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깨어남과 깨어있음-불면의 밤

by 낭만소년


세스토프와 관련된 저서를 소개한다.


Lev Shestov Philosopher of the Sleepless Night.jpg Lev Shestov Philosopher of the Sleepless Night



저자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영문학 강사로 알려진 매슈 보몬트이다.



저자와 테리 이글턴과의 대담집이 국내에 번역된 적이 있다.


'불면의 밤' 은 우울감이 깊어지기 시작하면서

내가 관심을 가진 주제이다.


『레프 셰스토프: 잠 못 이루는 밤의 철학자Lev Shestov: Philosopher of the Sleepless Night』

에서 '잠 못이루는 밤'은 개인적 우울감, 멜랑콜리와는 무관하다. 책의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지적, 정치적, 윤리적 각성의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기 이후, 계엄 사태, 트럼프의 재임 등 혼란한 가운데 2025년 명절을 맞이하고 있다.


긴 명절 기간 동안, 잠 못드는 가운데, 초벌 번역 작업을 완료했다.


우선, 서문의 일부를 올린다.


각주에 의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지만, 추후 작업하기로 한다.


인명 및 저서명은 국내에 소개된 표기를 따른다.


번역이 모호한 경우 원어를 표기한다.




<서문>


이 책 『레프 셰스토프: 잠 못 이루는 밤의 철학자(Lev Shestov: Philosopher of the Sleepless Night)』은 '깨어 남(staying woke)'에 관한 책이 아니며, 그 용어의 적절한 전투적 변형 또는 단조롭고 개선된 변형도 아니다. 이 용어가 반드시 수동적인 의미를 수반한다면 단순히 '깨어 있는 것being awake'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적극적이고 심지어 고뇌에 찬 의미에서 '깨어 있음 (staying awake)'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까지는 인종 갈등 문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각성(wakefulness)에 대한 정치적 담론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보다 완전한 철학적 맥락에서 강조함으로써 그 지속적이고 긴급한 중요성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그것을 낯설게 하고 다르게 옮긴 것이다.


71iG8uoSS6L._AC_UF894,1000_QL80_.jpg


거의 잊혀진 유대계 러시아인 종교 철학자 레프 셰스토프(1866~1938)의 예언자적 '계시(revelations)'와 수사학으로 돌아간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서 그는 유대교-기독교, 파스칼주의, 키에르케고르주의, 니체 사상의 영향권 안에서 그들을 지휘하였다. 그 사상들은 이성에 반하여 신앙을, 필연성에 반하여 반-필연성(AntiNecessity)이라는 흠집을 내는 개방적이고 묵시론적인 사상(openly apocalyptic thought)의 이름이다. 셰스토프가 1926년 파리에서 플로티누스의 '엑스터시ecstasies'에 관한 에세이를 썼을 때, 그의 내면에서 “불안과 영적 긴장(spiritual tension)을 잠잠하게 해서는 안 되고,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최고조로 자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잠재된 불안과 영적 긴장을 자극해 잠 못 이루게 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믿었고, 내가 이 책에서 제안한 것처럼 사람들 내면에 있는 불안과 정치적 긴장도 자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 한 세기 전부터 그의 저서에서 일관되게 지지해 온 일종의 확장된, 철학적으로 미묘하지만 논쟁적으로 효과적인 형태의 각성(wakefulness)을 주장해 왔다. 또한, 잠언과 에세이를 오가는 그의 강력한 산문은 그 자체로 Gene Ray가 최근 다른 맥락에서 '비판적 성찰과 사회적, 정치적 각성'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유익한 충격을 전달한다.


잠들지 않는 각성(vigilance)의 영적, 정치적 의무를 강조한 셰스토프는 히브리와 기독교 선지자들로부터 파스칼을 거쳐 19세기와 20세기의 반-철학적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반-계몽주의 전통을 재구성하고 확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지적 안일주의에 가장 몽유병적인 형태(somnambulistic forms)로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셰스토프가 예리하게 의식했던 아이러니에 따르면 계몽주의는 그 자체로 어둠의 원천이다. 파스칼이 데카르트를 비판하면서 말한 것처럼 '지나친 명료함은 어둠을 어둡게 한다(Too much clarity darkens)'. 셰스토프는 역설적 논리에 따라 조명해주는 어둠, 빛의 원천인 밤에 전념했다. 그는 계몽주의의 위험할 정도로 도취적인 영향력을 비판하면서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은 반-종교개혁 신비주의자처럼 밤을 영원한 각성(wakefulness)과 경계(watchfulness)의 신성한 시간을 의식적으로 되찾았다. 사회적, 정치적 비상 상황의 시대인 20세기 전반기에, 그는 밤을 끊임없이 열린 개방성의 현장으로서 신성시consecrated했다. 그것은 몇몇 영적 드라마가 역사의 연속체로 변모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갑작스런 방해가 이루어진다. 그러한 드라마는 저주의 드라마이거나, 그가 바랐던 대로 구원 redemption의 드라마였다.


보리스 그로이스, 반철학 입문


보리스 그로이스가 이 철학자에 대한 훌륭한 논의를 통해 고찰했듯이, 셰스토프의 이름은 '두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최고의 대표자 중 일부에 대한 중요하면서도 숨겨진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서구 독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20세기 초반 40년 동안, 유럽에서 정치적 위기가 지속되던 시기에 셰스토프는 현대사의 공포에 직면하여, 이를 설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명령했던 합리주의 계몽주의적 사고에 반대하였다. 그는 인간의 고통이 궁극적으로 절대 용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초자연적 각성과 경계 상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근본적인 주장이 지닌 함의를 일관되고 영향력 있게 탐구했다.


Athens and Jerusalem_Ramona Fotiade (엮은이), Bernard Martin (옮긴이)  Ohio Univ Pr  2016.jpg Athens and Jerusalem_Ramona Fotiade (엮은이), Bernard Martin (옮긴이) Ohio Univ Pr 2016


21세기에 셰스토프 사상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학자 Ramona Fotiade는 그의 입장을 그의 목소리를 복화술로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우리는 논리와 선험적 원칙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몽유병자(sleepwalkers) 처럼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부조리와 자의적 연결을 보지 못한다. 자명한 진리(self-evident truths)의 마법을 깨고 불행, 불의, 고통, 죽음에 무력하게 복종하는 악몽에서 깨어나려면(awaken)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셰스토프는 일종의 영적 불면증(spiritual insomnia)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내 책 곳곳에 등장하는 불면증에 대한 비유는 다음과 같은 명령어로 나타난다:


“세상 끝날 때까지 잠 들지 말 것 ! ”


파스칼



팡세


이것이 셰스토프가 음악적 모티프의 지속성을 가지고 반복하고 정교화한 공식이다. 이는 파스칼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기 전날 밤에 펼쳐진 복음서의 에피소드 중 그리스도의 불면에 대한 매혹적이고 단편적으로 논의했던 「예수의 신비The Mystery of Jesus」에서 각색한 것이다. 파스칼의 논의에서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잠든 사이 자신의 비극적인 외로움과 메시아 프로젝트의 명백한 실패를 마주했다.


파스칼은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라는 가장 묵시적인 문장으로 “그 시간 동안 잠을 자서는 안 된다”라고 썼다.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시기에 계몽주의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침묵적인 세계와의 관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계몽주의적 사고의 최면(somnolent )효과에 대해 거듭 주장한 셰스토프는 파스칼의 말을 영적, 암묵적으로 정치적 권한 부여의 슬로건으로 차용했다.


'겟세마네의 밤'이 실려있는 셰스토프의 저서


이 책은 셰스토프의 반-합리주의 철학, 특히 파스칼에 대한 그의 독서를 재조명한다. 그 본질적인 관심과 함께 현재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고 고통으로 가득한 미래로 몽유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정치적, 영적 책임에 대해 강렬하고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즉 시간이 끝날 때까지 깨어 있어야 한다. 셰스토프는 파스칼에게서 영감을 받은 장편 에세이 「겟세마네의 밤」(1923)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agony)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 진행 중이며 세상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 '고난'은 무엇보다도 1920년대에는 물론 아직 끝나지 않은 인류 역사의 공포를 의미했다(이 에세이가 발표된 지 약 5개월 후 뮌헨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실패했지만 매우 불길한 쿠데타인 이른바 뮌헨 폭동(Beer Hall Putsch)가 발생했다).


셰스토프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파스칼이 계몽주의의 데카르트 원리를 훌륭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영웅으로서 그를 인용한다. 이 러시아인은 주장한다. 데카르트적 원리는 수 세기에 걸쳐 그 어느 때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근거를 제공해왔다. 그것은 자기 원리를 체계적으로 도전해야 할 피상적인 필연성의 우주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이다.「겟세마네의 밤」에서 알 수 있듯이 합리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파스칼은 계몽주의 논리를 거부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선례를 셰스토프에게 제공했다. 파스칼은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셰스토프는 반복한 뒤 힘주어 덧붙인다:


아무도 잠을 자서는 안 된다. 아무도 안전과 확실성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파스칼에 대한 셰스토프의 설명에서 이 금지된 명령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이 책에서 이미 암시했듯이 반(半)은폐된 정치의 활성화 또는 재전유를 추구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1 (양장 합본).jpg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이를 위해 셰스토프의 사상을 테오도르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등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관련된 동시대 철학자들의 사상적 요소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예를 들어, 셰스토프에 따르면 계몽주의 전통은 일종의 현대 신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합리주의적, 과학적 가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상대적으로 비정치적인 주장을 암묵적으로 연관시킨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주의 비판뿐만 아니라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준비 단계에서 분명히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유럽에 새로운 꿈으로 가득 찬 잠이 찾아오고, 이를 통해 신화적 힘이 다시 활성화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단편적 주장과도 일치한다. 벤야민과 셰스토프는 스타일과 어휘는 다르지만, 세스토프가 자신의 영웅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논의에서 언급했듯이 "의심스러운 각성(awakening)의 고통스러운 경련"이 "어떤 잠의 회색빛 하품"보다 낫다고 효과적으로 주장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쳤다면, 셰스토프는 "꿈으로 가득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셰스토프는 말 그대로 독자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도록,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영구적으로 깨어 있도록 만드는 데 전념했다.


이 책은 셰스토프의 윤리학, 시학, 각성의 정치에 초점을 맞춘다.


1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에서는 1930년대 중반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노년의 유대인 철학자를 스케치하고, 수난 이야기가 시작될 때 그리스도가 겟세마네에서 불면의 형태로 고독과 영적 절망에 직면해야 했던 중추적인 영적 드라마에 대한 그의 투자를 설명하면서 책의 주요 논증의 배경을 설정한다. 이 장에서는 셰스토프의 사상에 대한 예비적 개요를 제공하며, 셰스토프가 유대-기독교 사상을 그리스-로마 사상에, 신앙을 이성에, 계시를 사변에 대립시키는 특징적인 모순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Petersburg.jpg Andrei Bely, 페테르부르크


2장 「철학과 반철학」에서는 셰스토프의 전기와 그의 실존 철학의 측면을 재구성한다. 이 장에서는 수십 년에 걸쳐 셰스토프 자신의 저술에서 그의 사상의 반복과 발전을 살펴보고, 특히 우연성과 반-필연성의 개념에 대한 비슷한 헌신을 공유하는 동시대 러시아 작가 Andrei Bely의 소설 『페테르부르크』(1913-14)와의 관련을 설명한다. 이 장에서는 셰스토프를 가장 편리하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 여기서는 프랑스의 반-계몽주의 철학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되었지만 자크 라캉에 의해 부활하기 전, 우리 시대에 알랭 바디우와 보리스 그로이스 같은 평론가들에 의해 생산적으로 홍보된 - '반-철학자'를 사용한다. 즉, 간단히 말해서 그는 사고보다 존재를, 추상적 보편보다 구체적 특수성을, 형이상학적 진리보다 경험의 특이성을 우선시하는 사상가, 그리고 어떤 타협하지 않는 전투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사람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바디우는 '진정한 반-철학'이란 '항상 누군가를 철학자들로부터 떼어내어 그들의 영향력에서 제거하기 위한 사유의 장치'라고 보았다. 이 다소 폭력적인 지적 기획에 깊이 투자한 셰스토프는 그의 모든 평화주의 때문에 독자들을 합리주의 전통에 대한 소속감에서 떼어내고, 그들이 그 사고에 무분별하게 순응하는 데 충격을 주려고 노력했다. 바디우가 고전적 반-철학자로 규정한 파스칼은 플라톤에서 데카르트, 그리고 자신의 시대에는 후설로 이어지는 계보에 맞서 싸웠다.


알랭 바디우 세미나- 자크 라캉.jpg 라캉을 반-철학자로 소개한 알랭 바디우의 세미나


3장 「역사와 죽음의 천사들」에서는 셰스토프와 유명하면서 대부분 젊은 동시대 사람들, 특히 전쟁 사이에 파리에 살았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이 장에서는 영국에서 셰스토프가 받은 환영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D. H. 로렌스와 Hugh MacDiarmid에게 미친 영향을 간략하게 소묘하지만 특히 첫째, 초현실주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에게 미친 영향과 둘째, 친구 게르솜 숄렘이 주장한 대로 마르크스주의가 유대 신비주의에 빚진 독특한 빚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발터 벤야민과 세스토프 사이의 친화성에 초점을 맞춰서 보다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살펴본다. 이 장에서는 벤야민의 잘 알려진 우의적 이미지인 '역사의 천사'를 각성의 관점으로 다시 읽고, 셰스토프의 '죽음의 천사'와 비교한다.


역사의 천사
죽음의 천사가 다루어진 Marin G. Ogden의 책, Lev Shestov's Angel of Death : Memory, Trauma and Rebirth


4장 「정원과 황무지」에서는 깨어남의 우화적 드라마로 인해 셰스토프에게 윤리적, 영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복음서의 결정적인 에피소드인 ‘정원에서의 고뇌(Agony in the Garden)’를 살펴본다. 이 장에서는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Mantegna에서 Rothko, 토마스 모어에서 T. S. 엘리엇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과 문학 작품에서 겟세마네의 밤이 어떻게 매개되고 표현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그 신학적, 정치적 의미를 보다 충분히 이해하고자 한다(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예술과 문학사에서 겟세마네의 도상을 체계적으로 추적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셰스토프가 살았던 갈등의 시대에, 역사적 이유로 새로운 힘을 얻었을 때, 이 장면은 대량 고통의 공포에 직면한 절망과 가능한 희망의 상징으로 기능했다고 이 책에서 주장한다.


Agony in the Garden, 1460 , Mantegna.jpg Agony in the Garden, 1460 , Mantegna


5장 「잠과 잠 못 이룸」에서는 겟세마네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영적 비극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파스칼에 대한 셰스토프의 놀라운 해석으로 돌아가 파스칼의 「예수의 신비」라는 단편에 대한 단권 분량의 그의 에세이를 자세히 읽으면서 잠 못 이루는 자의 묵시적 잠재력을 탐구한다. 셰스토프의 「겟세마네의 밤」은 강력한 각성의 정치, 즉 억압에 직면한 사람들을 무력한 상태로 만드는 몽유병적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자신이 고수했던 철학적 또는 반-철학적 전통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fondane1.jpg Benjamin Fondane


셰스토프와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논의가 실려 있는 들뢰즈의 What is Grounding


마지막으로 「아우슈비츠와 세상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결론에서는 셰스토프와 그에게 직접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 특히 질 들뢰즈와 유대계 루마니아 철학자이자 시인인 Benjamin Fondane이 각성과 경계 상태에서 야만적인 고통의 극단적 형태를 목격하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살펴본다. 들뢰즈와 Fondane은 물론 아도르노의 사상을 통해 셰스토프의 종말론에서 낙관주의의 긴장을 발굴하고, 그의 비극 철학을 형성하는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을 확인한다. 여기서 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함축되어 있는 주장, 즉 셰스토프의 사상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긴급하고 중요한 정치적 교훈을 담고 있다는 주장을 상당히 명시적인 용어로 정리한다.


인간은 깨어날 것인가, 아니면 종말까지 깊은 잠에 빠질 운명인가?


셰스토프는 에드먼드 후설에 대한 장문의 비평서인 「Memento Mori」(1916)의 말미에서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일단 깨어나면 그들은 계속 깨어 있을까? 그들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잠 못 이룰까?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단순히 '깨어남'이 우리의 정치적, 영적 의무는 아니다. 이 말은 자유주의적 용례에서 깨달은 의식의 상태를 경건하게 함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깨달음의 의식의 상태가 완전히 공허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더라도 이미 성취되었다는 안일한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 대신, 역사의 무대에서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범죄를 목록화하기 위해,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그러한 비극을 회수하고 심지어 역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깨어 있고 끊임없이 경계하는(vigilant) 것이 우리의 정치적, 정신적 의무이다.


푸코의 'Standing Vigil for the Day to Come'에 대한 특집 기획


미셸 푸코는 「다가올 날을 위한 철야Standing Vigil for the Day to Come」(1963)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와 같은 문화에서 밤을 인정하면서도 밤을 물리치는 눈을 크게 뜨는 철야의 명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해야 한다


한 세대 앞서 셰스토프는 푸코가 말한 '경계의 명성'(the prestige of the Vigil) 을 의식적으로, 전략적으로 주장하며 '눈을 크게 뜨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셰스토프는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The Great Vigils』(1910)라는 제목의 글 모음집의 저자이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의 문구를 떠올리며 '어두운 시대의 사상가'로서 셰스토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밤을 인정하면서도 밤을 물리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다. 우리가 잠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아니면 계속 잠들어 있을까? 밤을 물리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jpg 한나 아렌트


미국을 노린 음모.jpg 필립 로스


필립 로스의 소설 『미국을 노린 음모』(2004)에서 화자는 자신이 일곱 살이던 1940년 운명적인 밤을 묘사한다. 그와 그의 형이 잠든 사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공화당 전당대회의 라디오 생방송을 들었다. 이때 새벽 3시 18분, 히틀러를 극렬히 추종하며 반유대주의자였던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가 전당대회장에 깜짝 등장한다. 새벽 4시가 되자 공화당은 그를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한다. J. M. 쿳시는 소설 『미국을 노린 음모』의 서평에서 '진짜 역사는 예측할 수 없는 것' 즉 셰스토프적인 용어로 '반- 필연성'이라고 표현했다. 린드버그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는 순간, 즉 미국 최고위직에 오르는 두 번째 단계인 그날 밤, 화자와 그의 형은 알람이 울리듯 갑자기 깨어난다. “안 돼!” 동네의 모든 집에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안 돼!”라는 말이 우리를 깨운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미국 대통령에게는 안 돼." 1930년대 유럽에서 파시즘의 부상에 직면한 셰스토프의 뛰어난 제자 Fondane이 ‘사임의 거부(irresignation)’라고 명명한 일종의 항의 – 이 책의 결론에서 이 정치적으로 암시적인 개념을 다시 언급한다 – 사례가 있다. ‘아니오!’가 동네의 모든 집에서 터져 나오더라도 충분하지 않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반복되지 않는 한 말이다.


시지프 신화_전집 4.jpg 카뮈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잠들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에서 재구성하고 브레히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시대를 위해 재기능화하고자 하는 셰스토프의 반-철학에 담긴 명령이다. 알베르 카뮈는 1940년대 초 셰스토프의 영향을 받은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이것이 우리가 맞이하는 겟세마네의 밤이다”라고 불길한 엄숙함을 담아 썼다.


이것이 우리의 겟세마네의 밤이다. 깨어 있으라!
작가의 이전글콜린 윌슨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