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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 Sep 10. 2020

주부라는 삶에 대한 변증  

 

"OO엄마, 뭐 일해요?" 


첫째 아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이 훅 던져온 질문 앞에, 순간 얼어붙다.

나는 일 하는가, 안 하는가.


"... 돈은 안 벌지만... 일은... 해요..."


배시시 웃으며 당황스러움을 슬쩍 숨겼다.

당황스러울만한 질문이 아니었는데 당황했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부끄러움을 느꼈다.



pixabay

내가 헐레벌떡 아이를 데리러 갔었던가, 아니면 옷을 차려 입고 등원을 시킨 날이었던가...

어쨌든 그 질문은 내게 단순 질문이 아닌, 일종의 공격이자 비난처럼 다가와 꽂혔다. 

'너 집에서 놀지 않아? 회사 다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늦어?' 

그럴 리야 있었겠냐마는 나의 꼬인 자아는 그 질문을 그렇게 해석하고 홀로 몹시 불쾌해했다. 

"어머님, 혹시 직장에 다니세요?"라는 예의를 갖춘 문장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사실 문제는 그분의 말태도가 아니었다.  


전업주부라는 단어에서 묻어나는 비전문적이고 뭔가 퍼져 보이는듯한 분위기를 증오한다.

직업란에 전업주부로 체크하거나 기록해야 할 때, 거부감을 느낀다. 

내 탓인지 사회 탓인지 어쨌든 나는 전업주부라는 나의 직업에 열등감과 결핍을 느끼고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이렇게 들키고 말았다.


출근은 하지 않지만 일은 한다.

굳이 명명하자면 '무보수 워킹맘'이랄까.

돈을 벌지 못할 뿐이지, 일은 꽤 많이 한다.

육아와 살림은 기본이고 시험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전전긍긍하며 사는 습성도 버리지 못하니 매일이 피곤하다.

육아 살림만 한다고 해도 적은 노동은 아닌데, 마치 딱 기본만 하고 사는 사람처럼 보일 땐 나름 억울하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가 더 힘든 것은 알지만...'이라는 말도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이 어느 순간 나 스스로에게 비열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보다 덜 힘들다고 그러니 조용히 있으라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말이었다. 


전업주부로 살고 싶지만 직장에 다녀야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직장에 다니고 싶지만 전업 주부로 있어야만 하는 사람도 있 것이다.

누구의 삶이 더 힘들고 덜 힘들다는 의미 없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어리석게 들렸다.

자기 몫의 삶을 자기 분량만큼 사는 것이다. 끝없이 고민하고 최선을 다해 선택하며 말이다. 그 각자의 삶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충분히 먹고살만해서 일하지 않는 사람도

충분하진 않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감수하고 주저앉은 사람도

애보기 싫어 차라리 일하러 나가는 사람도

애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도,

모두가 각자의 상황과 선택에 대해서 존중받기를 바란다.     


직장 생활을 하던 젊은 시절에는 참 쉽게 말하고 다녔다.

결혼을 해도 공부를 계속할 거라고, 

아이를 낳아도 일을 계속할 거라고 떵떵거렸다. 

그 말에는 전업주부라는 '직업'에  대한 묘한 업신여김이 깔려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무지와 무례와 시건방의 대가를 스스로 톡톡히 치러내는 시간들이다.


직업이 정체성을 대신할 수 없다는 수많은 격려와 조언을 곁에 두고 살아도,

직업과 일과 돈에 대한 이야기에 여전히 나는 바짝 곤두서곤 한다.

나의 직업이 주부라는 사실에 언제쯤 스스로 결핍 없는 당당함을 느낄 수 있을까.

전업주부라는 단어에도 엄연히 ''이 들어가 있는데,

나는 직업으로서의 전업주부라는 소속에 부족함(불만이 아닌)을 느다.


격한 자본주의 시대의 무보수 직업! 


돈이 되지 않으니 직업으로서 당당하게 자리잡지 못했겠지만, 육아와 살림이라는 '업'은 단순한 '치다꺼리' 이상의 일이다. 고도의 기술과 노련함이 대단히 필요한 영역이고 말이다. 그러나 이 일에는 명예가 없다. 잘하면 인정받기 보다 잘해야 본전인 것 같은 이 일을 수 년간 해오며, 순간순간 '이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부라는 직업의 퇴직은 여느 퇴사와 견줄 수 없을만큼 어렵다. 아무리 고심을 해 보아도 이 집에 나만한 다른 대체 인력이 없어 나는 계속 다른 직업을 찾는 일을 유보한다. 주부가 살림 잘하는 것이 절약이고 돈 버는 거라는 칭찬은 위로를 주지만 성취감을 주지는 못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면서 전업주부는 하찮게 여기는 내 꼬인 태도부터 바꾸고 볼 일이다만, 나도 돈이 고프고 성취감이 그립다.


내게도 출근이라는 걸 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수업 준비를 하고 수업을 하고, 강의실에서 나름의 기량을 뽐내고, 큰돈은 아니어도 나 하나쯤이야 대강 책임질 수 있을만큼 벌었다. 수업을 끝내고 동료 선생님들과 캠퍼스를 거닐며 커피 한 잔을 기분 좋게 마시던 시간은 사무치도록 그립지 않을 수가 없다. "좋은 한국어강사는 많지만 네 아들한테 좋은 엄마는 너 하나뿐이다." 그 한 마디를 붙잡고 보낸 '집사람'으로서의 시간은 억울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실패한 인생인 듯, 포기한 인생인 듯 숨죽였던 시간들은 억울하고 분하다.


오전 수업을 끝내고 만족스럽게 마시던 한 잔 커피 대신, 돈도 한 푼 안 벌면서 카페에 가서 돈을 쓰는 것이 옳은가를 고뇌하며 주눅들어버린 이 시간은 기필코 건져내야 했다. 이건 삶이 아니며, 내가 원하는 삶은 더욱 아니었다. 

대충 걸쳐 입은 목 늘어난 면티를 벗어 버리고 빳빳하고 밝은 티셔츠를 사 입었다. 소소하고 사소해서 견딜 수 없던 지난한 나의 치다꺼리들을 메이크오버하겠다고 결의했다. 하루하루 담담하게 일상을 일으키고 살림과 삶을 정비해 나갔다. 그렇게 살고 쓰고 했던 지난한 시간들은, 전업주부로서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변증 과정이었다. 그 삶을 통해 그 글들을 통해 나는 좀 단단해지고 당당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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