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 카루스 Cathy Caruth의 『수취되지 못한 경험 : 트라우마, 서사 그리고 역사 Unclaimed Experience : Trauma, Narrative, and History』의 5장 부분을 번역해 올린다. (이 저서는 최근 『트라우마, 소유하지 못한 경험』이라는 제목과 김성훈, 나익주 선생의 공동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번역 당시 국내 출간 정보가 업데이트 되지 않아 확인하지 못했다.)
이 책의 서문은 앞서 올렸던 <트라우마 - 상처와 목소리 : 캐시 카루스>를 참조하시면 될 것 같다.
나의 인식론적, 경험적 기반이 인문학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임상 및 의학적 접근의 <트라우마 연구>와 의료적 치료와 처방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부 재정이 막대하게 투입되고, 그 산출 효과를 검증해야 하는 <트라우마의 정책적 접근> 은 내가 가장 경원시하는 접근 방식이다.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재난, 그로인한 심각한 병리적 증상만이 트라우마의 전부는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스몰 트라우마'가 얼마나 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를 환기하고, 서로의 아픈 경험을 공유하며,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자기 스스로의 치유에 대한 긍정적 감각을 되찾기 위해 트라우마의 인문학적 기초와 토대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고민들이 이 책 전체를 번역하기로 마음먹게 된 이유이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 될 것이지만, 꾸준히 번역 글을 올리겠다.(서문과 5장 번역 당시 국내 출간을 확인하지 못한 채 책 전체의 번역을 시도하기로 했으나, 번역 기획을 수정한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길을 꾸준히 걷겠습니다.
5장 트라우마적 깨어남(프로이트, 라캉 그리고 기억의 윤리학 Traumatic awakenings(Freud, Lacan, and the Ethics of Memory)
Les desirs entretiennent les reves. Mais la mort, elle, est du cote du reveil.
욕망은 꿈을 지속시키지만, 죽음은 깨어남의 편에 있다.
-자크 라캉 Jacques Lacan
세기 전환기 프로이트와 피에르 자네Pierre Janet의 작업에서 트라우마 개념이 등장한 이래, 그 개념은 우리에게 단순한 병리 pathology 이상의 것을—곧 정신의 현실 관계를 둘러싼 근본적인 수수께끼를—제기해 왔다. 일반적 정의에서 트라우마는 예상치 못했거나 압도적인 폭력적 사건 혹은 사건들에 대한 반응으로 기술된다. 이러한 사건들은 발생 당시 완전히 파악되지 않지만, 이후 반복적 플래시백 flashbacks, 악몽nightmares, 기타 반복적 현상repetitive phenomena으로 되돌아온다.
트라우마적 경험은 그 안에 포함된 심리적 고통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역설을 시사한다. 즉, 폭력적 사건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는’ 순간seeing of a violent event이 역설적으로 그것을 ‘알 수 없는’ 절대적 무능력absolute inability to know it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즉 긴급성 immediacy이 역설적으로 사후성(事後性belatedness , Nachträglichkeit)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의식에는 포착되지 않으나 시각을 반복적으로 침범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의 반복은, 단순히 보이거나 인지될 수 있는 것의 차원을 넘어서는 더 큰 사건-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 관계는 반복적 ‘보기seeing’의 핵심에 남아 있는 사후성과 불가해성incomprehensibility과 불가분리적으로 얽혀 있다.
이 장(章)에서 나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한 꿈—아이가 죽은 뒤 그 다음 밤에 아버지가 이 죽은 아이에 관해 꾸었다는 꿈—그리고 자크 라캉이 그의 세미나 「투케와 오토마톤 Tuche and Automaton」에서 제시한 이 꿈의 재해석 속에서 드러나는 ‘봄’과 ‘앎’seeing and knowing 의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이 꿈을, 우리가 왜 잠을 자는가—곧 우리 바깥에 놓인 죽음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는 방식—에 대한 전형적(비록 난해한) 설명으로 소개하는 반면, 라캉은 이 예시의 핵심에는 이미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정식화될 프로이트의 트라우마적 반복 traumatic repetition 개념, 특히 프로이트가 “꿈꾸는 이를 또 다른 공포 fright 속에서 깨우는” 트라우마적 악몽traumatic nightmares이라 부른 현상의 핵심이 자리하고 있다고 제시한다.
라캉의 분석에서 프로이트의 꿈은 더 이상 외부의 죽음external death을 앞에 두고 잠들어 있는 아버지에 관한 꿈이 아니라, 트라우마적 깨어남traumatic awakening 속에서 아버지라는 주체의 동일성 자체가—그는 살아남은—그 죽음과 어떻게 얽혀 있으며, 그 죽음 위에 어떻게 성립되는가에 관한 꿈이 된다. 아버지가 아이의 죽음에서 파악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이 곧 아버지라는 그의 동일성the very identity of the father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트라우마를 주체subject의 동일성 자체 및 타자와의 관계에 연관시키면서, 라캉의 독해는 트라우마적 시각traumatic sight의 충격이 인간 주체성subjectivity의 핵심에서 드러내는 것이 인식론적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재the real’에 대한 윤리적 관계임을 시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꿈 이야기 The story of a dream
『꿈의 해석』 제7장 서두에서 프로이트는 꿈과 소망충족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외적 현실의 문제—특히 죽음, 파국catastrophe, 상실loss의 현실—과 연결시키는 한 놀라운 꿈을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그 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한 아버지가 여러 날 동안 밤낮으로 아이의 병상을 지켜보았다. 아이가 죽은 뒤 그는 옆방으로 가 몸을 눕혔지만, 침실에서 아이의 시신이 놓여 있는 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은 열어둔 채였다. 그 방에는 큰 촛불들이 시신 둘레에 세워져 있었다. 나이 많은 한 노인이 시신을 지키도록 고용되어 있었고, 그는 시신 곁에 앉아 기도를 중얼거렸다. 몇 시간 동안 잠든 뒤, 아버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아이는 그의 침대 곁에 서서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책망하듯 속삭였다.
“아버지, 보이지 않나요, 내가 불타고 있는 것이?”
아버지는 잠에서 깨어, 옆방에서 새어나오는 강한 불빛을 알아차리고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노인은 깜빡 잠이 들어 있었고, 떨어진 촛불에 의해 아이의 시신을 감싼 천과 죽은 아이의 팔 하나가 불에 탄 것을 발견했다.
이 감동적인 꿈의 설명은 충분히 간단하다. 열린 문을 통해 비친 강한 불빛이 잠든 아버지의 눈에 들어왔고, 이는 그가 깨어 있었다면 도달했을 결론—즉 촛불이 넘어져 시신 주변의 무엇인가에 불이 붙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다. 나아가, 아버지는 잠들 때 이미 노인이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일부 품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아이가 꿈속에서 말한 단어들은 아이가 살아 있을 때 실제로 했던 말들 가운데,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사건들과 결부되어 있는 말들로 구성되었음이 분명하다. 예컨대 “나 불타고 있어요I’m burning”라는 말은 아이의 마지막 병세 동안의 고열 상태에서 발화되었을 수 있고, “아버지, 안 보이세요?Father, don’t you see?”라는 말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강렬한 정서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꿈이 일정한 의미를 가진 하나의 과정이며, 꿈꾸는 이의 심리적 경험의 사슬 속에 삽입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궁금해할 수 있다. 즉, 가능한 한 가장 신속한 깨어남awakening이 요구되는 바로 그 상황에서 왜 꿈이 발생했는가 하는 점이다.
(5:509–10)
다른 꿈들과는 달리, 프로이트가 지적하듯 이 꿈의 두드러진 점은 내적 소망과의 관련이 아니라 외부의 파국적 현실catastrophic reality outside과의 직접적 관련성이다. 이 꿈이 지니는 “감동적moving” 힘은, 아버지가 잠 속에서도 보게 되는 아이의 불타는 몸burning of his child’s body이라는 지시 대상reference의 단순성과 직접성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감긴 눈 너머로 빛을 보자, 깨어 있었다면 도달했을 동일한 결론—촛불이 넘어져 아이의 몸 위에 떨어졌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말하듯, 바로 이 꿈의 직접성은 놀랍게도 아버지를 즉시 깨워 불타는 시신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어남 현실에 대한 그의 반응을 지연시킨다delays his response to the waking reality. 만약 이 꿈의 의미와 지시가 실제로 명확하다면, 프로이트가 제안하듯 그것이 왜 꿈의 형태—즉 아버지의 반응을 지연시키는 형태—로 나타나는지 분명하지 않다. 꿈이 지시하는 현실은 긴급한 주의를 요구하며, 꿈 자체는 직접적인데, 그렇다면 이 꿈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폭력적 현실의 한가운데서, 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가In the context of a violent reality, why dream rather than wake up?? 프로이트는 먼저 이 질문에 답하고자, 꿈이 아이의 원치 않은 죽음을 직접적으로 재현함direct representation of the child’s unwished-for death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소망충족 이론에 귀속시키는 시도를 한다. 꿈이 아이의 끔찍한 화염 속 현실을 가리키는 동시에, 프로이트가 보기에, 꿈은 죽은 아이를 살아 있는 아이로 변환함으로써 이 현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은 아이가 아직 살아 있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꿈 또한 소망 충족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게 된다. 꿈속에서 죽은 아이는 살아 있는 아이처럼 행동한다. 아이는 스스로 아버지에게 경고하고, 아버지의 침대로 다가와 아버지의 팔을 잡았는데, 이는 아마도 꿈에서 아이의 말의 첫 부분이 유래한 기억 속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 그가 했던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 소망의 충족을 위해, 아버지는 잠을 한 순간 더 연장했다. 꿈이 깨어 있는 상태의 반성waking reflection보다 선호된 이유는 꿈이 아이를 다시금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아버지가 먼저 깨어 옆방으로 가게 만든 추론을 한 뒤 움직였다면, 그는 말하자면 그 한 순간만큼 아이의 삶을 단축시킨 셈이 되었을 것이다.
(5:509)
꿈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불길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감춘다in fact hides the reality of the child’s death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꿈은 이렇게 죽음을 삶으로 전환transforms death into life하며, 아이가 불타고 있다는 바로 그 현실 reality of the burning을 가리키는 말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이 전환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아이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려는 아버지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이가 불타고 있다는 앎 knowledge은 꿈의 형태로 전환된다. 아버지가 깨는 대신 꿈을 꾸는 이유는, 그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아이의 죽음에 대한 앎knowledge of the child’s death을 직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단순히 아버지가 불타는 시신burning corpse을 “보지 못한다doesn’t see”(“아버지, 안 보여요?”)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실제로 그것을 ‘본다see’.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면서 동시에 깨어 있을 수는 없다cannot see it and be awake at the same time. 프로이트가 암시하듯, 아이의 죽음에 대한 앎은 아버지에게 아마도 허구, 혹은 꿈의 형식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 이 꿈은 따라서 아버지의 비통함grief이 정신이 현실과 맺는 관계의 형식 자체relation of the psyche to reality임을 드러낸다. 꿈은 지연delay의 형식으로, 죽음의 현실 reality of a death과 그 현실을 극복할 수 없는 욕망 fiction of a dream 사이의 지울 수 없는 간극을 폭로한다.
<의식과 꿈 consciousness and sleep>
그러나 초기 해석을 마친 뒤에도 프로이트는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장의 더 후반부에서 다시 이 꿈으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깨어남의 지연’이라는 꿈의 문제problem of the dream’s delay of awakening가 다시 등장하며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왜냐하면 이 꿈을 아버지의 소망 충족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지 이 단일한 사례를 넘어, 아버지가 의식 자체의 본성을 어떻게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보다 심층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음 방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보고 아이의 시신이 불타고 있을지 모른다고 추론하게 된 그 남자가 꾸었던 꿈을 다시 상기해보자. 아버지는 그 빛에 의해 잠이 깨어나는 대신, 꿈속에서 이 추론을 형성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결과에 작용한 심리적 힘 가운데 하나가, 꿈속에서 그가 그려낸 아이의 삶을 단 한 순간이라도 연장하려는 소망 충족이었다고 제안한 바 있다. 또한 우리는 이 꿈의 생성에 작용한 또 다른 동기적 힘이 아버지의 ‘잠의 필요father’s need to sleep’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아이의 삶이 그 한 순간 동안 연장된 것처럼, 아버지의 잠 역시 꿈에 의해 한순간 연장된 것이다. “꿈이 계속되게 하라Let the dream go on”—이것이 그의 동기였는데—“그렇지 않으면 나는 깨어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꿈에서도 잠을 자려는 욕망은 무의식적 소망을 지지해준다.
(5:570–71)
아버지가 꿈에서 아이를 살려두려 한 소망—프로이트가 아버지의 꿈을 설명하는 첫 번째 이유—은, 드러나기에는, 더 깊고 수수께끼 같은 또 하나의 소망, 즉 아버지가 잠들고자 하는 소망과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 이 소망은 난해enigmatic한데, 프로이트가 말하듯 그것은 단지 신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어느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의 정지를 욕망한다desires somehow its own suspension는 사실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은 아픈 아이를 지켜보느라 지쳐 있는 이 개별 아버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모든 잠자는 이들에게 공통된 욕망을 가리킨다. 따라서 불타는 아이의 꿈은 단순히 지친 한 아버지가 아이가 다시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소망 충족을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차원에서, 이 꿈은 의식 자체의 소망 충족wish fulfillment of consciousness itself을 드러낸다.
모든 꿈은…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잠을 연장하는 목적을 수행한다. 꿈은 잠의 수호자guardian이지, 잠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잠을 자려는 소망(의식적 자아가 집중하고 있는 바로 그 소망)은, 모든 경우에 꿈의 형성을 이끄는 동기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어야 하며, 모든 ‘성공한’ 꿈은 그 소망의 충족¹이다.
(4:233–34, 원문에서 번역 수정(캐시 카루스))
불타는 아이의 꿈에 작용한 특별한 소망, 즉 아이를 다시 보고자 하는 소망은—다른 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더 근본적인 욕망basic desire, 곧 의식 자체가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not to wake up 욕망에 결속되어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꿈에서 아이의 죽음을 피하려는 이는 단지 아버지 한 사람만이 아니라, 잠 속의 의식 자체이며, 이 의식은 자신이 외면하는 어떤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아버지의 잠을 동기 부여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아이를 살려 두고자 하는 소망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이 잠들고자 하는 소망이며—설령 그것이 불타는 현실의 대가expense of a burning reality를 요구한다 하더라도—바로 이 소망이 꿈을 발생시키는 힘이 된다. 이 경우 꿈은 더 이상 단순히 정신 내부의 무의식적 환상 세계 속 소망에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이트가 보기에 현실 자체 속에 있는 어떤 것 something in reality이 우리를 잠들게 만든다는 점을 드러낸다. 따라서 “왜 아버지는 깨어나는 대신 꿈을 꾸는가?”라는 질문은, 프로이트의 분석에서 궁극적으로 의식 자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난해한 질문으로 전환된다. 곧 잠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잠들고자 소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깨어남의 서사 The story of an awakening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가 제시한 꿈 분석과 그 안에 함축된 질문은, 의식이 외부의 폭력적 현실에 결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현실에 눈멀어 있다blinded to a violent reality outside는 인상을 우리에게 남기는 듯하다. 그러나 라캉이 자신의 세미나에서 이 꿈을 다시 다룰 때 그는, 잠의 문제와 프로이트의 그 분석 속에는 암묵적으로 또 하나의 질문이 들어 있으며, 그것은 아버지의 ‘잠’의 이야기로부터가 아니라 아버지가 어떻게, 그리고 왜 깨어나는가라는 ‘깨어남의 이야기the story of wakes up ’로부터 발견된다고 제안한다.
저 비운의 아버지를 떠올려보십시오. 원문에 따르면 그는 아들의 시신을 어떤 백발의 노인에게 맡기고 옆방에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깹니다. 그를 깨운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그를 실제로 불러들이기 위한 어떤 소리의 현실, 쇼크, ‘노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 즉 촛불이 넘어져 아들이 누워 있는 침대를 불태우고 있는 현실 그 자체와 흡사한 것을 그의 꿈속에서 나타내주는 어떤 것입니다.
여기에는 『꿈의 해석』에서 제시된 프로이트의 테제, 즉 꿈은 곧 욕망의 실현이라는 테제를 뒷받침해주기에 적당치 않아 보이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꿈의 해석』에서 거의 처음으로 지적된, 겉보기에는 부차적으로 보이는 꿈의 또 한 가지 기능입니다. 즉 이 경우 꿈은 잠을 연장시키려는 욕구만을 충족시킨다는 것이지요. 프로이트는 바로 그 자리에 이 꿈을 배치하고 이 꿈 자체만으로 꿈에 대한 자신의 테제를 충분히 확증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때 과연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일까요?
만약 꿈의 기능이 잠을 연장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어쨌거나 그 꿈을 꾸게 만든 현실에 그처럼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면 잠에서 깨지 않고도 꿈이 그러한 현실에 응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여기에는 몽유병적인 활동이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그 전에 지적한 사항들에 근거해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잠을 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꿈 ‘속에 있는’ 또다른 현실이 아닐까요? 즉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 현실 말입니다.
“아이가 침대 옆에서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속삭인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 ”
(57, 국역 93~94쪽)
꿈을 잠의 소망 충족으로 설명하면서, 프로이트는—라캉의 해석에 따르면—이 소망은 깨어나는 순간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가로막힌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가리킨다. 왜냐하면 의식 자체가 깨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존재라면, 깨어남은 의식적 욕망conscious wish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에게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이 ‘잠의 소망’에 대한 모순이 단순히 외부, 즉 넘어지는 촛불의 소리나 빛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말 자체가 잠과 깨어남 sleeping and waking에 정확히 작동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라캉의 분석에서, 아이의 말—“아버지, 보이지 않나요, 내가 불타고 있는 것이?”—은 단순히 바깥의 불을 가리키는 것represent이 아니라, 아버지의 내부로부터from within 그에게 말을 걸며address , 그의 잠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항의complaint로 호소한다appeal to. 바로 이 점에서 꿈 자체가 잠자는 이를 깨우는 것이며, 이러한 역설적 깨어남paradoxical awakening—즉 의식의 소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소원에 ‘반하는against’ 깨어남—속에서, 꿈꾸는 이는 외면할 수 없는 죽음의 현실reality of a death과 맞닥뜨리게 된다confronts.
다시 말해, 프로이트가 꿈이 아버지를 잠을 계속 유지한다고 주장한다면, 라캉은 바로 아버지가 꿈을 꾸기 때문에—역설적이게도—그가 깨어난다고 주장한다. 라캉의 분석에서 꿈은 더 이상 잠을 자게하는 기능이 아니라, 깨어남awakening의 기능이 된다. 프로이트는 “잠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라캉은 이 질문의 한가운데서, 어쩌면 더 절박한 또 하나의 질문을 발견한다. 깨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재와의 마주침 encountering the real>
라캉이 ‘깨어남’에 초점을 맞출 때, 그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허구적 꿈fictional dream의 세계—다시 살아난 아이라는 허구적 세계 fictional world—에서 벗어나, 외부 세계의 단순한 현실, 즉 촛불이 아이의 몸 위로 떨어지는 우연적 사건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사건은 아이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중복하면서 reduplicates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를 깨우는 것이 단순히 촛불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꿈 속에서 아이가 한 말이라고 라캉이 말할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 아버지의 꿈이 아이를 되살리고자 한 소망desired resuscitation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꿈꾸는 이를 아이의 죽음에 대한 ‘깨어남’으로 이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제로 아버지가 꿈 자체에 의해 깨워진다는 점에서, 그가 마주하는 ‘죽음에의 깨어남awakening to death’은 단순한 앎이나 지각의 움직임이 아니라, 라캉이 보기에, 오직 잠의 내부에서만within sleep 들을 수 있는 호출call 에 대해, 깨어남 속에서 응답하려는respond, in awakening 역설적 시도이다.
나는 바로 이 꿈 자체에 의한 역설적 깨어남 속에서, 라캉이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개념에 내재한 ‘죽음과의 대면confrontation with death’의 의미를 발견하고 확장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꿈꾸는 이의 깨어남이 꿈 속에서 아이의 말, 아이의 호출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 깨어남은 죽음에 대한 대면이 동시에 필연적이면서도 불가능하다 impossibility of confronting death는 역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여 달라to be seen는 아이의 호소request, 그 호소에 대한 반응으로서 아버지의 깨어남은 단지 응답을 의미할 뿐 아니라, 적절한 응답이 근본적으로 불가능 impossibility 하다는 사실 위에 구축된 일종의 결여missing이자, 아이에게 가닿는 유대bond의 형식을 동시에 나타낸다.
보려고 깨어났을 때, 아버지는 다시금 너무 늦게 보았다는 사실, 불길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따라서 내부의 불타오름과 외부의 불타오름burning within and the burning without 사이의 관계는 (프로이트의 해석처럼) 허구도 아니고, 단순한 직접적 재현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적 모순 temporal contradiction을 드러내는 반복이며, 이 반복 속에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맺는 유대bond —아이의 말에 반응하려는 그의 감응성re sponsiveness—은 바로 아이의 죽음에 도달하지 못한 결여missing of the child’s death와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깨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전에 제때 보지 못했던 실패failure to see in time의 반복 속으로 깨어나는 것이다. 트라우마의 힘은 죽음 자체death alon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이에게 애착attachment을 가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아이가 죽어갈 때 그 죽음을 목격witness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라캉의 독해에 따르면, 꿈 속에서의 깨어남은 곧 트라우마의 장(場)site of a trauma이며, 타인의 죽음에 응답해야 한다는 필연성과 그 응답의 불가능성necessity and impossibility의 불가피한 모순이 이 자리에서 발생한다.
3. 생존의 본질 The nature of survival
이 관점에서 보면, 꿈이 ‘깨어남’으로서 재행동화하는reenact 트라우마는 단지 아이의 죽음과의 놓쳐버린 마주침만이 아니라, 바로 그 놓침이 아버지의 생존을 구성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의 생존은 단순히 아이보다 우연히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응답의 불가능한 구조impossible structure of the response에 의해 규정되는 하나의 존재 방식mode of existence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라캉은 깨어남의 원인을 꿈 바깥에서 촛불이 떨어지는 ‘우연적 사고’에서, 꿈 속에서 아이가 건네는 말로 옮겨 놓음으로써, 깨어남 자체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보다 큰 책임responsibility의 문제를 수반한다는 점을 제안한다.
사고accident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그것을 생존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연결하는 과정에서, 라캉은—내가 보기에—후기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작업을 참조하고 있다. 특히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가 강조한 ‘사고 악몽’, 그리고 그의 마지막 주요 저작인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제시된 열차 사고의 예가 여기에 작용한다.
프로이트는 이 텍스트들에서, 트라우마적 사고—죽음과의 대면—가 의식이 충분히 포착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예기치 못하게 발생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라캉의 텍스트에서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개념의 이러한 특이한 ‘사고의 우발성 accidentality ’은, 트라우마적 반복이 지니는 더 큰 철학적 함의와 연결된다.
분석 경험의 기원에서 실재가 그 내부에 있는 ‘동화 불가능한 것’의 형태로-우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원으로 기능하면서 그 뒤의 모든 사건들을 결정짓는 트라우마라는 형태로-나타났다는 사실은 놀아운 일이 아닌가요?
(55, 국역 90쪽)
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도, 바깥의 불타오름이라는 사고와 꿈속 아이의 말 사이의 간극gap은 단순한 잠의 우연한 깨어남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산출한다. 이 의미는 우발적 사건과 그 사건이 불러온 말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읽혀야 한다.
모두가 잠든 사이 마치 우연처럼 일어난 일-촛불이 넘어져 시트에 불이 붙은 터무니없는 사건, 사고, 불운 –과 아무리 감춰져 있더라도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라는 말에 담겨 있는 가슴을 아리는 무엇 사이에는 반복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관계가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운명신경증이나 실패신경증이라는 이름을 통해 형상화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놓치고 만[결여된] 것은 적응이 아니라 ‘투케’, 만남인 것이지요
(69, 국역 109~110쪽)
만약 깨어남이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 이후 살아남은 사실을 재행동화reenact하는 것이라면, 이 생존은 더 이상 단순한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죽은 아이의 말에 대한 응답을 내포하고 그 응답에 의해 규정되는 생존이다.
아이의 죽음과 아버지의 생존을 결속시키는 이 결정적 연결이야말로, 내가 보기에는 라캉이 이 꿈에서 발견한 핵심적 통찰이며, 프로이트의 분석에 대한 그의 심층적 해석을 구성한다. 만약 프로이트가 불타는 아이의 꿈에서, 우연한 아이의 죽음에 대면하지 못한 아버지를 형상화한 ‘잠든 의식’의 이야기를 읽어낸다면, 라캉은 반대로 깨어남 속에서 아버지와 아이가 트라우마의 이야기 속에서 분리될 수 없게 얽혀 있는 inextricably bound 방식을 읽어낸다. 다시 말해, 라캉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죽은 아이의 호출address 에 본래적으로—그리고 구성적으로inherently and constitutively—결속된 생존의 이야기로 읽어낸다.
따라서 아버지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아버지 자신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응답의 방식 mode of response으로서 죽은 아이의 이야기를 전하는 서사가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중의 차원double dimension을 갖는다. 아이의 말을 ‘내부의 불타오름’에 대한 언급으로 읽느냐, 혹은 ‘외부의 불타오름’에 대한 언급으로 읽느냐에 따라, 아버지의 생존은—앞으로 보게 되겠지만—서로 충돌하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응답의 구조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아버지라는 생존자의 형상 속에서, 그 생존이 자신이 목격한 [아들의]죽음에 불가분하게 결속되어 있는 의식을 암묵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라캉은 정신이 실재the real 와 맺는 관계를 단순히 경험적 사건의 본질을 ‘보는seeing’ 문제나 ‘아는knowing’ 문제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 관계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긴급한 책임urgent responsibility의 이야기—라캉이 이 맥락에서 실재에 대한 윤리적 관계ethical relation to the real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로 규정된다.
<실패한 호출 A failed address>
“아버지, 보이지 않나요, 내가 불타고 있는 것이?”라는 아이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꿈 속 내부의 불타오름을 보아 달라는 아이의 간청plea으로 읽는다면, 이 깨어남에서 아버지가 보이는 반응은, 앞서 말했듯이, 적절하게 응답하지 못하는 반복된 실패의 이야기, 곧 아이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실패의 이야기를 극화한다.
아이의 살아 있는 취약성vulnerability을 그 죽음 속에서 제대로 보려면, 아버지는 계속해서 꿈을 꾸어야 한다. 그러나 깨어남 속에서 그는 아이의 죽음을 너무 늦게 보게 되며, 따라서 진정으로, 또한 적절하게 응답할 수 없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꿈은 단일한 경험적 사건—열병으로 인한 아이의 우연한 죽음—을 넘어서는 또 다른 현실을 드러낸다. 꿈은 반복 속에서, 보려고 애쓰는 순간조차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실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실패는, 살아 있는 아이를 다시 보고자 하는 소망이 너무 강렬하여 불타는 시신 앞에서도 잠들어 있는 바로 그 아버지의 의식이, 아이의 죽음 속에서 아이의 간청에 적절하게 응답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불가분하게 결속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아이와 맺는 유대, 곧 책임성의 감각 sense of responsibility은, 그 본질에서 아이를 죽음의 가능성 속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유대를 꿈은 전형적으로 ‘실재’로, 곧 고유한 불가능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실재와의 조우로 드러낸다.
사고에 의해 마치 우연처럼 일어난 불길이 그에게 옮겨붙는 바로 그 순간에 이뤄지는 만남이 아니라면 불꽃에 타들어가는데도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비활성의]존재를 달리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우연한 사고 속에서 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결국 보다 운명적이라 할 무언가가 아버지가 잠이 깨서 올 때까지도 시신을 지켜볼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잠들어 있던 현실, 바로 그 현실을 ‘수단으로 ’해서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요?
(58, 국역 95쪽)
아버지는 깨어남의 순간, 하나의 행위 속에서 두 겹의 시각적 실패를 반복한다. 즉, 꿈의 내부를 충분히 보지 못한 실패와 현실의 외부를 충분히 보지 못한 실패를 동시에 반복하는 것이다.
실제로 촛불이 떨어지는 사건에서, 현실을 통해 “더 치명적인 어떤 것”을 반복하는 꿈으로 이동하는 라캉의 해석적 움직임은, 프로이트 후기 저작에서 ‘현실’과 ‘트라우마’ 개념을 이해하는 하나의 우화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쾌락원칙을 넘어서』 4장과 5장 사이의 이동을 설명하는 우화로 말이다.
이 저작에서 프로이트는, 사고와 같이 예기치 않게 너무 이르게 들이닥쳐 의식을 중단시키는 ‘외적 사건’으로서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의식 이론에서 출발하여, 생명의 기원을 죽음으로부터의 “깨어남”으로 규정하는 이론으로 나아간다. 이 깨어남은 충동drive과 의식 모두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 특이한 이론적 이동은, 트라우마를 의식을 놀라게 하고 파괴하는 예외적·우연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관점으로부터, 트라우마를 의식과 생명 전체의 기원으로 보는 관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사유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거대한 이론적 여정itinerary은 라캉이 불타는 아이의 꿈을 해석하는 방식 속에서 다시 반복된다. 즉 트라우마 속의 ‘우발성accidental’은 의식의 가장 핵심에서—의식이 본질적으로 죽음, 특히 타인의 죽음death of others과 맺는 관계에서—기본적인 윤리적 딜레마를 드러내는 계시revelation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라캉에게서 아버지와 아이의 이야기는, 의식이 타자와의 근원적originating 관계 속에서—특히 타자의 죽음에 대해—갖게 되는 불가능한 책임impossible responsibility의 이야기이다. 깨어남awakening으로서의 ‘실재에 대한 윤리적 관계ethical relation to the real ’는, 인간 의식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 불가능한 요구의 드러남revelation이다.
4. 피할 수 없는 명령 an unavoidable imperative
그러나 “아버지, 보이지 않나요, 내가 불타고 있는 것이?”라는 아이의 말은 꿈속에서 불타는 아이를 보아 달라는 호소뿐만이 아니라, 꿈 밖에서 불타는 아이를 보라는 명령, 곧 깨어나야 한다는 강제적 호출로도 읽힐 수 있다. 라캉은 이러한 읽기를 명시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트라우마의 ‘놓침missing’ 또한 하나의 조우임을 암시한다.
이 실재를 우리는 어디서 만나게 될까요? 정신분석이 발견한 것 속에서 문제의 핵심은 실제로 만남, 어떤 본질적인 만남입니다. 즉 우리는 달아나는 어떤 실재와의 만남에 항상 불려나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53, 국역 88쪽)
이 관점에서 보면, 깨어남은 실재와의 약속된 조우를 구현한다embodies. 다시 말해, 깨어남은 단지 응답의 실패로서가 아니라, 응답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evitability of responding의 수행, 즉 이제는 시신으로만 존재하는 아이의 생존 survival 앞에 깨어나야 한다는 불가피성의 수행으로 발생한다.
이 깨어남의 비애pathos와 의미는 아버지가 보려는 시도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되는 아이의 상실loss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는 바로 그 아이—아버지가 제때 보지 못한 아이, 그가 목격하지 못한 채unwitnessed 죽도록 내버려둔 아이,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 그 아이를 살려내고자 하는 절박함 속에서 꿈이 다시금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그 아이—바로 이 아이에게서 비롯된다. 아버지의 보지 못함의 실패 속에서 이 아이가 아버지에게 깨어나라고, 살아 있으라고to live 명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아 있음은 바로 또 하나의, 다른 형태의 ‘불타오름the burning’을 보는 방식으로서의 살아 있음이다.
아버지는 꿈속에 머물러서라도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아이를 보고자 했지만, 바로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꿈의 안inside—아이를 참되게 볼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인 꿈의 내부이자 죽음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바깥outside에서 보라고 명령한다. 아버지는 아이를 꿈속에 남겨둔 채, 다른 곳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죽은 아이, 본질적으로 도달 불가능inaccessibility하며 타자성otherness을 지닌 이 아이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깨어나세요. 나를 떠나세요. 살아남으세요. wake up, leave me, survive 살아남아 나의 불타오름의 이야기를 말해주세요.survive to tell the story of my burning.”
따라서 깨어난다는 것은 생존하라는 명령을 감당하는 것bear the imperative to survive이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히 ‘아이의 아버지’로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야 하는 자로서 one who must tell what it means not to see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죽어가는 아이의 말할 수 없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야 한다는 what it means to hear the unthinkable words of the dying child것으로서 이다.
이어지는 꿈은 본질적으로 어긋난[상실된] 현실, 즉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어남 속에서 무한히 반복됨으로써만 이뤄질 수 있는 현실에 바치는 오마주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58, 국역 95쪽)
오직 의례로써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로써만 이 태고의 만남을 기념할 수 있지요. 아버지 중의 아버지[신]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어떤 의식적인 존재도 아이의 죽음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9, 국역 96쪽)
아버지는 죽은 아이의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제 진정으로 듣는다는 것은, 살아 있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아이의 말을 듣는 방식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생명 사이의 간극ap between the other’s death and his own life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듣는 것을 뜻한다. 깨어남 속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보지’ 못하며, 바로 죽음과 삶 사이의 차이가 남긴 충격을 수행한다enacts.
따라서 깨어남은, 보지 못하는 바로 그 무능력 속에서, 꿈속의 불타오름에서 현실의 불타오름으로 건너가는 그 호출address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그 호출은 명령의 맹목성blindness of the imperative을 중심으로 청자를 변화시키고 재구성한다changes and reforms.
왜냐하면 죽은 아이의 말—“아버지, 보이지 않나요, 내가 불타고 있는 것이?”—에 응답하며 깨어나는 순간, 아버지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이의 죽음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된 자father as the one who can say what the death of a child is., 바로 그 의미에서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응답은 ‘앎’이 아니라 깨어남이며, 그 깨어남은 말하기의 수행처럼, 아이의 타자성을, 아버지가 죽은 아이의 타자성otherness과 마주한 그 조우를, 지니고 전달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깨어남은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트라우마의 반복, 곧 아이의 죽음을 재행동화하는 것이지만, 동일한 실패와 상실—아버지 혼자만의 이야기—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명령하는 불타는 아이’에 따라 아버지가 떠나는 그 이탈departure을 반복하는 새로운 행위이며, 그가 눈을 뜨게 되는 차이, 곧 내부의 불타오름과 외부의 불타오름 사이의 견딜 수 없는 차이를 반복한다.
행위로서의 깨어남은 따라서 이해가 아니라 전달transmission이다. 깨어남이라는 행위의 수행은 그 안에 이미 자신의 차이를 포함하며—라캉이 말하듯이, “반복은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 이 새로움은, 말이 더 이상 그 말을 발화하는 자에게 소유되거나 지배되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서 enact된다. 즉 죽어버려 이제는 말하기에 영원히 너무 늦어버린 아이에게도, 아이의 자리로부터 온 말로서 그 말을 받는 아버지에게도 이 말은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
말은 아버지의 것도, 아이의 것도 아니며, 정확히는 ‘자아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깨어남을 타인에게로 전달passing the awakening on하는 하나의 행위로서 이어진다.
따라서 사고란 한 번 알고 끝낼 수 있는 고정된 현실이 아니라, 말이 우연히 떨어지는 words happen to fall 자리에서 매번 새롭게 발생해야 하는 실재와의 조우이다.
그렇다면 이 사고는 무엇이었을까요? 모두가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잠깐 쉬고 싶었던 아버지, 아들의 시신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사람,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 때문에 선의를 가진 누군가로부터 “잠이 든 것 같군”이란 말을 들었을 법한 사람, 이 모두가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을 알고 있습니다. 즉 모든 이가 잠이 들어 있는 세계 속에서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라는 목소리만이 들려온다는 겁니다. 이 문장은 그 자체가 불쏘시개입니다. 그것이 떨어지는 곳마다 불이 붙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불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데, 불꽃으로 인해 불길이 Unterlegt, Untertragen의 수준, 즉 실재에까지 뻗쳐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59, 국역 96쪽)
사고, 곧 촛불이 떨어진 힘은 단지 불이 실제로 타올랐다는 경험적 사실이나, 아이가 열병을 앓게 된 우연한 사건, 혹은 아버지가 자는 동안 촛불이 쓰러져 아이의 몸에 불이 붙었다는 경험적·물리적 현실로만 한정될 수 없다. 떨어짐의 힘force of the fall은 정확히 아이의 말이 하나의 불타오름을 전달하는 방식, 다시 말해 그 불타오름이 아이의 죽음과 아버지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명령 사이를 가로지르며 회전하는 그 우발성 속에 accident of the way놓여 있다. 그리고 이 불타오름은 촛불과 마찬가지로, 그 말을 듣는 자들을 새롭게 깨어나게 하기 위해 떨어진다.
5. “나 역시 보았다 I, too, have seen”
이러한 전달의 함의를 온전히 파악하게 되는 시점은, 내가 보기에, 생존이라는 행위를 통해—제때 보지 못했다는 반복적 실패가, 그 자체로는 순수한 반복 강박이자 되풀이되는 악몽에 불과한 그 실패가—어떻게 타인을 깨우는 말하기의 명령으로 변형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우선 라캉의 텍스트, 즉 정신분석의 이론적 텍스트를 떠받치고 있는 깨어남의 명령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왜냐하면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바로 이 이론의 언어 속에서 프로이트의 “열(熱, fever)”—프로이트의 태움burning처럼 타오르는 질문, 곧 “환상 뒤에 놓여 있는 최초의 조우, 실재란 무엇인가?”(54)—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그가 감지한 바로 이 열기, 이 불타오르는 질문burning question에 대해, 라캉 자신의 텍스트는 정확히 응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케’의 기능, 만남 - 만남이라고는 해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만남, 본질적으로 어긋난 만남이라 할 수 있는 만남이지만-으로서의 실재의 기능이 정신분석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우리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한 형태, 바로 트라우마라는 형태로서였습니다.
(55, 국역 89~90쪽)
라캉은 자신의 텍스트가 받는 영감inspiration이 바로 프로이트 텍스트의 중심에 놓인 트라우마 이론에 의해 깨어남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은 이미 소망 충족의 이론 한가운데에서—불타오르는 꿈과 불타는 아이의 이야기 속에서—말하고 있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정신분석 이론의 전승은, 라캉에 따르면, 트라우마적 반복과 생존의 윤리적 부담 사이를 회전하는 하나의 깨어남의 명령이다.
라캉이 자신의 독해 속에서 전달하는 것은, 실은 프로이트가 외부 혹은 내부의 현실(경험적 사건의 현실이든, 내적 ‘환상fantasies’의 현실이든)을 어떻게 지각하고 분석했는가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라캉이 ‘프로이트의 윤리적 증언ethical witnes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라캉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프로이트의 텍스트가 하나의 트라우마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 트라우마는, 정신분석적 꿈 이론 내부에 작용하는 트라우마 이론의 충격 속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 트라우마다.
「투케와 오토마톤」의 세 번째 부분에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텍스트 속 또 하나의 순간—프로이트가 그의 후기 트라우마 이론에서 다시 한 번 아이를 둘러싼 현상을 분석하는 순간—을 읽어내고자 한다. 프로이트는 트라우마적 반복이라는 일반적 현상을 논의하면서,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겪는 악몽의 예에서 출발하여, 아이의 놀이에서 관찰되는 반복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아이가 나무 실패를 앞뒤로 던지며 번갈아 ‘fort-da’ 를 외치는 놀이로, 프로이트의 해석에 따르면 이 놀이는 어머니의 떠남과,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아이의 불안을 상징한다. 프로이트의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이 놀이는 실제로 프로이트의 손자가 했던 놀이였으며, 바로 그의 딸 조피Sophie의 아들—어머니가 장기간 부재하거나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고통을—어머니의 떠남을 반복하거나 재연함으로써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캉은 말한다.
“그것은 주체의 Spaltung(분할)의 원인이 된 엄마의 떠남을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주체의 Spaltung은 '여기' 혹은 '저기'라는, 교대로 '여기'의 '저기'나 '저기'의 '여기'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포르트-다'의 교차 놀이를 통해 극복됩니다.”(62–63, 국역 101쪽)
즉 부모의 떠남이라는 트라우마는, 라캉에 따르면, 아이의 트라우마적 경험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아버지로서 프로이트 자신이 발열(폐렴)로 딸 조피를 잃었으며, 그 죽음의 순간에 그는 곁에 있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텍스트의 이 특정한 지점에서 라캉이 ‘fort-da’ 놀이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중단하고,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자전적 성격을 띤 목소리를—개입시킨다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고 생각한다. 라캉은 아이의 ‘fort-da’ 놀이에 대한 주석 이후,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을 재사유하는 자신의 텍스트 한복판에 개인적 기억과 개인적 유비analogy를 삽입한다.
이 회상에서 라캉이 문자 그대로는 ‘아버지’의 자리에 서 있음에도, 그의 파토스pathos가 아버지의 관점에서 공명하는resonates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관점에서 공명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의 세미나에서, 학생들과 수강하는 자들 앞에서, 라캉은 이렇게 증언한다.
저 역시, 어떤 아이가 칭얼거리면서 일찍부터 저를 부르는데도 제가 몇 달 동안이나 자리를 뜨는 일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입은 것을 제 눈으로-엄마들의 예지력에 눈을 떴나고나 할까요?-직접 확인한 적인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제가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아이는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는데, 이 잠이야말로 트라우마가 생긴 그날 이후로 아이가 살아 있는 시니피앙이 된 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지요.
(63, 국역 101~102쪽)
자신의 아이에게서 발생한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기술하면서, 라캉은 아이가 사실상 아버지의 트라우마적 일탈 lapse 혹은 부재absence를 그대로 상속받는다는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잠이라는 현상이 지닌 수수께끼적 의미와, “나 역시 보았다I, too, have seen”라는 말에 담긴 뉘앙스를 통해, 자신의 텍스트가 또 하나의 프로이트적 이야기, 즉 죽어가는 아이의 꿈에 의해 ‘보도록 내몰린’ impelled to see아버지의 이야기를 다시 전승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라캉이 “나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고 말함에도, 그 아버지는 실제로는 보지 못한다. 그는 평범한 아버지처럼 보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말대로 그의 눈은 ‘열릴opened’ 필요가 있었다—즉 “모성적 예지력 maternal divination에 의해 열려야 했다.”
아버지로서의 자크 라캉은 정확히 ‘본다’기보다는, 다시 한 번 너무 늦게 본 행위, 곧 트라우마를 겪는 아이를 제때 보지 못한 비-봄의 자리에서, 타자에 의해 눈이 열리는 하나의 ‘계시적 열림revelationlike opening’으로 이동한다. 그 열림은 그에게 깨어남을 산출하며, 이 깨어남은 과거를 이해하는 것보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이 사이의 관계가 앞으로 어떤 미지의 미래를 향해 열릴 것인가라는 문제를 호출한다. 즉 라캉은 다시 한 번, 보는 자가 아니라 깨달은 자의 자리에 선다.
<정신분석의 전승 The transmission of psychoanalysis>
실제로, 라캉이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이론적·자전적 방식으로 반복할 때, 라캉 자신은—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자신의 트라우마와 결정적 상실 crucial loss을 예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미나가 끝난 몇 년 뒤, 라캉 자신 역시 프로이트처럼 자신의 아이의 죽음에 생존자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딸 카롤린Caroline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라캉이, 프로이트가 한때 들려주었던 그 꿈을 감동적으로 다시 이야기하면서—그리고 그 이야기의 현실적 의미가 자신의 미래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지 부분적으로 알지 못한 채—전승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보다 먼저 살아남는 비극, 곧 아버지의 생존에 대한 증언testimony to the tragedy of the father’s survival이다.
기묘하게도, 라캉의 삶은 프로이트의 삶을 다시 반복할 것이다.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집필하던 시점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바로 그 미래, 즉 그의 딸 조피가 열병으로 사망한 비극을, 라캉 역시 나중에 자신의 삶에서 거듭하게 된다. 그러므로 라캉이 프로이트의 텍스트(특히 반복에 관한 텍스트)의 미래를 전승한다는 것은, 단순히 ‘볼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지식 knowledge of a death that could simply be seen’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깨달음의 행위 자체를 전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다른 이의 눈을 열어주는 행위이며, 그것은 어떤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담아낼 수도, 가둘 수도 없는 하나의 ‘봄seeing’을 타인에게—그리고 또 다른 미래에게—건네주는 일로 이루어진다.
정신분석적 트라우마 이론—꿈과 죽어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 이론—의 전승은 단순한 사실의 파악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트라우마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정확히 보고 위치 지을 수 있는 어떤 단순한 지식이나 인지의 범주 속에 자리 잡을 수도 없다. 라캉의 텍스트에서, 그리고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마찬가지로, 전승되는 것은 결국 아이의 말이다. 이 말은 단순히 아들에서 아버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딸에게서 ‘모성적 예지력 maternal divination’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전승되는 것은 그 말의 의미가 아니라 그 말하기의 수행performance이다. 라캉의 텍스트에서 이러한 수행은, 이 말이 미래를 향해 독일어로 발화되는 자리와, 그 말이 프랑스어로 수용되는 자리 사이—그 반복과 간극gap 속에서—일어난다.
“잠을 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꿈 속에 있는’ 또다른 현실이 아닐까요? 즉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 현실 말입니다. “아이가 침대 옆에서 아버지의 팔을 잡고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속삭인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게 안 보이세요?’ ”
(58, 국역, 94쪽)
아이의 말을 전승한다는 것은, 그 말이 표상하고 있는 어떤 현실words’ representation을 단순히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yet to occur 하나의 깨어남의 윤리적 명령ethical imperative을 전달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