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C. 솔로몬의『회의주의자를 위한 영성 Spirituality for the Skeptic』의 마지막 장을 번역하여 올린다. 이 저서의 1장과 5장은 각각「비극으로서의 고통 : 회의주의자를 위한 영성」,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번역하여 올린 바 있다.
<변화하는 자아 : 자아, 영혼, 그리고 영성>
옛날에 장주 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럭펄럭 경쾌하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스스로 유쾌하고 뜻에 만족스러웠는지라 자기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화들짝하고 꿈에서 깨어 보니 갑자기 장주가 되어 있었다. 알지 못하겠다. 장주의 꿈에 장주가 나비가 되었던가 나비의 꿈에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가?
—장자
1장에서 나는 영성이 자아와 깊이 관련되기는 하지만, 무아(無我)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자아의 확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표현은 물론 온갖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세상을 자신의 영역, 즉 개인의 영역으로 여기는 확장된 이기적 자아에 대한 통속적인 해석이다. 혹은 단순히 확장된 나르시스로 오인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자아의 확장은 헤겔, 그리고 그 이전의 수 세대에 걸친 신비주의자들과 동양 사상가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적 자아 개념이 실제로는 매우 미약하고 부숴지기 쉽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한 관점을 옹호하기 위해 신비주의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형태로, 특히 다양한 사랑의 경험과 자연과의 동일시, 그리고 다양한 비서구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자아 정체성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가 1938년에 제시했듯이, 자아는 실체적 이형substantial variation에 종속된 "섬세한 범주delicate category"이다.
영성의 핵심인 자아와 영혼에 대한 집중은 복합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 한편으로 자아를 찾는 것은 의미에 대한 탐구와 개인적 의미와 세상에서 확실한 역할에 대한 욕구를 특징짓는 실존적 불안 angst의 표현이다. 이는 성찰과 자기-의식 self-consciousness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혼을 찬양하는 것은 죽음을 피하고, 아무리 보잘것 없는 형상일지라도 자신의 의식이나 적어도 정체성, 그리고 삶의 어떤 모습을 무한히 지속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러한 욕망들은 종종 뒤섞이고 혼동되지만, 앞서 말했듯이 죽음을 피하려는 욕망은 오인된 것이다.
죽음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삶의 일부일 뿐이며, 삶은 우리를 사랑하거나 우리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어쨌든 잠시나마 계속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죽음, 즉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 삶의 여정에서 그보다 더 중심적인 것은 없다. 의미의 초점으로서의 자아(혹은 영혼)는 영성에 대한 어떤 개념에도 필수적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자아와 영혼 >
자아는 의식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로, 쾌락과 고통을 감지하거나 의식하고, 행복과 불행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의식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를 돌본다.
—존 로크, 『인간 지성론』
영성은 세계 내 존재 being-in-the-world의 한 방식(혹은 여러 방식)이다. 영성은 세상 속 우리의 위치를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물론 영성은 존재론적 겸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데, 이는 우리의 궁극적인 무의미에 대한 감각으로 잘못 해석되었다. 하지만 영성은 우주의 충만함(또는 불교적 공(空))으로의 자기 부정self-dismissive이나 자기 포기self abandoning의 도약이 아니다.
영성은 우리의 구체적인 자아감sense of self 에서 시작되고, 그 자아감에 기반하며, 자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 다시 말하지만, 초월은 (이 영역을 넘어선 영역으로서의 초월) 뒤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 자아의 확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혼은 자아의 확장과 동시에 (수축을 통해) 그 확장을 부정하는 (오도된) 특성화 방식이다.
영성을 통해 확장되고 그 의미에서 초월되는 구체적인 자아감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의 개인적 정체성의 감각이다. 하지만 개인적 정체성은 문화에 따라 매우 다른 문제들을 제기한다. 대화할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중국에서는 "당신의 가족은 누구입니까?"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고, 미국에서는 "당신은 누구입니까?"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질문은 삶에서 의존하는 많은 것들, 기질, 재능, 그리고 가능성에 따라 각 개인에게 매우 다른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 잠재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불법 거래에 직면한 지쳤지만 여전히 성실한 사업가가 묻는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전공을 선택하는 학생이 묻는 "나는 누구입니까?", 시장에서 자신의 재능을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던 좌절한 주부가 묻는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과는 매우 다른 고민을 함축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성의 맥락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영원한 영혼과 우주의 광대함에 대한 자기의 상실에 대한 추측으로 빠르게 이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영적인 "누구-자아"는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든 영원이나 상실의 관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구체적인 개인적 정체성에서 시작하여, 모든 인간은 자신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개념은 그 범위와 내용 모두에서 의문시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최소한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름을 묻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때때로 그러한 질문은 예를 들어 사고나 오랜 약물 수면 후처럼 극적인 상황에서 묻는다. 이름이란 다시 되돌려 역사와 사회적 연결고리에서의 위치를 암시한다.
또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똑같은 질문은 절망의 외침이나 깊은 실존적 혼란이 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는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의미한다. 나의 역사와 사회적 위치와 지위가 의문시되는 것이다. 내가 깊이 고민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실존적 위기는 키르케고르가, 하이데거가, 사르트르가, 그리고 수백만 명의 에릭슨적 청소년들이 극찬했던 불안angst 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실존적 위기와 동일하지 않은 (그리고 일부 영성주의 전통과는 달리, 오랜 약물 복용 후의 수면과 유사하지 않은) 영적인 맥락에서, 이 질문은 평범한 자아와 단순한 사회적 자아 정체성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어려운 질문은, 얼마나 "더more?"를 요구하는가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초월적이고 신적인 세계로 도약하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몇몇 철학적 또는 세계주의적 순간에 우리는 이 확장된 개인 정체성을 추상적인 종(種)의 용어, 즉 "나는 인간 존재이다"라는 말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영성을 향한 한 걸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잠시 동안은) 우리 자신을 각자의 관심사를 가진 특정 존재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본질적으로 유사한 존재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화된 자아감은 고전 미술, 예를 들어 그리스 미술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스 미술에서 영웅적인 인물들은 개인("있는 그대로 warts and all")이 아니라 이상적인 유형으로 묘사된다. 이와 대조되는 것이 바로 영적이지 않다고 비하받은 악명 높은 로마인들의 조각상인데, 그들 조각상에는 단점이 실제로 존재한다.
이러한 이상화된 자아감은 기독교와 유교와 같은 다양한 종교적 근원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데, 인간성은 모든 개인 안에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그다지 추상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이상화된 그리스인은 그리스인처럼 보인다. 인간성은 전형적인 자기 자신의 유형으로 묘사되었다. 유럽과 북미를 포함한 대부분의 문화적 맥락에서 인간 존재는 우리 자신과 매우 유사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와 매우 유사한much like us"(그리고 "개인person")은 어떤 경우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동료 남자 아테네 귀족들을, 다른 경우 예를 들면 클리퍼드 기어츠 Clifford Geertz에게서는 자바인들Javanese을, 또 다른 경우 예를 들면 조지 W. 부시에게는 충실한 공화당원들을, 또 다른 경우에는 중국인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정의는 포용과 동시에 배제한다. 이러한 배제는 "신의 사랑을 받는 자Beloved of God" 또는 "선택받은 민족Chosen people"으로 절대화될 때 더욱 타락해간다. 그렇게 쓰인 "인간 존재"라는 단어는 더 이상 생물학적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서투르고 때로는 억압적인 정치적 무기일 뿐이다.
자아에 대한 영적인 개념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개념을 거부하면서도 구체적인 개인적 자아를 존재론적 닻anchor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개인적 자아를 개별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고유unique"하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통념이 있지만, 이는 개인의 정체성과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무관하다. (로마 시대의 조각상들의 사마귀warts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고유하지 않고 (우리의 이상적인 원형과) 가장 중요한 특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중요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과 니체가 모두 주장했듯이, 개인이라는 범주는 특정 사회에서 종종 잘못되거나 사소한 방식으로 새겨진carved out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 철학과 종교에서는 순수한 주관성pure subjectivity을 향한 절정crescendo이 있었는데,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고 1300년 후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이 개념은 구체적인 자아가 우리 "내면 inside"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to be found, 우리는 "특별한 접근privileged access" 즉, "내성(內省)introspection"을 통해 직접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개인 영혼 개념은 내성적인 것으로 재구성recast되고, 실제로 데카르트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정신과 거의 동등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많은 문화권에서 자아감과 개인적 정체성은 자기 성찰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기묘하게 "사적인private" 개성과는 거의 또는 전혀 관련이 없다. 반대로 자아감과 개인적 정체성은 가족, 집단,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일상적인 자아 개념은 이미 확장되어 개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와 연결, 그리고 종종 땅과 풍요로운 자연과의 관계까지 포괄한다. 서구 철학에서도 생텍쥐페리와 같은 뛰어난 작가들이 "인간은 관계의 그물망일 뿐이며, 이 관계들만이 인간에게 중요하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철학은 여전히 개인주의적이며, 자아에 대한 편협한 자기 성찰적 패러다임, 즉 자아 또는 영혼은 행동과 "외부 세계external world"에서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내면에서 발견되는 무언가라는 은유적 개념에 너무 자주 사로잡혀 있다.
자아와 영혼의 개념에서 자기 성찰은 얼마나 중요할까?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looking into one’s soul"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영혼이 우리 경험의 특수성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이 과연 타당한 말일까?
아니면,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이런저런 방식으로 행동하고 이런저런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정도로, 즉 다른 사람을 바라보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정도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일까?
아니면, 더 모호하게, 우리는 자신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세계-내-존재를 의식하고 자각하는 한에서 바라보는 정도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본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 즉 단순히 "거기에-존재하는 것being-there"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보다 앞선 흄Hume처럼) 거기에는 영혼이 없다고 재빨리 말할 것이다. 따라서 내성을 통해서도 자신의 의식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자아인지 영혼인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으며, (하이데거가 그랬듯이) '내면으로 들여다보는' 은유가 과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더욱 깊이 질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욱 깊이 파고들면, 자신을 특정한 존재나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되지 않은 무언가, 어쩌면 특정한 위치에 놓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주적 또는 일반적인 의식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이것이 헤겔이 "절대 정신Spirit"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자의 영혼과는 달리 정신은 매우 개별적이고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것과 정반대일 수 있으며, 몸과 생물학적 세계와 구별되는 정신이나 주체는 확실히 아니다.
따라서 언뜻보면 단순해 보였던 것(우리 각자는 자신의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즉시 그것을 인지한다)이 수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자아, 영혼, 그리고 마음 사이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이 세 가지 다른 명칭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가(예를 들어 데카르트처럼)? 아니면 자아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이고 영혼은 초월적인 것이며, 자연적인 마음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한 사람, 한 영혼이라는 가정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주류 성격 이론 (그리고 할리우드 판타지)으로 옮겨간 다양한 자아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수많은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사랑하는 "탈중심화de-centered"되고 "분열된fragmented" 자아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러 불교 형태에서 핵심적인 "무아 no-self"(Anatman)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영성 탐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헤겔의 정신(Geist, 종종 영어로 "절대 정신mind"으로 잘못 번역됨)과 많은 신비주의자들의 주장, 즉 진정한 자아는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주관성subjectivity과 개별성을 버려야 할까, 아니면 그것들은 훨씬 더 크고 복잡한 현상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관점일 뿐일까?
<영혼과 사회(카프카의 정체성 위기)>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에서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는 생각했다. 꿈이 아니었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 정신-신체 이분법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정신과 뇌가 만난다고 하는 은유적 송과선pineal gland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그 사회에서 살아있는 사람 전체가 주된 초점이 되는 다양한 도덕적, 사회적 맥락을 통해서도 구분될 수 있다.
앞 장에서 나는 서구의 죽음에 대한 많은 사고방식의 유아론적 solipsistic 본질에 대해 논평했으며, 특히 개인의 영혼-생존 존재 soul-survival being로서의 기독교적 내세 개념이 가장 분명한 예이다. 하지만 삶과 자아의 본질에 대한 서구적 사고의 상당 부분은 유아론에 이를 정도로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즉,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로부터 고립된(혹은 적대적인) 고독하고 참된 자아the lone, true self , 니체와 키르케고르가 동의하며 "무리herd"라고 부른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인의 영혼 생존은 사후 영혼의 지속에 대한 유일한 개념이 아니며, 고립된 개인의 영혼은 영혼의 유일하거나 가장 좋은 실체도 아니다.
유대교에서 고대부터 이어져 온 계속성continuity 개념은 공동체의 기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 세계의 많은 고대 아시아 및 부족 종교에서 계속성은 살아있는 사회적 매개체, 예를 들어 새로운 세대를 통해서만 살아남는 영혼을 통해 발견된다. 영혼은 특정한 육신의 죽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육신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고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없다. 많은 종교에서 영혼의 생존은 과거의 행동, 즉 윤리와 도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도 철학에서 영혼은 이전 자아의 잔재(karma)로서 육신을 떠나 살아남는다. 죽음 이전에 그 사람을 규정했던 심리적 특질은 지속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지만, 그 사람의 도덕적 행동은 결정적이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특정한 기억과 개인적인 자아 정체성을 유지한다면 환생은 매우 다른 전망이 될 것이지만, 이는 동화 속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훌륭할지는 몰라도 캘커타Calcutta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인도 철학과 유대교 신학에서 자아는 사회적 자아이며, 인도의 영혼은 하나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론적 존재 holistic One로서 존속한다. (실제로, 개별성은 축복이 아닌 짐으로 여겨진다.)
데카르트의 자아 개념을 내성적인 개인 의식으로서의 정신으로 보는 관념을 거부한다면(또는 적어도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자아 개념 또한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헤겔과 니체를 따라) 다시 한번 지적할 수 있다. 개인적 자아the individual self, 즉 우리의 개인적 자아an individual self의 개념, 심지어 개인적 의식 개념조차도 특정 언어와 고유한 개별화 개념을 지닌 특정 사회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상과 유기적으로 교류하는 유기체와만 관련된 더 원시적인 자아 개념도 있지만(생물학자 루이스 토마스Lewis Thomas와 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Antonio Damasio의 저서에서 보듯이), 자아 개념이 관련성을 갖게 되는 자기-의식을 가진 성찰적 자아는 인간 특유의 것이다. 이를 이해하고, 자아가 온갖 해석과 변형transformation에 열려 있는 다양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영혼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자연주의적 영성 속에서의 정신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인 단계이다. 영혼으로서의 자아는 영원한 금덩어리eternal nugget 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항상 협상 가능한 세계의 일부이다.
이와 관련하여, 불쌍한 그레고르 잠자를 생각해 보자. 그는 (첫 문장에서) 창조자 프란츠 카프카에 의해 벌레로 변했다. 그 결과, 그레고르는 정체성 위기, 즉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정체성 위기는 대부분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다. 실존적 초점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사회 문제이다. 불쌍한 그레고르는 오늘 어떻게 출근할 수 있을까? 누이의 공포에 질린 비명과 혐오감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해충으로 전락한 것을 알게 된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충성스럽고 근면한 직원, 생계를 책임지는 훌륭한 사람, 그리고 악의없는 지극히 평범한 시민으로 생각해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만의 세계에서 거대한 해충으로 깨어난 그레고르는 여전히 등에서 내려오는getting off of his back 문제에 맞서 싸워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그의 사회적 당혹감을 다룬다.
마찬가지로, 청소년은 몸이 통제 불능이라기보다는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위치 때문에 어색한 나이에 처한 세대이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고, 어른으로서 보자면 무능한 존재가 된 것이다.
카뮈의 뫼르소(『이방인』에서)는 유죄 선고 받은자라는 호칭에 익숙해지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 호칭의 부정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불리고 무엇으로 분류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풍부한 주관적 경험의 감각에도 불구하고, 본래적인 자기 정체성이 없다는 점에서도 이방인strange이다.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구성물이다. 정체성 위기는 사회적 위기이다. 이것이 바로 장 폴 사르트르가 “즉자적in-itself”(신체적 사물성(bodily thinghood) 존재와 “대자적for itself”(의식) 존재 사이의 이원론적 변증법을 300페이지에 걸쳐 다룬 후, “대타적 존재Being-for-Others”를 세 번째 기본 범주로 제시하는 데 고집하는 이유이다.
단순히 영어로 표현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는 사실과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이 그 사실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실제로, 『존재와 무』의 세 번째 부분은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체계적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개인의 정체성을 제약하는 사실들은 주체에 의해 주어지거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 해석의 문제이며, 맥락과 타인의 (종종 악의적인) 동기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Huis Clos(No Exit)』에 등장하는 인물 가르생 Garcin은 총살대 앞에서 비겁하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정체성 위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두 영원한 룸메이트 에스텔Estelle과 이미 그를 경멸하는 이네즈 Inez의 희생양이 된다.)
상호 해석된 인격체mutually construed personhood에 대한 이러한 그림은 헤겔(사르트르의 어색한 독일 용어 중 일부도 헤겔에게서 따온 것)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우화에서 헤겔은 (본문은 너무 절제되어 있어 암시 이상을 할 수 없다) 인격체는 본질적으로 타인의 인정recognition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상호 인정 없이는 자아가 될 수 없으며, 이 인정은 명백히 자신을 공개적으로 구체화된 존재로 지칭한다는 것(데카르트적 내성적 자기 동일시self-identification 모델과는 대조적으로)이 일반적인 암시이다. 헤겔이 상호 관련된 개인을 자기 의식self-consciousnesses이라고 지칭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 주장은 다소 복잡해진다. 이는 그들이 이미 어느 정도 자기-인식 self-awareness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지만, 순수한 정신적 자아보다는 인격 인정의 우위가 충분히 분명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또한 자아와 자기-의식이 무엇보다도 지위의 문제이며, 지위는 다시 한번 상호 인정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우화의 단순화된 세계에서, 상호 인정에 참여하는 원형적-개인들proto-persons은 사회적 지위, 은행 계좌, 옷차림, 좋은 교육, 철학적 재치, 또는 우리가 스스로를 비교하고 측정하는 다른 평범한 미덕들이 없기 때문에 의지할 것이 많지 않다. 따라서 헤겔은 그들이 필요하다면 "죽음을 무릎쓰고to the death" 투쟁한다고 말한다. 물론 한쪽의 죽음은 다른 쪽의 목표, 즉 인정받으려는 목표를 무산시킬 것이다. 헤겔은 이어서 모든 지위 문제를 혼란스럽게 하고, 결과적으로 주인과 노예 모두를 자기- 이해에 대한 더 철학적인 시도로 몰아가는 기묘한 역전을 묘사한다.
헤겔의 요점은 개인의 자기- 정체성이 단순한 추상화, 즉 자기 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이면서도 사회적이며, 비록 그것이 구체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것을 역설적으로 거부할 때조차도 그렇다. 개인의 정체성은 결코 단순히 한 사람, 인간, 또는 특정 동물 종의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어떻게 자리 잡느냐 fit 에 따라 정의되는 구체적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헤겔이 말했듯이, 그보다 못한 것은 "공허한 보편성empty universal"일 뿐이다. 따라서 카프카의 잠자 Samsa는 그의 의식이나 그로테스크한 신체적 변형이 아니라, 그의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로 정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사람(혹은 특별히 책벌레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 헤겔의 마지막 말은 아니다. 우리의 자아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형성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자아는 그 상호작용, 즉 관계의 네트워크 그 자체이다. 하지만 상호의존적인 자아성interdependent selfhood 또한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문화적 정체성은 우리에게 최초의 영혼의 감각을 부여하지만, 여전히 영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영성이나 영적인 문제라는 명목으로 갈등하는 문화는 영성의 사례가 될 수 없다. 헤겔 자신의 철학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일 때) 민족간 공동체 international community 와 화합이라는 개념에서 크게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너무 제한적이다. 따라서 세상과의 이해와 조화를 추구할 때, 우리는 헤겔의 위대한 자아 개념, 즉 절대 정신에 대한 개념에 이끌린다. 이는 개인성이나 문화에 대한 대립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더욱 크고 포괄적인 이해로서 자아를 의미한다.
<영성, 영혼 그리고 자아의 변형Transformation of the Self>
영혼의 원자론soul atomism을 제거하자. [하지만] 우리끼리는, "영혼"을 동시에 제거하여 가장 오래되고 존경받는 가설 중 하나를 포기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영혼"에 거의 손을 대지 못하는 서투른 자연주의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들은 곧바로 영혼을 잃어버리곤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
영혼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랫동안 깊고 지속적인 무언가, 초월적이고 신성한 무언가를 암시해 왔다. 우리의 자연주의적naturalistic 영성은 그러한 영혼의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일까? 나는 니체가 여기서 중요한 통찰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초월적이고 비세속적인unworldly 영혼 개념을 제거한다고 해서 영혼의 가장 영적으로 중요한 측면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영혼의 원자론이라고 부르는 것, 즉 우리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형이상학적 금덩어리로서의 영혼이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영혼이라는 개념은 영성이라는 개념과 다소 동일해 보이기 시작한다.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통해 자신이 밝힌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차용한 인도 철학에서 아트만Atman이라는 개념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한다. 아트만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영혼이지만, 우리의 평범한 자아나 더 심오한 종교적 영혼 개념과 대립될 필요는 없다. 아트만은 바로 지금 여기 존재하지만, 일상생활의 자아보다 훨씬 더 큰, 더 깊은 어떤 것이 아니다.
만약 더 깊은 것이 단순히 심오함을 의미한다면(같은 은유이지만 통찰력과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일상생활 속의 종종 사소하고, 강박적이며, 경박한 자아보다 훨씬 더 깊다. 하지만 더 깊은 것이 깊은 내면을 의미한다면, 그러한 내성적 틀이 우리 마음 속 "여기"가 아닌 세상 "저기"에 존재하는 자아와, (부분적으로) 자아를 구성하는 열정, 즉 세상에 대한 열정을 모두 왜곡하는 이유를 우리는 이미 충분히 제시했다. 열정 passions은 단순히 우리 내면의 정신적 울림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것이다. 나는 영혼에 대한 이해를 세상에 대한 민감성과 참여에 초점을 맞추도록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내면성도 필요치 않없고, 초월적인 무아도 필요치 않다.
영혼을 무아나 형이상학적 영원한 금덩어리로 생각하는 것은 영혼에 가장 본질적인 것, 즉 영성, 즉 열정을 간과하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시끄럽고 폭발적인 열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고 만연한 열정, 즉 배려, 사랑, 경외 reverence, 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에 대한 거리 수준street-level의 개념(예를 들어, 철학적 장르, 음악적 장르로서의 블루스the blues 의 핵심 개념인 soul 로서)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의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초월적인 금덩어리에 대한 냉정한 개념보다는 더 정확하다. 영혼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심오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과 관련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 조건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소화하고 받아들인 것이 바로 영혼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평범한 자아와 다른 것이 아니라, 특별한 감정으로 가득 찬 평범한 자아이며, 그 어떤 감정도 삶 밖의 어떤 것으로 향할 필요가 없다. 사실, 그러한 초월적인 집중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철학적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성(megalopsyche)은 모든 미덕을 갖춘 완벽한 인간이다. 니체는 그러한 인물(그가 상상하는 초인Übermensch으로 대표되는)이 자신에게서 넘쳐흐른다는 견해를 이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니체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모든 미덕을 가진 탁월한 자와 초인은 모두 광범위하고 심오한 경험, 특히 상당한 고통을 겪은 사람을 나타내며, 그러한 고통과 미덕을 통해 영혼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정신 개념은 바로 모든 인류와 자연의 집합적 영혼이며, 경험과 고통을 통해 발전한다.
물론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영성과 영혼에 대한 자연주의적 개념은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자아로부터 급진적인 단절이나 도약leap 을 이루기보다는, 보다 평범한 자아 개념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지혜의 전통은 영성이 일상생활의 세세한 부분에서 발견되거나,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비로운 경험이나 갑작스러운 영적 돌파구 spiritual breakthrough라는 생각은 매우 매력적이며, 즉각적이고 타협 없는 만족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키워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 대부분에게 매우 분별력있는 열망sensible aspiration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혼의 발달에 대한 훨씬 더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접근 방식은 대인 관계적 연민의 정서sentiment of compassion를 통한 것이다. 불교도(그리고 서양의 쇼펜하우어)는 연민을 개인의 자아와 그 자아와 결합된 다른 모든 자아를 연결하는 열쇠로 여겼으며, 많은 불교도에게 이는 영성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했다. 불교 신자 중 가장 위대한 현자들이 묘사한 열반nirvana을 경험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모든 훌륭한 불교도는 매일 고통에 대한 연민을 경험하여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연결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나 이슬람의 수피교도 Sufis 중 마이스터 요하네스 에크하르트Meister Johannes Eckhart가 묘사한 신비주의적 지복(至福)mystical bliss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지만, 모든 훌륭한 기독교인이나 수피교도는 매일 고통에 대한 연민을 경험하여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연결한다. 이는 앞서 영성을 열정으로 묘사한 것과 잘 들어맞는다.
연민은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의 차원이 아니라, 직접적인 감정(여기서 감정은 당연히 이해를 포함한다)을 바탕으로 타인과의 상호 연결성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연민을 통해, 놀랍도록 행운과 안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조차도 타인의 고통을 공유할 수 있다. 단순히 간접적으로만이 아니라 (음악에서 블루스처럼)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 삶과 그 어려움을 어떻게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열정적인 이해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연민을 통해 우리는 사르트르가 말했던 다소 편집증적인 "대타 존재being-for-others"라는 개념을 넘어설 수 있다. 이 개념에서 타인은 우리 자신의 연장선이 아닌 위협으로 여겨진다.
또한 연민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영혼 공동체(동물과 인간 모두)에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실제로 니체는 이 점을 강조했으며, 동정심과 연민(Mitleid)을 그토록 철저히 비난하게 된 것은 바로 그의 과민한 본성 때문이었다.
영성은 자아의 부정이 아니라 확장이라고 말할 때,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바로 영혼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이러한 공동체적 감각communal sense of self이며, 이는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연민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부정적인 것, 즉 세상의 고통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painful awareness 일 필요는 없다. 세상의 기쁨에 대한 긍정적인 감각, 삶을 나누고 타인의 행복을 나누는 행복감일 수도 있다. 영혼과 영성은 이러한 연민 어린 평범한 자아에 대한 확장되고 강화된 감각이라는 개념에서 자연스러운 기반을 찾는다. 공동체와 조화를 추구하고 자연계natural world를 포용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떤 이상화된 비전이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자아이다.
우리가 사소한 노역과 경쟁에 갇히는 것은 우리 자신을 왜곡하는 것이며, 냉소주의자들이 인간 본성의 핵심에 있다고 항상 생각하는 이기심은 오히려 인간 본성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영혼은 자연스러운 것이자 추구해야 할 대상이며, 어쩌면 우리의 진정한 자아라기보다는 더 나은 자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혼에 대해 말하는 것은 평범한 개인의 자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아를 온전히 깨닫는 것이다.
영혼을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후에도 삶이 지속될 가능성이 아니라, 오히려 삶 속에서 자아가 본질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이다. 이는 종교마다 구원이나 깨달음의 관점에서, 신앙, 선행, 기도, 합창, 또는 개인적인 명상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된다.
다양한 전통을 통해 우리는 일상생활 속의 자아가 반드시 진정한 자아 real self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너무 자주 이기적이고,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과 이익에 너무 쉽게 사로잡히는 자아는 사실—우리가 때때로 의심하듯이—왜곡된 자아, 망상에 빠진 자아, 자신과 하나가 되지도, 평화롭지도 않은 자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인 자아를 수양과 영성을 통해 변화시키는 대신 희생하거나 다른 자아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통해, 부처와 예수는 고통에 대한 그들만의 이해를 통해 자아의 변화를 추구했다.
많은 영적 전통에서 삶의 목적 자체가 그러한 변화를 이루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길에서 사도 바울의 회심처럼 한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설적인 자기 수양을 보여준 티베트 승려들처럼 평생의 의식과 수행이 필요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아의 변화는 집단과 전통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전통을 넘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복합적인 축복을 누리고 세상에 닻을 내리지 않는 우리들에게 영성은 오히려 고된 과정이다.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럴듯한 표현과 진부한 말에 회의적이며, 고집스럽게 평생 동안 우리가 만들어 낸 개별성의 한계에 좌절한다.
하지만 영성과 철학이 지칭하는 자아가 일상의 자아에 불과하다면, 그저 일상적인 자아만은 아니며, 더 나은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려는 엄청난 노력이 바로 영성의 본질이다. 따라서 헤겔의 오래된 견해를 빌리자면, 영성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는 영성이 종종 약속하는 진정한 깨달음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처럼 자연적인 영성 개념은 오늘날의 나르시스적narcissistic이고 물질주의적인 시대에 추구해 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따라서 영혼은 정신과 영성을 만나는데, 고통에서만이 아니라 전 우주적 기쁨과 유머에서도 그렇다.
니체의 유명한 언급, "인간 삶의 디오니소스적 측면"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