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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 May 25. 2020

겨우, 오이지였네

우리 노인네의 값싼 마지막 입맛

“할머니, 그냥 나가서 살아.

 할머니도 힘들잖아.

 집에 있으면 엄마 아빠 눈치 보고 신경 쓰이고

 거실 나와 TV도 실컷 못 보잖아...

 나가서 먹고 싶은 것 실컷 해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고

자유롭게 살아.

일단 나가보고 안 되겠으면  다시 들어오면 되지~

먹고 싶은 것도 다 말해,

내가 해다 주고 사다 주고 할게.”


짜증도 내며 아이 달래듯 달래기도 하며

그렇게 할머니를 설득했다.      


할머니의 마음이 변해 한 번 계약금을 날린 후 엄마는 할머니의 분가를 포기했었다.

한 번 날뛰어 봤으니 됐다며,

노인네가 이제 기운 없어 못 나가겠다는데 어쩌겠냐며 마음을 접는 듯했다.

그런데 몸이 좀 나아진 건지, 며느리에게 미안했던 건지 할머니는 방을 구해 달라고 또 안달이 났다. 엄마가 외면하자 할머니는 교회 사람에게 부탁해 방을 알아보고 다니셨고, 결국 엄마는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1층 월세방을 다시 구했다.

주말을 보내러 친정에 간 내게

모자라는 돈 30만 원까지 빌려가며 엄마는 가까스로 마지막 잔금을 치렀다.


그리고 10분이나 지났을까.

할머니가 할 말이 있다며 나오신다.

너희들한테는 면목이 없지만

내가 아무래도 못 나갈 것 같단다...




아빠는 대체 어쩌라는 거냐며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계시라고 하지 않았냐며

내 또 이럴 줄 알았다며 불같이 화를 낸다.

엄마는... 죽을 상?! 돌아버리기 직전?...


나는 이 어처구니없고 대책 없는 세 노인네의 뒤엉킨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 얼결의 처지에 직면했고,

이미 계약금을 치렀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진짜 이 세 사람을 이제는 다들 좀 살려줘야겠다는 사명으로

할머니를 그렇게 설득했다.    


한 남자에 두 여자.

지긋지긋할 만큼 오랜 시간을 지지고 볶으며 사는 동안 스물여섯의 어린 며느리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 세월의 일부엔 어린 나도 있었다.

세 사람의 갈등 속에서 성장한 나는

예민하고 불안했다.


내 가슴을 두려움으로 수없이 쿵덕쿵덕하게 했던

이 지긋지긋한 세 사람의 싸움으로부터

 나 자신은 지켜내지 못했지만 

어린 내 새끼들한테는 이 불안한 소음을

안 들려주겠다는 비장함으로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

힘을 잃은 세 노인네는 나의 큰소리에 다들 잠잠해졌다. 아... 어찌 이리 다들 늙어버린 거니. 무력해져 버린 거니.     

아빠는 내가 시키는 대로(?) 조용히 했고

할머니는 내가 설득하는 대로 설득당해줬다.     


그렇게 할머니는 분가를 하셨다.




며칠 후 할머니는 차분하게 무사히 이사를 하셨다.  올케 언니의 지극 정성으로 할머니의 집이 단장되고, 할머니는 무사히 생애 첫 자기만의 집에 입성하셨다. 다행히 1층 집이고 방이 크다며 좋아하셨고, 재차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집 앞에 공원이 있고

 그토록 좋아하시는 교회와도 훨씬 가까워졌으니, 나도 마음을 좀 내려놓았다.

그래도 90이 넘은 나이인지라,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가 끌어낸 격이 되어버린 터란 나는 책임감에 무거웠다. 하필 공범도 없는 자리였으니.


살갑게 정 들이고 산 사이는 아니지만 살가워지려 애썼다. 진심으로 할머니가 자유롭기를 바랐고, 진심으로 할머니가 맛있는 것 실컷 먹고, tv 마음껏 보고, 친구들 권사님들 마구 불러들여 먹고 놀기를 바랐다.     


할머니의 독립을 축하하며 위로하며  나름 해주고 싶은 것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그다지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입맛도 없다는 할머니는 요구 사항이 많지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싫다는  할머니의 입에서 시원한 ‘예스’가 나온 항목은 ‘오이지’ 단 하나였다. 뱀이라도 잡아다 줄 작정이었는데.

겨우, 오이지다.

겨우 3,980원을 주고 오이지 3개가 들어있는 팩 두 개를 샀다. 할머니가 주문한 대로, 무치지 않고 물에 동동 띄워 냉국을 만들었다. 맛이 덜할까 싶어 짠기는 살짝만 빼고, 식초에 고춧가루에 채 썰은 파를 정성껏 넣어 오이지를 띄웠다. 몸만 늙지 입맛도 같이 늙어버릴 게 뭐람. 통깨까지 솔솔 뿌려가며  이놈의 늙은 입맛을 돋우어 보겠다고 나름 정성을 들였다. 얼음 동동 띄워  내 드린 나의 오이지.  

다른 식구들이 무친 오이지를 먹을 때, 부엌 한 켠에서 따로 해 드셨던 그 오이지 냉국의 모습을 최대한 흉내 내어 가져다 드렸다. 좀처럼 음식을 반기시지 않으셨건만 할머니는 오이지를 보더니 꽤 좋아하며 고마워하며 반기셨다.  얼마 후 엄마한테도 오이지를 더 사다 달라고 하셨단다. 이렇게 90이 넘은 노인네의 입맛을 만족시켜 놓고 나는 내심 뿌듯했다. 뎌진 늙은이의 입맛에 아삭한 식감과 시원한 촉감이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시큼하고 짭짤한 오이지를 씹는 맛으로 한 끼 밥을 연명하셨을 것이다. 외로운 방 안에서 홀로 식사를 하며 손녀 생각도 좀 하셨을까.

                                                                    photo by pixabay

 

할머니를 설득하여 내보낸 일말의 죄책감과 걱정과 책임을 겨우 이 오이지 하나로 퉁치려 하는 게 스스로도 민망하여, 나는 할머니를 위한 두 번째 음식을 발굴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엄마는 할머니에게 음식 조달하는 일을 금지시켰다. 할머니가 소화를 못 시키고 고생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독립해 나가시며 너희들이 이것저것 막 가져다 드리니  넘 많이 드셔서 탈이 난 거라고, 음식을 가져다 드리지 말라고 했다. 좋아지시면, 다시 가져다 드려야지 뭐.

 

......



그리고.

할머니는 돌. 아. 가셨다.

                                                       photo by pixabay

소화가 안 된다며 기운이 없다며 누운 지, 한 달. 생애 첫 독립을 이룬 지 두 달만이었다.     

이렇게, 오이지는 내가 할머니한테 대접한 마지막 음식이 되었다.

할머니의 잃어버린 입맛을 위로해 준 유일한 반찬, 할머니가 생애 마지막으로 맛있게 드신 마지막 반찬은 오이지였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반찬도 오이지였다.

엄마가 참기름을 듬뿍 넣어 조몰락조몰락 무쳐 놓으면 반찬통에 넣기도 전에 하나씩 하나씩 한 움큼은 집어 먹던 짭짤하고 향긋한 오이지.

1년 간 해외에 나갔다 돌아왔을 때, 한 겨울에 돌아온 내게 여름 반찬인 오이지를 무쳐 주겠다며 엄마는 김치냉장고를 뒤적거렸다. 검은 봉지에 돌 돌 말려 야무지게 봉해진 오이지는 김치 냉장고 안에서도 겨울까지 버텨주지는 못한 채, 하얀 곰팡이 할머니들이 잔뜩 붙은 채 흐물흐물 늘어져 있었다. 오이지는 먹지 못했지만, 한 여름 오이지를 먹을 때마다 딸 생각이 나 마음에 걸렸을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고 짠 했던 기억이 있다. 오이지를 먹을 때마다 생각났던 그 향긋한 추억은 이제, 할머니의 모습 속에 희미하게 덮인다. 오이지를 먹을 때마다 나는 이제 가슴 아파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내 반찬을 맛있게 먹어주어 고마워.

할머니에게 독립을 권한 건, 할머니가 정말 이모할머니처럼 100살이 넘을 때까지 살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어. 그렇게 두 달 만에 갈 거라고 예상이나 했다면 내가 어찌 할머니를 그렇게 나가라며 설득할 수 있었겠어. 내가 조금이라도 그 자책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맛있게 오이지를 먹어 주어 고마워.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러 가니, 냉장고에 뜯지 못한 채 덩그러니 한 팩 오이지가 놓여 있다. 할머니가 먹겠다고 해서 엄마가 사다 놓은 오이지 한 팩. 그걸 미처 드시지 못하고 가셨구나. 죽은 사람 물건이라며 휘 내다 버릴 필요 있겠는가. 시원한 냉기가 그대로인 싱싱한 오이지를 쇼핑백에 정성스레 챙겨 넣었다. 내가 먹을게 할머니~! 여우같이 지껏만 챙기던 손녀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왜 내게 오히려 위안이 되는 걸까. 할머니가 죽었다고 내가 달라지면 할머니가 오히려 슬퍼질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내 모습 그대로 냉랭하게 쌀쌀맞게 쿨하게 움직이며 할머니의 마지막 유품들을 정리했다.

값싼 노인네 입맛, 겨우 오이지였네.

기억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애도가 될 수 있는 거라면,

나 오이지를 볼 때마다 먹을 때마다

즐거이 할머니를 기억할게.

우리 노인네, 좋아하던 오이지네~

지뿔 해준 것도 없지만, 내가 그래도 마지막 할머니 입맛은 돋우었다고 그러니 나도 꽤 효도했다고 착각한 채로 살아갈게.


오이지는 이렇게 내게,

애도의 반찬, 추모의 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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