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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 Jun 19. 2020

메모 그 이상

°아무튼, 메모°를 읽은 후에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거의 다 읽고 한 챕터만을 남겨 둔 채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 다른 책의 자리를 위해 책을 빼두려던 순간, 읽지 못한 한 챕터가 찜찜했다.

이미 이 책을 통해 충분히 만족했던 터라,

남은 한 챕터에 굳이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훌훌 가벼운 기분으로 책의 위치를 옮겨 가기 위해, 스륵~ 멈췄던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 나는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 아닌

꼭 읽어야 할 챕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한다. 아니 어쩌면 이 부분이 이 책이 말하는 것들의 클라이막스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나는 소름이 돋았다.


'나는 당신을 위해 메모합니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 어쩌면 나를 거기서 멈추고 오랜 시간 책을 방치하도록 내버려 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위해 메모하기 때문이다.

내 삶을 만들고 내 삶의 언어를 만들어주는 게 메모였기에, 누군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나의 이기적 유전자는 본능적으로  마지막 챕터를 거부하고 방치했다.


한 인간이 살았고
생의 어떤 순간
그 사람은 완전히 혼자였다.

_아무튼, 메모 /154쪽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가 메모한

1941, 1942... 하는 연대의 기록은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 고용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 소속 포로감시원이 되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포로수용소에 배속되었고

 일본군의 '닦달' 속에서

포로들에게 노역을 시키고 그들을 감시한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한 후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이들은 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약 위반과 관련한 재판으로 연합국에 의해 사. 형. 을 당했다.  


이들 중 살아남은 전범 한 사람이 있고, 작가가 만난 이학래라는 이름의 그에게는 '메모'가 있었다.


나와 이야기를 마친 마지막 순간
그는 한 장의 메모지를 보여주었다.... 사형당한 조선인 스물세 명의 명단이었다. _아무튼, 메모 /157~158쪽


그가 간직하고 들여다보던 것은 죽은 스물 세 명 전범자명단이었다. 나는 죽은 자들의 삶을 지고 살았던 산 자의 삶에 대해 숙연해졌다.


책을 읽는 동안 나름의 메모광으로서 열광하던 나는 잠시 초라해졌다. 나의 메모들이 너무나 가벼이 펄럭거렸다.

그래, 메모가, 그게 다가 아니다.

더 막중한 어떤 진실과 책임감을 품은

무거운 것들이 우리 삶에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흩어져 있던 수십 장의 메모와 일기 조각들을 나는 가지고 왔다. 버려지던 상자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할머니의 이 메모 조각들을 챙겨 담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냥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살아생전 늘 냉랭던 나는, 그 죗값으로 할머니를 오래도록 추모하기로 애도하기로 했다. 며칠 간의 추모로 끝내기에는 외로웠던 한 인생에 대해 미안한 것과 아쉬운 것이 너무 많아, 가늘고 긴 추모로 죄의 값을 치르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 봤자 결국은 죽은 자를 위 일이 아닌,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 자 한 자 흘겨 기록했던 한 인생의 깊은 외로움을 나는 품고 살아가려 한다.  살아남은 자 '이학래'가 사형당한 스물세 명의 명단을 품고 '죽음을 느끼고 삶을 느끼'며 살아갔듯이, 나도 죽은 자의 기록을 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문 채 뭔가 겸손하게 살아야 할 책임을 느낀다. 그 기록을, 내가 가졌기에 더욱 말이다.




결국, 이 책은 내가 예상한 것과 기대한 것을 모두 주었고. 예상하지 않은 것과 기대하지 못한 것까지 선물로 준 셈. 메모 그 이상에 대하여.


세계 그 어디에도 그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살 길을 고민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고국은 스스로도 갈 길이 복잡한 신생 독립국이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그들에게 무관심한 강력한 힘에 둘러싸인 채 철저하게 '혼자'였다.
 조선인 전범 백마흔 아홉 명 중 스물세 명은 조국을 해방시킨 연합국에 의해 사형당했다. 그동안 천황, 731부대 책임자, 강제징용의 기획자 누구도 전범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철저히 혼자였던 그들은 당시 역사가 필요로 했던 것, 정의 실현을 위한 엑스트라 역할을 하다가 죽은 뒤 이내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망각 속으로 들어갔다.

_아무튼, 메모 / 153,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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