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윌슨의 평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게리 라크먼(Gary Lachman)이다.
그는 80년대 펑크 그룹 Blondie의 베이시스트였고,
2001년 이후 매년 저서를 출간할 정도로 활발한 저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홈페이지를 운영중이다.
gary-lachman.com
2016년에 출간된 이 평전에 대한 초벌 번역을
2~3차례에 나누어 올린다.
인명과 지명은 익숙하지 않을 경우 원문 그대로 노출하기로 한다.
원저의 각주는 번역하지 않고,
추후 각주와 미주 작업을 할 예정이다.
3장 돌파와 반발 BREAKTHROUGH AND BACK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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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이 출판 승인을 받은 것은 물론 하나의 돌파구였다. 그러나 그것이 윌슨의 삶을 즉각적으로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출판사 <Gollancz>로부터 받은 선인세 덕분에 그는 아내 조이Joy와 함께 콘월로 휴가를 갈 수 있었지만, 1955년 크리스마스 무렵 그는 다시 우체국에서 일해야 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그는 더 값싼 하숙집을 찾아야 했다. 그는 런던의 노팅힐Notting Hill에서 방을 구했다. 그곳은 당시 낮은 임대료와 좋지 않은 치안으로 악명 높았고, 카리브해 이주민들과 매춘부, 그리고 ‘테디 보이teddy boys’—1970년대의 펑크족에 해당하는 청년 하위문화 집단—가 거리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1958년 늦여름 이곳은 서인도 제도 출신 주민과 테디 보이들 간의 폭동이 벌어진 장소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임대료가 높고 세련된, 인기 있는 지역으로 변모하여 그 보헤미안적 성격은 거의 사라졌다. 윌슨은 24 Chepstow Villas에 방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그곳은 한때 화려했으나 이제는 반쯤 비어 있는 낡은 대저택이었다. 임대료는 주당 1파운드로 저렴했지만, 방 자체는 실망스러웠다. 그것은 수도관이 연결되지 않은 빈 욕실로, 실상은 큰 벽장에 불과했다. 집주인은 화가이자 보헤미안 여성이었고, 몇 년 전 뉴욕에서 폭음 끝에 사망한 시인 딜런 토머스(Dylan Thomas)가 한때 지하층에 머문 적도 있었다. 윌슨의 계약 조건에는 집의 재단장redecoration을 돕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시대의 화려함은 이미 심하게 퇴색했으며, 그는 벽을 바르고 창문턱을 칠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맨바닥에 침낭을 깔고 잤으며, 가능한 한의 방법으로 몸을 따뜻하게 유지했다.
그는 『Ritual』 작업으로 돌아갔다. 1956년 2월, Angus Wilson은 그에게 런던에서 북동쪽으로 약 80마일 떨어진 Bury St. Edmunds의 별장을 빌려주며 마무리를 제안했다. 윌슨은 Laura Del-Rivo에게서 빌린 타자기를 배낭에 묶고 자전거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폭설에 갇혀 다음 날에는 거의 밖으로 나갈 수 없었지만, 2주 후 그는 완성된 원고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이를 Victor Gollancz에게 보냈으나,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줄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출판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Angus Wilson은 덜 냉정했다.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고, 자신의 출판사에 추천했으며, 그 결과 출판사는 그의 추천을 받아들이고 절실히 필요했던 선인세 50파운드를 제시했다. 그러나 윌슨 자신은 완성작에 만족하지 못했다. 여러 차례 다시 썼고, 『아웃사이더』를 집필하는 동안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이것은 내가 오랫동안 써 온 그 소설이 아니었다.”
그는 완성된 원고를 보며 이렇게 고백했다. 결국 그는 초고를 폐기하고, 2년 후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문단의 삶은 막 시작되고 있었다. 3월, 『아웃사이더』가 출판되기 전, 그는 Hampstead에서 열린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의 두 번째 소설 『The Flight from the Enchanter』 출간 행사에 초대되었다. 둘은 즉시 친해졌다. 머독은 철학자이기도 했고, 사르트르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녀는 윌슨이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가르치는 옥스퍼드에 장학금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윌슨은 독학자autodidact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 파티에서 그는 시인이자 윌리엄 블레이크 연구자 캐슬린 레인 Kathleen Raine을 만났고 깊은 공감을 느꼈다. 1980년에 레인은 『Temenos』라는, ‘상상력의 예술(Arts of the Imagination)’에 헌신하는 저널을 창간했고, 이후 1990년대에는 ‘영원 철학perennial philosophy’ 탐구를 목표로 <Temenos Academy>를 설립하게 된다. 그는 또한 불가리아 출신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를 만났다. 그는 전통적인 유럽 지식인으로, 소설 『Auto-da-Fé』와 사회심리학서 『군중과 고독Crowds and Power』로 잘 알려져 있었다. 윌슨은 카네티에게 호감을 느꼈다 — 그가 Alfred Reynolds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우정의 가능성은 곧 사라졌다. Gollancz의 권유로 윌슨이 그에게 『아웃사이더』 서평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자, 카네티는 심하게 언짢아 했다. 엄숙한 어조의 답장은 그의 아내로부터 왔고, “카네티 씨는 서평을 쓰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런 부탁을 한 것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예의 위반임을 암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의 시작이었다.
윌슨은 곧 Chepstow Villas의 1층 방으로 옮겼다. 이전보다 약간 비쌌지만, 공간이 넓어 Bill Hopkins—당시 the London edition of the New York Times의 야간 편집자로 일하던—과 가끔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실내 장식은 “상당히 놀라운 정도의 불결함과 무질서” 그 자체였다. 한 목격자의 회고에 따르면, 방 안에는 책과 식사 찌꺼기, 빈 와인병, 타자기로 가득 찬 탁자, 간이침대, 공기 매트리스, 부서진 의자, 아인슈타인풍 낙서, 그리고 니체의 초상이 서로 주목받으려 경쟁하듯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서가에는 셰익스피어, 블레이크, 엘리엇 같은 ‘단골 고전들’ 외에도 법의학 교재와 잔혹한 삽화가 실린 자료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는데, 이는 그의 소설 『Ritual』을 위한 조사 자료였다. 이 무렵 윌슨은 다른 문학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난 한 시인은 『아웃사이더』의 교정쇄를 읽었다며, 곧 Times Literary Supplement에 서평을 쓸 예정이라고 했다. 그 시인은 윌슨을 잡지 <Encounter>의 편집자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 잡지는 그가 훗날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게 될 매체였다. <Encounter>는 시인 Stephen Spender가 창간했으며, 냉전기 동안 CIA의 비밀 자금 지원을 받았지만, 윌슨을 포함한 대부분의 필자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 모든 출간 준비preliminaries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윌슨은 마침내 자신이 문단에 도착했다arrived는 사실에 정당한 기쁨을 느꼈다. 그는 부모를 찾아가, 아버지가 노동자 클럽working-men’s club에서 “작가가 된 아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게 했다. 그와 조이Joy는 그녀의 부모를 방문해, 자신의 이름이 처음으로 인쇄된 『아웃사이더』의 교정쇄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딸의 미래를 향한 그들의 불안을 크게 줄여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이 진짜 작가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출간일이 다가오자, 출판사 <Gollancz>는 홍보용 사진을 요청했다. 윌슨은 폴로넥 스웨터와 National Health 안경을 쓰고 촬영에 응했다. 그는 “좋은 사진은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그 사진은 모든 초기 언론 기사에 실렸고, 곧 ‘성난 청년Angry Young Man’으로 알려질 그의 상징적 초상으로 자리 잡았다.
출간일은 5월 28일로 확정되었다. 며칠 전, 윌슨은 <Evening News?의 기자로부터 인터뷰를 받았다. 기자는 처음에는 책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윌슨이 Hampstead Heath에서 몇 달간 노숙하며 지냈다고 언급하자, 그의 흥미가 즉시 살아나 열심히 메모를 하며 윌슨에게 잇따라 질문을 퍼부었다. 그때 윌슨은 Bill Hopkins가 말한 “윌슨 전설Wilson legend”의 필요성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훗날 그는 이런 화려하고 ‘보도 가치 있는’ 일화들이 책의 실제 내용보다 더 주목받게 될 것을 후회하게 된다.
토요일, 『아웃사이더』 출간 직전의 주말이었다. 윌슨은 어느 석간신문에서 일요판 <Observer>—전국지—가 “Are Men of Genius Outsiders?”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할 예정이라는 언급을 발견했다. 그는 Evening News를 사서 확인했지만 리뷰를 찾을 수 없었고, 실망했다. 그 낙담은 더 깊어졌다. 영화관에서 돌아오던 길, 그와 조이는 Chepstow Villas 밖에 세워둔 그의 자전거가 도난당한 것을 발견했다. 그날 밤, 그는 또 한 번의 “vastation”을 겪었다. 이 용어는 종교 사상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가 사용한 말로, ‘무의미감의 급습’, 즉 지난 몇 주간 느껴온 성취감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 의심이 틀렸음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Westbourne Grove의 신문 가게로 갔다. (오늘날은 고급 상점과 부티크가 늘어선 거리지만 당시엔 평범한 상권이었다.) 그들은 <Observe>와 <Sunday Times> 당대의 대표적 “지적인 주말을 보낼 신문 highbrow Sunday papers” 두 신문을 사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Observe>에 실린 필립 토인비Philip Toynbee의 서평은 더할 나위 없이 호의적이었다. 토인비는 이 책을 “우리 시대의 대표적 주제를 다룬 치밀하고 빛나는 지적 연구 …우리의 가장 심층적 곤경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 기여를 한 저작” 이라 평했다. 그는 『아웃사이더』가 제시한 사유가 프랑스에서는 익숙한 것이지만, 사르트르보다 윌슨의 접근을 훨씬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영국 문단 비평의 원로 시릴 코널리 Cyril Connolly도 토인비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는 이 책을 “자신이 읽은 가장 놀라운 데뷔작 중 하나”로 평가하며, 논리적 분석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의식의 상태들을 다루는 “빠르고 냉철한 지성quick, dry intelligence”과 “논리 분석의 힘power of logical analysis”을 찬탄했다. 토인비와 마찬가지로 코널리는 윌슨을 카뮈에 비유했다. 카뮈의 『이방인(L’Étranger)』이 영국에서는 『The Outsider』로, 미국에서는 『The Stranger』로 출간되었다는 점도 언급했다. 또한 그는 윌슨의 나이와, 그가 불과 몇 년 만에 압축해 쌓아 올린 방대한 독서량에 놀라움을 표했다. 두 평론가가 지적한 유일한 단점은 ‘성급함hurriedness’—즉, 지나치게 빠른 집필 속도로 인한 인용의 작은 오류와 약간의 세련미 부족이었다. 그러나 토인비와 코널리는 이미 기성의 거장established men이었고, 윌슨은 생존을 걸고 글을 쓰는 젊은 작가였다. 문학평론가 조지 스타이너 George Steiner가 말했듯,
“첫 책은 그래야 한다. 순수한 강박에서out of sheer compulsion 써야 한다.” 『아웃사이더』는 바로 그 강박의 에너지에서 탄생한 작품이었다.
<Evening News>를 다시 훑어본 끝에 John Connell이라는 평론가의 서평이 실려 있음을 발견했다. 그걸 왜 처음에 놓쳤는지는 미스터리였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거장급 작가, 그리고 그는 고작 스물네 살이다(A MAJOR WRITER, AND HE’S ONLY TWENTY-FOUR).” 그 무렵 지하 하숙방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윌슨은 전화기가 없었고, 이웃이 너그럽게 자신의 전화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그 일요일, 그는 아마 그 친절을 후회했을 것이다. 한 친구가 축하 전화를 걸어왔고, 전화를 끊자마자 벨이 다시 울렸다.
전화는 그날 하루 종일, 그리고 다음 주까지 계속 울렸다. 그중 윌슨을 가장 기쁘게 한 전화는 편집자로부터였다. 그는 “이 책으로 꽤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첫 판매 수익만 약 2만 파운드(오늘날 약 50만 파운드, 미화 70만 달러 이상)에 달했고, 이어 2·3·4쇄가 잇따라 발행되었다. 월요일 아침 우편에는 축하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동안 알던 모든 친구들이 다들 편지를 보내 축하하는 것 같았다.” 윌슨은 마치 다시 우체국 분류실sorting room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비평가 시릴 코널리는 “콜린 윌슨이 누구인가?”라고 물었고, 예전 콜린 윌슨의 교장은 “이제 그 답을 알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유명한 문학가 집안 출신 시인 Edith Sitwell은 이 책을 “경이롭다(astonishing)” 라 평하며, “윌슨은 진정한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New York Times의 한 평론가는 “윌슨은 한 남자가 자기 집에 들어서듯 문학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며, 이 책을 “흡수된 박식함으로 채워진 성숙한 연구” 라고 평했다. <Sunday Times>는 리뷰 한 편당 40파운드(그가 실제 노동으로 몇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에 기고를 제안했고, <BBC>와 <Independent Television>은 출연 일정을 문의했다. 월요일의 Evening News는 그의 폴로넥 스웨터와 Hampstead Heath 이야기를 실은 인터뷰를 게재했다. 기자들이 문을 두드렸고, <The Sunday Times Magazine>의 칼럼니스트 Godfrey Smith는 그를 고급 레스토랑으로 초대해 점심을 함께했다. 왕실 사진가 Cecil Beaton도 그의 초상 사진을 촬영했다. 그가 존경하던 구르지예프Gurdjieff 연구서의 저자이자 의사 Kenneth Walker는 “『아웃사이더』는 지금껏 내가 평한 책 중 가장 놀라운 저작이다.” 라고 썼다. 두 사람은 곧 친구가 되었고, 실제로 구르지예프와 우스펜스키Ouspensky를 모두 알았던 워커와의 대화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 다른 우스펜스키 연구자 J. B. Priestley 역시 이 책을 “스물네 살 청년의 놀라운 성취” 라 평했다. 그리고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반향이 일었다. <Time>지는 『아웃사이더』를 “지적 스릴러(intellectual thriller)” 라 불렀고, Life지는 화보가 포함된 인물 기사를 요청했다. 결국 그는 Hampstead Heath, 자신이 실제로 잠들었던 나무 아래에서 폴로넥 스웨터와 침낭을 걸친 채 책을 읽는 장면으로 사진 촬영을 마쳤다.
그 월요일에 찾아온 모든 것이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윌슨은 출간이 끝나면 Leicester로 내려가 자신의 명성을 만끽하며, 젊은 시절 몰래 책을 훔쳤던 적도 있는 서점 진열대에서 『아웃사이더』의 더미를 바라볼 생각이었다. 그는 곧 일어날 소동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으며, 그저 서점 창가에 자신의 책이 놓인 것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흥분은 그 계획을 가로막았고, 그는 런던에 남게 되었다. 그 무렵 Betty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런던에서 아파트를 구하고 싶다며, 그가 부재 중일 동안 방을 써도 되겠느냐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여전히 법적으론 그의 아내였고, 화해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편지로 밝혔다. 그러나 윌슨에게 그런 생각은 없었다. 베티가 도착했을 때, 전화벨·기자·인터뷰 요청으로 집은 소란스러웠다. 그녀는 아내로서 그의 성공에 자신도 일정한 몫을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윌슨은 그 입장을 이해했으나 두 사람은 이미 2년 반 동안 함께한 조이Joy와의 관계를 지키기로 했다. 그의 ‘월요일 아침의 영광(Monday morning glory)’은 개인적·감정적 복잡성으로 얼룩졌다. 그러던 중 대중지 <Daily Sketch>가 ‘이 레스터 출신 천재 소년 뒤의 작은 여인’이라는 문구로 조이에 대한 기사를 싣자, 베티는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이미 한동안 별거 중이었지만 그녀의 친척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몰랐고, 이제는 영국 전역이 알게 된 셈이었다. 그녀는 떠나며 윌슨에게 말했다. “잘 있어요—영원히.” 베티는 끝내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 윌슨이 직접 소송을 제기해 조이와 공식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1973년, 즉 20년의 별거 이후였다. 그럼에도 그는 베티에 대해 보호 본능을 느꼈고, 이후에도 친구로 남아 가능한 한 도움을 주었다. 그는 그녀가 구입한 집의 절반 비용을 보태었으며, 자신의 저서 『시와 신비주의Poetry and Mysticism』의 저작권을 그녀에게 양도했다.
Houghton Mifflin은 곧 『아웃사이더』를 미국에서 출간했고, 그곳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Viking> 출판사는 처음에는 관심을 보였으나, 끝내 출판을 포기했고 뒤늦게 이를 후회했다.) 1956년 말까지 이 책은 열두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윌슨에게 이보다 더 놀랍고 수익성 높은 데뷔는 있을 수 없었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의 성공은 문학사상 가장 극적인 ‘누더기에서 명성으로(rags-to-riches)’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의 돌연한 명성은 종종 동갑대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과 비교되었다. 1812년, 바이런이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Childe Harold’s Pilgrimage』를 출간했을 때, “온 영국이 그의 이름으로 울려 퍼졌다(all England resounded with his name).” 그 비교가 곧 진부해졌다고는 하나, 만약 윌슨이 그런 비유를 정당하다고 느꼈다 해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랜 고난의 세월 동안 자신의 재능과 사명에 대한 확신으로 버텨왔으며, 이제 그 확신은 공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는 일기에 “나는 천재라고 믿는다”고 고백했는데, 이제 국내외 유력 평론가들이 그 신념에 동의하며 공식적으로 그를 ‘천재’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당해 초 “Heartbreak Hotel”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열기 속에서 ‘지적 아이콘’으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곧 깨닫게 되었다. 이런 하룻밤의 성공overnight success은
반드시 순수한 축복unalloyed good만은 아니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