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나무노
우나무노 Miguel de Unamuno의 『기독교의 고뇌 Agony of Christian』 의 일부분을 번역해 올린다.
agony는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agony를 말할 때, 痛苦은 pain, suffering을 포함하는 세상의 근원적 아픔, 괴로움의 총체(『고통받는 인간』(손봉호))로 번역할 수 있다.
지금은 절판된, 오래전에 나왔던 한국어 번역본(1977)을 따라서 '고뇌'로 옮기겠지만, 문맥에 따라서 고통, 아픔, 괴로움의 뜻을 포괄할 수 있겠다.
요즘 영성과 신앙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조직적이고, 제도화된 현대의 종교에 대한 나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신없는 종교는 가능하지 않지만,
종교없는 신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질문은 현재 진행형이다.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모든 종교의 기본 전제는 고통이 아닐까?
그러나 증상에 대한 처방은 각각 다르다.
신과 단독자로서 대면함으로써 고통을 감내하는 기독교 전통,
집착이 곧 고통의 원인이므로 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불교적 대응 방법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고통은 또 하나의 기회이다. 바타유적 의미에서 고통은 극복하고 지나쳐야 할 병리적 감정이 아니다.
욕망과 두려움, 짙은 쾌락과 고뇌(고통)를 긴밀히 연결짓는 그것은 종교적 감정과도 다르지 않다.
(『에로티즘』 민음사, p41)
신성성의 내적 체험은 고통과 함께, 동시에 엑스타시로 다가온다. 이 황홀경과 환희는 "가능성의 극한"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다가갈 수 없는 깊은 곳, 내가 '가능성의 극한'이라 부르는 곳에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까마득히 어지러이 모습을 드러내는 대립들 앞에서,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에로스의 눈물』민음사, p51
고통 안에서, 고통과 맞대면하는,
깊은 심연을 소유한 그/그녀 만이 그 가능성의 극한인 고통의 엑스타시에 초대되리라.
어제도, 지금도
고통의/고뇌의 아픔,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외치는 그/그녀들을 위하여....
초역이기에 오역이 있을 것이다. 발견되는 즉시 수정할 것이다.
앞으로 우나무노의 에세이들, 예를 들면 『생의 비극적 의미 Tragic Sense of Life』등도 번역해 올릴 예정이다.
셰스토프, 벤자민 폰데인을 거쳐 이제는 우나무노에 이르는 여정이다.
이 여정의 끝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걸어가는 수밖에....
II. Agony
고통agony은 투쟁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오기 위해 오셨다: 평화가 아니라 투쟁이다. 당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태복음 10:34-36).
당신은 자신의 백성, 즉 자신의 집안 사람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을 기억하셨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마가복음 3:21).
그리고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49-53).
“그리고 평화는 어찌 될까요?”라고 우리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또 다른 유사한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절들은 더 많고 더 명확하게 평화에 대해 말해준다. 하지만 핵심은 이 평화는 전쟁의 열매이며, 전쟁은 평화의 열매라는 점이다. 여기에 고뇌가 있다.
누군가는 평화가 생명 혹은 죽음이며, 전쟁은 죽음이나 평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의 구분 없이 서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속의 평화—또는 평화 속의 전쟁—는 죽음 속의 생명, 죽음의 생명과 생명의 죽음이며, 이것이 바로 고뇌이다.
순수한 개념주의? 개념주의는 성 바울,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파스칼을 말한다. 열정의 논리는 개념주의적 논리이며, 논쟁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는 역설paradoxes로 가득 차 있으며, 타오르는 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기독교가 항상 고통 속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역시 고통 속에 있다.
우리 스페인의 십자가, 스페인의 그리스도는 매우 비극적이다: 그들은 고뇌agony하는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것을 재현represent하며, 아직 죽지 않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죽은 그리스도는 땅으로 돌아가 평화를 상징하며, 다른 죽은 자들에 의해 묻힌 죽은 그리스도는 성스러운 장례의 그리스도, 무덤에 누워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숭배되는 그리스도는 고뇌속의 그리스도이며, “과업이 완성되었다!”(Consummatum est!) 라고 외치는 분이다.
그리고 바로 이 그리스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ηλι ηλι λεμα σαβαχθανι/Eli, Eli, Lama Sabachthani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라고 외치는 그리스도를 고뇌받는 신자들이 숭배한다. 이 믿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의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으며, 자신이 믿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who believe that they believe).
삶을 살아가는 방식, 투쟁하는 방식, 생명을 위해 투쟁하고 투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 믿음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작품에서 이 점을 언급하며 복음서의 구절을 상기시킨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마가복음 9:24).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의심이란 무엇인가? 이탈리아어 Dubitare는 숫자 둘duo과 같은 어원을 공유하며, 투쟁due Hum과도 연결된다. 의심은 파스칼적Pascalian, 고난 또는 논쟁적인 의심, 데카르트적이지만 방법론적인 의심이 아닌, 삶에 대한 의심(삶은 투쟁이다)과 방법에 대한 의심이 아닌(방법은 길이다) 의심은 투쟁combat의 이중성을 전제한다.
우리는 교리서에서 배운 것처럼, 신앙faith이란 보지 못했던 것을 믿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그리고 보지 못한 것도 믿는 것—은 이성, 과학이다; 그리고 볼 것—또는 보지 못할 것—을 믿는 것은 희망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믿음이다. 시인으로서, 창조자로서, 과거와 회고(回顧)에 시선을 고정하며, 나는 확신하고 믿는다; 나는 부정한다, 나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내 시선은 현재를 바라보며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인간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실현 불가능한 미래와 영원을 바라보며 의심하고 투쟁하며 고뇌한다agonize.
나의 스페인 동포들, 스페인 백성들, 고뇌하는 논쟁적인 민족 속에서, 그리스도 당신의 고뇌 속에서의 숭배가 있다. 하지만 우리 고통의 성모 Our Lady of Sorrows, 그녀의 심장은 일곱 개의 칼에 찔린 La Dolorosa에 대한 숭배도 있다. 마리아 성모님은 명확하게는 이탈리아의 피에타Pieta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아들이 어머니의 품에 죽어 있는 것보다 어머니 자신, 아들을 품에 안고 슬픔 속에서 고통받는 성모님에 대한 숭배가 더 크다. 이는 고통받는 어머니에 대한 숭배이다.
또한 당연히 말하겠지만, 아기 예수Infant Jesus 숭배, ‘지구의 구체를 든 아기 예수(el Nifio de la Bola)’, 성탄 Nativity의 숭배, 그리고 아기 예수를 젖으로 생명을 불어 넣는 성모 숭배를 자랑한다.
1922년 팔렌시아 Palencia 근처 두에이야스Dueiias 트라피스트회 수도원Trappist monastery에서 성 베르나르도 축일날 본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사들은 성모님의 성당에서 성모님께 드리는 엄숙한 'Salve Regina'를 부르고 있었고, 그 장면은 촛불beeswax candles로 밝혀져 있었다. 높은 제단 위에는 예술적 가치가 큰 것은 아니지만 파란색과 흰색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그 분은 친척 성녀 엘리사벳St. Elizabeth을 방문한 후, 메시아의 탄생 전의 모습을 묘사한 듯했다. 하늘Heaven을 향해 팔을 뻗은 그 분은 부드럽고 비극적인 짐, 즉 신의 말씀Unconscious Word을 안고 하늘로 날아가고 싶어하는 듯했다. 젊은이와 노인, 일부는 아버지가 될 나이가 되지 않은 이들도, 일부는 그 나이를 넘은 이들도 성당을 그들의 기도문 노래로 가득 채웠다.
성모 마리아여 Janua coeli(Gate of Heaven)!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ora pro nobis." 그 성가(聖歌)는 요람의 노래였다, 죽음의 자장가였다. 아니, 태어나지 않은 자를 위한 요람의 노래였다. 노래하는 이들은 살지 않은 삶unliving life을 꿈꾸는 듯했다. 유아기로 돌아가 그 달콤한 유아기를 다시 경험하려는 듯, 입술에 천상의 모유 맛을 다시 느끼고 자궁의 보호를 받고 평화로운 성소로 돌아가 수세기 동안 태어나지 않은 자의 잠을 자고자 했다. 모든 세대의 세대까지 영원히 per omnia saecula saeculorum. 이 열망은 불교의 열반(涅槃)Nirvana—그 자체로 수도원주의적monastic 개념—와 매우 유사하지만, 이는 비록 반대처럼 보일지라도, 고뇌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히아신스 로이슨(페르 이아생트 Pere Hyacinthe) 신부의 일기—잊지 말아야 할 분—후에 더 자세히 논의할 이 분의 일기에서, 1873년 7월 9일자 기록을 보면, 그가 신성한 결혼mystico-carnal marriage 으로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시기에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에 대한 구절이 있다:
“그가 어머니의 심장 아래에서 적어도 9개월간의 달콤한 잠을 누리며 안식하길!”
이 달콤한 꿈 없는 잠은 두에나스Duenas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사들이 꿈꾸던 태아기의 지상 천국이었다.
한편 포르투갈의 신비주의자 헤수스의 토마스 Tome de Jesus는 그의 책 『Os trabalhos de Jesus』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성모의 자궁에 갇혀 있던 9개월 동안 겪은 고난에 대해 알려준다.
수도사들과 수녀들, 남녀를 불문한 고독한 이들의 고뇌는 성적인 것이 아니라 모성과 부성, 즉 최종성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영혼의 그릇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지 않을 것, 스스로 번식propagate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뇌를 겪는다. 죽음의 문턱에서, 세상의 끝, 그들의 세상의 끝에서, 그들은 육신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flesh에 대한 절망적인 희망으로 떨고tremble 있다.
Duefias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사들은 “창조주의 어머니,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Mater Creatoris, ora pro nobis!' 를 노래했다. 창조주의 어머니여! 인간 정신은 자신의 창조주를 창조하고자 갈망한다. 영원한 생명을 부여할 그분을. Mater Creatoris! 창조주의 어머니여! 고뇌의 외침, 절망anguish의 외침을 들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는 ‘주 어머니Mother of God’, 테오토코스(Theotokos, Θεοτόκος) 데이라파(Deipara)로 불리셨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누가 1:42)라는 말씀은 모든 것이 창조된 그 말씀the Word(요한 1:3)을 가리킨다. 영혼뿐 아니라 인간 몸, 부활할 몸도 말씀을 창조하기를 갈망한다. 말씀이 다시 영혼을 창조하여 영원히 만들며, 영혼의 요람과 무덤이 되는 몸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 몸은 영혼이 태어나고 죽는 곳,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곳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은 죽는 것이며, 다시 죽지 않는 것은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고뇌의 변증법이다.
아마도 그 검소한 트라피스트회 수도사들 중 한 명은 그때 이미 나의 회개conversion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고뇌한다.
하지만 기독교란 무엇인가? 그들은 정의definitions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