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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 Jun 10. 2020

서글프고 깊은 허무가 몰려오는 날

곰스크로 가는 기차/프리츠 오르트만

문득이었다.


그 남자 생각이 났다.


열렬하게 곰스크로 가기를 꿈꾸었던 남자.

결국은 곰스크에 가지 못한 그 남자.

잊고 있던 그 남자의 먹먹한 슬픔이

내 안에 훅 들어온 날, 다시 소설을 찾아 읽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내가 꿈꾸는 것을 억압하지 않던  20대 젊은 날에, 나는 친구에게 소개받은 이 이야기를 무척 사랑했다.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내가 ''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흔이 되어가는 중이다. 미간을 찌푸려가며 온몸으로 읽었다. 덤덤하게 읽히지가 않더라.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것은 나를 사로잡는다. 곰스크로 가는 특급열차가 저 멀리 돌진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찢어지는 듯 슬픈 기적소리가 초원을 뚫고 울리다가 멀리 사라질 때면,
갑자기 뭔가 고통스러운 것이 솟구쳐 나는 쓸쓸한 심연의 가장자리에 놓인 것처럼 잠시 서 있곤 한다.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말없이 아내와 아이들 곁을 지나쳐 내 전임자가 죽을 때까지 묵었던 바로 그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나는 문을 잠그고 침대에 몸을 던진 채 그 나머지 시간을 누구 하고도 말하지 않고 숨어서 보내곤 하는 것이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 62쪽-

곰스크를 꿈꾸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곰스크를 말하지 않는다.


나도 더 이상은 꿈을 말하지 않는다.

아이 둘을 허걱 거리며 키우고 있는 내게,

꿈을 물어오는 사람은 없다.

나도 그처럼,

가족과 환경에 둘러 싸여

곰스크라는 말은 가슴으로만 품고 산다.

그의 밤처럼 나도 간혹은 고통스러우며

나도 간혹은 홀로 숨어들 곳을 찾는다.


나는 이제 사람의 타고난 분량에 대해 그릇에 대해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살림과 육아만 한 날에는 깊은 허무가 서글프게 몰려온다.


그의 아내는

곰스크로 향하던 기차가 정차하는 바람에

우연히 연고도 없이 머무르게 된 시골마을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행복하게 정착한다.  짐을 풀고 남편이 반기지 않는 안락의자를 들여놓는다.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와락 끌어안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을 안다.  아무도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떠밀지 않는다.  

게을러져 살림을 방치해도 청소하지 않아도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조리된 반찬을 사다가 차려 놓아도 식구들은 나의 수고를 폄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엄마 이상으로 아내 이상으로 뚫고 나가지 못하는 나를 자주 다그치고 떠밀곤 한다.  내게도 가슴 한켠에 곰스크의 흔적이 있는 탓이겠지, 나는 그의 슬픔에 공감하며 나의 위로를 챙긴다.


결국 곰스크 대신

아내와 아이들과 시골 학교의 교사 자리와

정원이 딸린 작은 사택을 선택한 남자에게

노쇠한 선생은 말했다.


그대가 원한 것이 그대의 운명이고,

          그대의 운명은 그대가 원한 것이랍니다.


모든 선택의 순간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택하고 살았다. 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마지못해 걸어온 시간들은 틀렸다. 남자는 곰스크를 원했지만 그보다 더 (조금이라도 더)  삶을 원했던 거라고 믿는다. 이루지 못했으니 여전히 이상으로 남아 있는 꿈을 안고, 나도 산다.


마흔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을 만나 묻고 싶다.

당신의 '곰스크'는 무엇이냐며,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어진 이들과 낯간지럽게 꿈의 흔적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행여 우리의 결론이 엄마 이상이 아니어도 충분하다는 뻔한 도덕적 결론으로 귀결된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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