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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 Apr 06. 2020

91세 그녀의 입맛을 돋우다

얼음 동동 오이지냉국

할머니한테 딱히 '정'이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91세 나이에 홀로 첫 분가를 하셨으니

이래저래 신경이 쓰인다.

정은 없어도 '인간에 대한 예의'는 있는 것인가, 나는 할머니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궁리했다.


할머니는

며느리가 만든 반찬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따로 김치와 반찬을 사 드셨다.

이는 고부간 불화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이사한 집에 커다란 냉장고가 있는데도

좀처럼 채워 넣으실 생각조차 없어 보이셨다.

이런저런 음식들을 권해 보아도

그런 것 안 먹는다, 가져오지 말아라, 나 그거 안 좋아한다 등의 시원찮은 대답뿐.


그런데 오이지 생각이 문득 났다.

엄마가 오이지를 담가 놓으면

나는 고소하게 참기름을 듬뿍 넣고 무친 오이지무침을 너무나 맛있게 먹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달랐다.


그걸 드시지 않고 따로 오이지를 서걱서걱 썰어 시원한 물을 가득 붓고 퍽퍽 떠 드시곤 했었다. 저게 뭔 맛이냐며 나는 먹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몇 번이고 그걸 해 드셨던 기억이 났다.


"할머니 오이지 먹을래?"


던진 말에, 할머니는 처음으로 반색을 하며


"그래, 그건 좋지~!"  하신다.



오이지를 주문하고 내가 먼저 맛을 실험했다.

물에만 띄우면 맛이 좀 밍밍하기에

식초와 고춧가루와 파로 양념을 좀 더하고 오이지의 향이 배어 나오게

한참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새콤하고 시원하니 입맛을  좀 자극해줄 만하다. 시원한 맛에 나도 밥 한 그릇을 비울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할머니 집에 조달할 한 통을 다시 만든다.


하루 종일 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죽겠는데


할머니는 왜 입맛이 없는 걸까.


사람이 늙으면 미각도 함께 늙는가 보다.

먹는 낙을 잃는다는 건 슬픈 일인 것 같아.


아이 돌보며 살림하며

피 한 잔에 달달한 디저트로

매콤한 떡볶이로

그렇게 맘을 달래고 삶을 달래는

나의 소소한 기쁨이


오이지를 타고 할머니에게도 가 닿기를.

맛있게 드시며 남은 생의 한 끼 한 끼를

만끽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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