다고 판단하는 것을 가장 좋다고 판단하며, 아마도 수도원 과수원에 심어진 지팡이를 물주는 일을 맡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장이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즉, 명령과 복종의 주제를 다룬 유머러스한, 유머러스한 놀이입니다. 명령하는 자도 복종하는 자도 지팡이가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 더구나 잎과 꽃과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족장 Patriarch 성 요셉St. Joseph의 싹트는 지팡이budding staff와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전에 계획된 공모이며, 인간 자존심을 길들이는 연습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복종이 오히려 자존심을 높이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높아지기를 노리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유형의 복종은 예수회의 부풀어 오른 집단적 자부심—루시퍼적 자부심Luciferian pride—을 낳았다.
파스칼은 예수회 신부들의 가벼운 대화, 그들의 세세한 논쟁과 소심함에 화가 났다. 그들의 결점이 소심하다는 건 아니다! 그들의 중간 지식(scientia media)이 그를 짜증나게 했고, 개연론(probabilism)도 마찬가지였다. 예수회 신부들은 자유를 즐기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선언한다:
“필요한 것에는 일치, 의심스러운 것에는 자유, 모든 것에는 사랑—필요할 때는 일치, 의심스러울 때는 자유, 모든 것에는 사랑.”
그리고 자유를 더 잘 행사하기 위해, 그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규정하며 의심의 범위를 넓힌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Sudrez 신부의 『메타피지카Metaphysics』를 읽기만 해도, 그가 머리카락을 길게 자르고 네 가닥으로 땋는 것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는 그들의 역사 연구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고고학을 넘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스핑크스의 꼬리에 있는 털을 세는 것으로 즐거움을 찾으며, 그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들의 노동은 자기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고 타인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회 신부—특히 스페인 예수회 신부, 다시 말하지만—가 자신이 연구에 전념했다고 말한다면 믿지 말자. 이는 그들 중 한 명이 매일 10마일 트레드밀을 돌며 거주지 정원을 돌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연스럽게도, 고독한 남자, 진정한 고독의 남자였던 파스칼, 예수께서 그에게 한 방울의 피를 흘리셨다고 믿고 싶어 했던 블레즈 파스칼은 이 급진주의자들과 화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과학! 나의 의학과 친구 중 한 명이 의사로서 오피아 Ofia의 수도원 신학생 숙소 구역에 있는 신학생을 돌보러 갔을 때, 그곳의 한 갤러리에서 대천사 미카엘이 발 아래에 악마 사탄을 두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반역의 천사 사탄은 손에— 현미경을 들고 있었다! 현미경, 과도한 분석의 상징! 이 사람들은 기독교의 고통을 막고 중단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살인으로 그렇게 한다.
“고통을 멈추게 하라!”
기독교를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들은 영적 연습과 교육의 치명적인 아편을 투여한다. 그들은 결국 로마 가톨릭교를 티베트 불교와 유사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