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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의 쓸모
책상의 쓸모
할머니의 책상
by
조인
Jun 5. 2020
책상이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
그걸 모르고
나는 할머니를 참 많이도 미워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방을 써야 했다.
방이 두 개일 적에는 오빠와 할머니와 내가 셋이서 안방에 책상 두 개를 놓고 살았다.
할머니의 책상은 없었다.
방이 세 개인 집을 사서 이사를 했지만
여분의 방은
오빠에게 돌아갔다.
나는 여전히 할머니와 함께 방을 써야 했다.
나만의 공간이 절실했던 사춘기 시절에도
나의 모든 일상은 할머니와 함께 공유되어야 했다.
이 방에도 책상은 하나뿐,
할머니의 책상은 따로 없었다.
나는 내 책상에 할머니가 앉는 것이 싫었다. 책상만큼은 나만의 공간이고 싶었다.
할머니가 책상에 앉아 있을 때면
괜한 심술이 돋고 신경질이 뻗쳤다.
굳이 책상에 앉을 일이 아닌데도
책상에서 할 일이 있다며
성경을 읽는 할머니를 내쫓곤 했었다.
내 펜을 사용하는 것이 싫어 숨겨 두었고,
할머니의 성경책이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싫어 할머니의 옷장 위로 슬며시 밀어 놓곤 했다.
별나기도 참 별났고
까칠하기
그지없었다.
하나의 책상을 할머니와 아슬아슬하게 공유하며
냉랭하게 나의 사춘기가
지났다.
시간이 흘러 내게도 나만의 방이 생기는 날이 왔다. 해방의 기쁨과 자유를 만끽하느라
할머니의 방과 거기 놓인 책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좀처럼 잘 들여다보지도 않고 내 삶에 취해있는 동안 시간은 마구 흘렀고
,
까칠한 사춘기 소녀는 이제
중년이 되었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러 갔다.
덩그러니 놓인 책상에 비로소 눈이 간다.
살아생전에
닳도록 성경을 읽고 쓰던 자리
.
인생이 '게럽다' 끄적끄적 호소키도 하던
자리다.
애도하며, 찰칵
책상은, 아주 오래전,
오빠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들여놓았던
'컴퓨터 책상'이다.
모니터가 뚱뚱하고 본체가 무겁던 시절의
그 컴퓨터 전용 책상이
골동품처럼
덩그러니 고귀하게 놓였는데, 마음이 짠하다.
뭐든 버리기 아까워했던 할머니는
그토록 오래된 작은 책상을 30년 넘게
끌어안고 함께 지냈다. 닦고 돌보며.
그 자리에 앉아 작은 거울을 놓고 토닥토닥 화장을 했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돋보기를 쓰고 앉아 성경을 읽던 자리다. 행여 정신을 놓을까 한 때는 열심히 신문도 펼쳐 놓고 읽던 자리다.
더 이상 책상에 앉을 사람이 없으니,
책상은 이제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쓸모를 다하고 할머니의 유품으로 남았다.
책상 위에 남겨진 성경책 한 권과
여기저기 흩어진 메모들을 챙겨본다.
쓸모를 다한 책상의 영정 사진을 찍듯
마지막 모습 한 컷을
남긴다
.
좀 더 고상하고 편한 책상을 마련해준다고 했어도 격하게 마다했을 사람이라는 걸 알지마는, 은은한 나무향기 나는 고급진 책상도 한 번 누려보고 가셨으면 어땠을까 뻔한 아쉬움은 남는다.
그곳이 할머니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편한 자리였을 것이다.
공부해 먹고사는 인생이 아니더라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는
것 같다.
삶을 갈무리하고 인생을 보듬는 자리.
누구나 앉고, 읽고, 쓰고, 생각할 자리가 필요하다.
'태어났으니
살아야 하는' 모든 인생에게는 말이다.
태어났으니 살아야 했던
할머니의
한 삶을 추모한다
.
주인을 잃고 쓸모를 다한 늙은 책상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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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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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삶의 호환. 글이 고여 글을 씁니다. 지금은 아마도 혹독한 '마흔앓이'중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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