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바이처의『역사적 예수 탐구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의 결론을 번역하여 올린다. 슈바이처의 영문판 저작은 William Montgomery의 번역으로, 1910년에 출판되었다.
번역본으로 The Project Gutenberg E-Book, London Adam and Charles Black(영문 2판, 1911)을 활용했다.
다음의 간략한 소개는 위키에 올라와 있는 내용을 요약한다.
이 저서는 슈바이처가 의학 학위를 받기 전 1906년(『Von Reimarus zu Wrede: eine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에 쓴 예수의 생애 연구에 대한 역사 비평서에 속한다.
그는 이 저서에서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문제에 대한 이전의 모든 연구를 검토하면서, 예수의 형상이 시대에 따라, 다양한 저자들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를 고찰한다.
그는 예수의 생애와 사상은 "후기 유대인의 종말론"으로 특징짓는 예수 자신의 신념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하며, 현대인의 사고 방식이나 감정 방식과 유사하게 그를 이해하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임박한 세상 종말을 예상했다고 한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 14~17)
슈바이처는 1세기 신학의 기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약속이 임박한 성취를 믿었다고 결론지었다.
앞에서 나는 예수의 생애와 사상 탐구 작업 중 하나로 「폴 버호벤의 예수의 생애」를 번역하여 올린 바 있다.
계속하여 <실존과 영성> 시리즈와 관련하여 예수에 관한 글을 번역할 계획이다.
초역이므로 오역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발견되면 즉시 수정하겠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결과의 요약>
부정 신학negative theology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의 생각을 찾을 수 있다. 예수의 생애Life of Jesus에 대한 비판적 연구의 결과보다 더 부정적인 것은 없다.
메시아Messiah로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시고,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의 윤리를 전파하시고, 이 땅에 천상 왕국Kingdom of Heaven을 세우시고, 자신의 사역에 마지막 헌신을 드리기 위해 죽으신 나사렛 예수The Jesus of Nazareth 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합리주의에 의해 설계되고, 자유주의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으며, 현대의 신학에 의해 역사적 외피를 두른 역사적 인물이다.
이 이미지는 외부로부터 파괴된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표면화되는 구체적인 역사적 문제들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고, 갈라지고, 해체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들에 적용된 모든 기교artifice, 예술art, 인위성artificiality, 그리고 폭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130년 동안 신학의 예수the Jesus of the theology가 구축된 설계에 맞춰 다듬어지기를 거부했고, 덮어지자마자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 철저한 회의론과 극단적인 종말론 eschatological 학파는 문제들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함으로써, 각 문제를 개별적으로, 즉 덜 어려운 형태로 해결하려 했던 현대 신학의 '분열과 지배'(Divide et impera)를 종식시킴으로써 파괴 작업을 완수했을 뿐이다. 이제부터는 일련의 문제에서 하나의 문제를 골라내어 그 자체로 처리하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전체의 무게가 각 문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해결책이 무엇이든, 미래에 대한 비판이 이미 인식되고 인정된 문제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려낼 역사적 예수는 현대 신학이 그 자체의 반-역사적half-historical 이고, 반-현대적인half-modern, 예수에게서 요구했던 공헌을 결코 현대 신학에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메시아였으며, 초기 복음서 기자의 문학적 허구 literary fiction 에 근거하든, 아니면 순전히 종말론적인 메시아적 개념에 근거하든, 그는 메시아로서 살아온 예수일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분은 오늘날의 종교가 오랫동안 고수해 온 관습에 따라, 스스로 만들어낸 예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사상과 관념을 부여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 것이다.
또한 대중적인 역사 서술을 통해 대중에게 공감을 얻고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인물도 아닐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우리 시대에 낯선 존재이자 수수께끼일 것이다.
예수의 생애 연구는 기묘한 역사를 지녀 왔다.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여정을 시작하며, 그분Him을 발견하면 스승Teacher 이자 구세주 Saviour로서 우리 시대로 곧바로 데려올 수 있다고 믿었다. 수 세기 동안 교회 교리라는 돌덩이에 묶여 있던 예수의 끈을 풀어내고, 다시 한번 생명과 움직임이 그 형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기뻐했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가 마치 그 형상을 만나러 나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예수는 머물지 않았다. 우리 시대를 지나 당신 자신의His own 시대로 돌아갔다. 지난 40년간 신학을 놀라게 하고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온갖 강압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우리 시대에 붙잡아 둘 수 없었고, 결국 놓아주어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예수는 어떤 역사적 독창력을 발휘해서가 아니라, 해방된 진자liberated pendulum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 inevitable necessity에 의해 당신 자신의 시대로 돌아오셨다.
합리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현대 신학에 의해 구축된 기독교의 역사적 토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가 역사적 토대를 잃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역사적 신학이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완성에 가까워지자 산산이 조각난 그 작업은, 어떤 역사적 확증이나 정당화와도 무관한,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역사적 토대를 쌓은 벽돌에 불과했다.
예수님은 우리 세상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분에게서 강력한 성령의 힘spiritual force 이 흘러나와 우리 시대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어떤 역사적 발견으로도 흔들리거나 확증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견고한 기초이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우리 시대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 시대에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오류였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첫째, 그러한 예수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역사적 지식이 현존하는 영적 삶existing spiritual life에 더 큰 명료함을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영적 삶을 존재하게existence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현재를 파괴할 수 있고, 현재를 과거와 조화시킬 수 있으며, 어느 정도 현재를 과거로 옮겨 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에 대한 독일 문화권의 연구German research가 이룬 가치는 과대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인류의 정신적, 영적 삶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진지함sincerity의 독특하고 위대한 표현이다. P. W. Schmidt, Bousset, Jülicher, Weinel, Wernle, 그들의 제자 Frenssen, 그리고 종교사 연구 결과를 피상적이지 않으면서도 대중적인 형태로 더 넓은 대중에게 알리는 임무에 부름받은 다른 학자들이 현재와 가까운 미래의 종교 생활을 위해 해 온 일은, 이러한 사상가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거나 전혀 받지 않았던 라틴 문화권의 문학과 사회적 문화를 살펴볼 때에만 분명해진다.
그러나 의심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었다. 우리 현대 신학자들은 우리의 역사적 방법론, 역사적 예수에 대해 지나치게 자만하며, 우리의 역사적 신학이 세상에 가져올 수 있는 영적 이득spiritual gains 에 대한 믿음에 지나치게 확신한다. 역사적 지식의 증가를 통해 새롭고 활력 넘치는 기독교를 건설하고 새로운 성령의 힘spiritual forces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고정관념처럼 지배한다. 우리가 씨름하고 어느 정도 완수해 온 과제가 위대한 종교적 과제의 지적 예비 과정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역사적 예수를 통해 우회로를 통해 우리 시대를 이끌어 현재의 영적 권능spiritual power이신 예수에게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우회로는 이제 진정한 역사에 의해 봉쇄되었다.
우리가 사람들과 복음사이에 끼어들어, 예수님의 말씀으로 개별적 인간 individual man을 홀로 두기를 거부할 위험이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너무나 축소된 too small 예수를 제시할 위험이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우리 인간적 기준과 인간적 심리human psychology에 맞추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60년대 이후에 쓰인 예수의 전기를 읽고, 그 책들이 주님의 위대하고 권위적인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개인들에게 숙고할 것을 요구하는 그 분의 절대적인 세상 imperative world을 어떻게 약화시켰는지 주목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분이 우리의 윤리적 이상과 충돌하지 않도록, 그리고 세상을 부정하는 그분의 모습을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맞추도록 조정했는지를 살펴본다.
가장 위대한 말씀들 중 많은 것들이 마치 폭발물이 제거된 폭탄처럼 구석에 놓여 있다. 우리의 종교적 세계- 수용 체계system of religious world-acceptance와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분의 말씀에서 근본적인 종교적 힘을 조금도 빼낼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진정으로 지니셨던 것과는 다른 언어를 우리 시대에 사용하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도 약해졌고, 우리 자신의 생각에서 활력을 빼앗아 역사 속으로 투사하고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말하게 만들었다. 역사를 모든 것과 뒤섞고, 예수에게서 자신의 생각, 심지어 진정한 사변적 형이상학을 종교의 영역에서 추방해 버린 초라한 형이상학의 허울뿐인 유사-형이상학까지도 발견하는 능력을 자랑스러워하며, 예수를 그 생각들을 표현한다고 묘사하는 것은 현대 신학에 있어 불행에 다름 아니다. 현대 신학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 하니라" [눅 9:62] 라는 비난을 거의 받아 마땅했다.
따라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 연구 과정에서, 두 세대에 걸쳐 저항을 거듭하며 처음에는 한 가지 방편을 시도하고, 그 후에는 또 다른 방편을 시도했던 신학은 진정한 역사에 의해, 우리 기독교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 했던 인위적인 역사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Wrede가 강조했듯이 때로는 가장 급진적인 비판이 되는 사실들에 굴복하게 된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역사는 신학으로 하여금 역사를 초월하고, 다른 대장간에서 단련된 무기를 들고 이 세상에 대한 예수의 주권과 통치권lordship and rule을 위해 싸우도록 강요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경험했던 것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인류가 그 어느 때보다 역사적 예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이미 그분을 우리 시대로 끌어들이려고 손을 뻗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 시도를 포기하고 역설적인 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에서 우리의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의 인격과 삶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종교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진실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예수가 아니라, 인간 안에 영적으로 spiritually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 시대에 중요하며 우리 시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나와 인간의 영성spirits 안에서 새로운 영향력과 통치를 갈망하는 영성spirit이며, 바로 그것이다.
역사는 예수의 존재 안에 내재한 영원성을, 그것이 스스로를 형성했던 역사적 형태에서 분리하여 살아있는 영향력으로 우리 세상에 도입하는 데에 헌신하지 않았다. 역사는 이 일에 헛수고했다. 물풀이 물속에서 자라는 동안은 아름답지만 뿌리에서 뽑히면 시들어 알아볼 수 없게 되듯이, 역사적 예수도 종말론이라는 흙에서 뽑혀 나와 시간적 조건에 종속되지 않은 존재로 "역사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할 때와 같다.
예수 안에 내재한 영원성은 역사적 지식과는 절대적으로 독립적이며, 세상에서 여전히 역사하시는 그분의 영(성령)His spirit 과 접촉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예수의 영(성령)Spirit of Jesus을 소유하는 만큼 우리는 예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게 된다.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로서 예수님은 우리 시대에는 여전히 낯선 분이지만, 그분의 말씀 속에 숨겨진 그분의 정신은 단순함 simplicity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지며, 그 영향력은 직접적 direct이다.
모든 말씀은 그 나름대로 온전한 예수님whole Jesus을 담고 있다.
우리 앞에 서 계신 그분의 그 낯설고 무제약적인unconditionedness 모습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더 쉽게 찾을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종말론적 주장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대한 그분의 말씀의 의미를 없애버릴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서 종말론적으로 조건지어지지 않은 요소들을 찾아내려는 열광적인 열망이 있었다. 어떤 말씀이든 그 표현이 종말론적 연관성을 절대적으로 암시하지 않는 것이 발견되면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적어도 그 말씀들은 다가올 대멸절débâcle에서 무사히 건져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영원한 것은 바로 종말론적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지닌 현대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정신mind 의 표현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세상에도 적합하다. 왜냐하면 어떤 세상에서든 그 말씀은 그 도전에 감히 맞서고, 그 도전을 무의미하게 만들거나 왜곡하지 않는 사람을 세상과 시대를 초월하여 내면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어, 자신의 세상과 시대에 예수님의 권능power of Jesus을 전달하는 단순한 통로가 되기에 합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대 예수의 생애Modern Lives of Jesus는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 예수의 삶에 대한 완전한 인상을 줌으로써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묘사된 역사적 예수는 개별적인 말individual word을 통해 개별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예수의 삶 전체에 대한 어떤 개념도 형성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예수를 이해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궁극적인 목적이 제자들에게도 미스터리mystery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몰두한 탓에, 현대 신학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세상을 받아들이는 윤리를 찾으려 한다. 바로 여기에 현대 신학의 약점이 있다. 세상은 스스로를 긍정하지만, 현대 정신은 그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이유로 현대의 삶, 즉 세상을 긍정하는 정신, 즉 현대의 삶을 전체적으로 고취하는 정신과 예수의 세상을 부정하는 정신 사이의 갈등을 없애야 하는가?
왜 개인의 정신이 예수의 세상을 부정하는 것을 헤쳐나가고, 물질적·지적 재화의 가치를 두고 매 순간 예수와 다투는, 결코 쉬지 못할 갈등을 피해야 하는가?
일반적이고 사회 제도적인 관점에서는, 예수의 관점에 의식적으로 반대하며 세상을 긍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세상이 스스로를 긍정했다는 근거 위에서!
그러나 세상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긍정이 기독교적이려면,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세상에 대한 개인적인 거부personal rejection를 통해 개인의 정신 속에서 기독교화 Christianised되고 변형되어야 한다. 종교적 에너지는 이렇게 형성된 긴장을 통해서만 우리 시대에 전달될 수 있다.
현대 신학은, 평화를 위해, 개신교가 공감하지 못했던 예수의 말씀 속의 세상 부정 world-negation을 부인하고, 결국 활시위를 풀어 개신교Protestantism를 종교적 세력이 아닌 단순한 사회학 세력으로 만들 위험이 있었다. 또한 예수의 말씀에 반대하여 세상에 대한 긍정을 고수한다는 사실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내적 위선 inward insincerity의 위험도 있었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진정한 역사적 예수가 현대 예수를 전복하고, 현대 정신에 맞서 일어나 이 땅에 평화가 아닌 칼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분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teacher도 아니었고, 결의론자casuist도 아니었다.
그분은 위엄있는 통치자 imperious ruler였다. 그분은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에 깊이 계셨기에 자신을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었다. 그것은 그분이 권위 있는 authoritative 통치자였다는 사실을 시간적으로 조건지어진 표현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분을 그러한 분으로 인정하는 것을 표현했던 이름들, 즉 메시아,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비유가 되었다.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표현하는 명칭은 찾을 수 없다. 그분은 그 옛날 이름 없는, 알려지지 않은 분as One unknown으로 호숫가로부터 우리에게 오셨다.
그분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who knew Him not 사람들에게 오셨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으로 “나를 따라오라!”(마 4:19)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시대를 위해 완수해야 할 과업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그분은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분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지혜로운 자든 어리석은 자든,
그분은 그들이 그분과 만나며 겪게 될 수고로움toils과 갈등과 고통sufferings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며,
형언할 수 없는 신비처럼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own experience 통해 그분이 누구인지Who He is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