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슈에뜨 La Chouette Mar 30. 2020

다시 이산가족으로...

어렵게 가서 만났건만 결국은  다시 헤어졌구나

우버를 타고 공항 근처 호텔로 갔다. 부치는 짐이, 딸 것 2개, 내 것 1개, 각각 기내용 캐리어 1개씩 해서 2개, 그리고 딸 배낭과 내 가방, 노트북 가방... 많기도 하구나! 데스크에서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2층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돌아서 저렇게 돌아서... 막 설명을 해준다. 아이고 삭신이야! 짐이 너무 많은데 1층에 가까운 방을 주면 어떻겠냐 했더니 방을 바꿔줬다. 6시부터 아침식사가 있지만, 예전처럼 식당에서 먹지 못하고, 각자 방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공항 셔틀은 어디서 어떻게 타느냐고 물었더니, 셔틀이 없단다. 헉! 그거 믿고 왔는데! 엊그제 예약하면서 물었을 때 분명히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했더니, 어제 새로이 결정된 사실이란다. 아이고, 뭐든 다 끊어버리는구나. 손발이 묶이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


호텔은 일부가 심지어 공사 중이었고, 그리 좋지 않았지만, 우리는 드디어 집을 탈출했다는 사실로 기뻤다. 정말 해 냈구나! 제 날짜에 나왔구나. 이제 비행기만 취소되지 않으면 된다며, 계속 상황을 체크했다. 비행기표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있었으나, 우리의 표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다.


방에다가 짐을 던져놓고, 뜨끈하게 목욕을 하고, 한 숨을 돌렸다. 아이는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내서 보여준다. 대학원 합격증이다. 진작에 이메일로 받았지만, 마침 우리 딱 나오는 날 우편물로 이게 왔단다. 꼭 손에 쥐어야 하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떠나기 전에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딸아이는 대학원 몇 군데 합격을 했고, 아직 어디를 갈지 확정을 짓지는 못했지만, 이 학교가 상당히 유력하다. 랭킹이 훨씬 높은 두 군데가 있기는 한데, 장학금이 너무 적어서 아무래도 그쪽으로 가는 것은 힘들 것 같고, 이 학교는 특히나 애니메이션을 전공할 수 있는 곳이어서 새롭게 재미난 공부를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더구나 이렇게 코로나 사태가 터지는 상황에서도 가장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고 학생들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아이 마음이 더 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원래 계획은 5월까지 미국에서 일하고, 그다음에 캐나다 와서 좀 쉬고, 한국 가서 서류 일 보고 가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사건 때문에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한국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이제 내일이면 또 작별을 해야 하는 순간이다 보니 좀 더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지만, 지칠 만큼 지친 데다가 아이의 비행기는 6시여서, 호텔에서 4시에는 나가야 한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잠을 청했고, 사실 금방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3월 25일 아침, 일어나는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깜빡해서 못 일어났다가는 영원히(?) 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3시 10분경에 일어났다. 씻고, 간단히 버터 코코아를 만들어서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데려다주고 와서 마셔도 되니까 일단 아이만 도와주었다. 전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미리 우버를 예약해놓았기에 아침에 발을 동동 구르지는 않아도 되었다. 4시에 도착한 우버를 타고 함께 공항으로 갔다. 


부치는 짐을 잠그려면 TSA 자물쇠가 있어야 했는데, 가지고 있는 것을 맡기는 짐에 묶어 버렸기 때문에 공항에서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문을 연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른 새벽이어서가 아니라 역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체크인을 하면서 짐을 부치려는데, 둘 중 하나가 5파운드 초과되었단다. 2kg 살짝 넘기는 정도였는데, 옛날에는 다들 이 정도는 눈감아 줬었는데, 이제는 정말 조금의 봐줌도 없구나. 결국 그 자리에서 가방을 열고, 일부는 아이의 기내용 가방에 넣고, 일부는 내가 챙겼다. 사실 아이가 혼자 공항에 가도 되지만 굳이 내가 따라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제 보안검색대로 들어가는 시간. 한 오 분여 동안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한산한 공항에서 나는 그대로 서서 아이가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노트북이 세 개나 되는 데다가 태블릿까지 있어서 통과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들 깜짝 놀랐다는 후문을 들었다) 원래는 두 개였는데, 하나가 고장 나서 새로 사고, 갑자기 바빠져서 셋업을 못 끝낸 관계로 그렇게 모두 들고 가야만 했다. 다시 짐을 차곡차곡 챙겨서 아이가 손을 흔들고 사라질 때까지 나는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우리 지금 이렇게 떨어지면 또 언제 다시 만날까?... 




셔틀버스 없이 호텔로 돌아가려니 우버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 5시에 우버를 부른다고 과연 언제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원래는 공항 우버 타는 곳에 우버가 길게 줄을 늘어서 있곤 했지만 그곳에 도착해보니 택시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냥 줄 서 있는 택시를 잡아탔다. 더 나와봐야 얼마나 더 나오겠는가 하는 나의 안일한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주소를 불러주고, 뻔히 앞에 보이는 내비를 찍었기에 나는 마음을 놓고 딸과, 또 남편과 문자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한참 가는 것이지? 기사는 나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내비는 완전히 무시된 상태였다. "Where are you going?"이라고 침착하게 물었지만 내 심장은 몹시 떨리기 시작했다. 기사는 다음 출구로 나갈 거라고 대답했지만 그러고도 하나의 출구를 더 지나갔다. 밖은 어두웠고, 이러다가 이렇게 납치되어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내 마음속을 떨리게 했다.


원래 13불이면 가는 거리를 자그마치 35불이 나오게 하고서야 택시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마음 같아서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야심한 시각에 길에서 칼 맞지 않으려면 조용히 돌아서야 했다. 이른 시간에 가까운 곳을 가는 것이어서 팁을 줄 생각이었지만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 이상을 벌었으니까. 왜 미국에서 택시가 사양길을 걷고 우버와 리프트가 성업하는지를 뻔히 설명해주는 상황이었다. 다시는 미국에서 택시를 타지 않으리.


호텔에 들어가서 내 짐들을 다시 재 배치하고 아이 가방에서 빼낸 물건들도 적당히 넣은 후 내 우버 예약을 하고 잠시 다시 잠을 청했다. 두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호텔 조식당에 갔더니 사람들이 음식을 챙겨서 방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나도 달걀과 햄을 하나 챙겨서 방으로 왔다.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집에 갈 때까지 먹을게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꾸역꾸역 먹었다.




우버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유나이트를 통해서 티켓을 샀는데, 비행기는 에어캐나다였다. 처음에 에어캐나다 부스로 갔더니 유나이티드로 가라 했다가, 다시 거기서 에어캐나다로 나를 보냈다. 에효, 짐 끌고 왔다 갔다 하려니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무슨 강아지 훈련도 아니고... 그리고 결국은 내 짐도 오버가 되었다고 나왔다. 가방을 열고 재배치를 했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것들은 아이가 채 못 챙긴 옷가지들과 통조림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냥 버려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주부이니 그게 쉽지는 않았다. "갑자기 이사를 가느라..."라고 말을 흐렸더니, 그 직원이 딱했던지,  조금 빼니 성의를 봐서 나머지는 봐주겠다고 했다. 


아마 내가 애먹는 것을 보고서는 쉽게 통과하라고 TSA PreCheck를 해준것 같았다. 보안검색대는 쉽게 통과했으나, 막상 게이트 앞에 도착했을 때에 비행기 연착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두 시간 반을 거기서 기다려야 했다. 12:20 비행기가 2:50분이 되었으니 결국은 식사를 해결하는 상황이 되었다. 엘에이 공항에서 즐겨 찾던  HABIT 버거를 가서 상추로 싼 버거를 주문했다. 보통 셀프로 가져가던 포크나 냅킨도 다 건네주는 것만 받는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어느 곳도 안전해 보이는 곳은 없었다.


한산한 공항 / 마스크 쓰고 문자 나누는 모녀


아이는 다행히 한국행 비행기 옆좌석들이 비어있었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것은 당연히 한산했지만,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거의 만석이었는데, 아이가 선택한 자리가 비상구 옆자리여서 그 옆이 빈 것 같다. 아이 자리는 추가 요금이 없었지만, 그 옆 두 자리는 제법 돈을 더 줘야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아마 그래서 안 팔린 거 같다고 말했다. 어쨌든 다닥다닥 붙어 앉아 가는 것보다는 다리도 뻗을 수 있고 옆에도 빈 죄석도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아이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고나자 나는 울적하고 지루한 딜레이 일정을 기다려야 했다. 다정한 페이스북 언니가 전화를 걸어주어서 함께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내가 한탄을 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 참으로 공감능력이 좋고 열린 마음을 가진 분이어서 털어놓고 이야기하기 좋았다. 그냥  너무 속상해서 하소연을 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가슴이 터질 거 같았다.


나는 늦어도 그렇다고 치지만, 밴쿠버에 도착해서 다음 항공편을 타야 하는 사람들은 난처한 지경에 처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긴장감 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 있는 다른 밴쿠버행 에어캐나다는 모두 취소된 상황이었다. 오직 한대만이 밴쿠버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나마도 3월 말이면 운행정지된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기분인가!

비행기에 타 보니 내 좌석은 맨 뒤에서 두 번째 창가였다. 비행기는 거의 만석이었지만, 그래도 뒤쪽은 좀 한산했다. 맨 뒷좌석은 비어있었고, 내 바로 옆좌석에 한 청년이 앉아있었다. 그는 내 짐을 들어서 짐칸에 올려주더니 한 칸 띄어 앉으며 멋쩍게 웃었다. 그 표정에는 "사회적 거리두기 알지?"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누군가와 가까이 앉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마음 상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뒷좌석에 아무도 오지 않자 그는 아예 뒷칸으로 옮겨버렸다. 그래서 나도 그도 편히 올 수 있었다. 


이 화창한 날씨에 이곳을 떠나면서 마음이 참으로 복잡했다. 어쩌다 딸 때문에 이곳에 참 여러 번 왔었는데,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다니... 한 치 앞 일을 누가 알겠는가. 인생은 예측불허의 연속이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니 갈아타는 사람들에 대한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나는 예전처럼 입국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기저기 경찰들이 서 있었고, 실제로 열은 재지 않았지만, 구두로 상태를 계속 물어봤다. 열이 있는지, 기침을 하는지... 그리고 14일 자가격리는 의무이며 이것을 어기면 천만 원의 벌금이나 6개월 징역형이란다.  그리고 행동지침이 적혀있는 유인물을 여기저기서 나눠주었다. 입국심사는 의외로 쉬웠다. 영주권 자니까, 그저 영주권 카드를 보여주고, 얼마간 미국에 있었는지, 다른 나라는 다녀온 적이 없는지를 물었다. 현재 캐나다는 미국에서는 입국이 허용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자국민이어도 열이 있거나 증상이 있으면 입국이 불허되는 것으로 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얼마나 각박한 일인가! 자국민이 타지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것인지?




남편이 마중 나오겠다고 했지만 내가 기어코 못 나오게 했다. 남편은 아무래도 나이가 고 위험군으로 들어가고, 큰사위는 천식이 있으니 만의 하나라도 바이러스를 내가 묻혀왔다면 곤란하다. 더구나 현재 캐나다 정책으로는 바이러스 감염자 중에서 고령자와 기존 병력이 있는 사람은 치료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진다. 젊고 치료 후 회복이 가능한 사람들만 살리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무리 마스크를 써도 절대도 안된다고 말했다. 원래는 내가 에어비앤비로 갈 테니 남편더러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딸이 운영하는 에어비앤비로 남편이 나갔다. 내가 그토록 고생을 했으니 그래도 집에서 쉬어야 쉬는 것처럼 쉰다고 우겨서 결국 못 이기고 그렇게 되었다. 또 생이별...


공항에서 우버는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최근에 우버가 허용된 덕에 그래도 걱정 없이 탔다. 그런데 미국 기사와 달리 캐나다는 분위기가 더 삼엄한 것 같았다. 기사는 짐도 안 실어주려고 들었다. 내 물건에 손 대기 싫은 것을 이해는 하지만, 나는 짐을 들어 올려 트렁크에 실을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나는 원래부터 근육이 없어서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한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번쩍 들어 올리고 싶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내 꼴을 보더니 하는 수 없이 짐을 실어주고는 손 소독제로 손을 닦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여행가방의 바퀴가 부서져버렸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끌고 왔구나. 나는 일단 모든 옷을 빨래통에 넣고 샤워 먼저 했다. 그리고 딸 도착하면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알아보느라 분주했다. 아이 아빠가 데리러 나올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못 나오겠다고 했다. 내 동생은 와중에 차가 고장이 나서 발을 구르고 있었고, 선택은 택시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살던 곳이 엘리베이터 없는 3층이어서 누군가가 짐을 올려주지 않으면 디스크 있는 딸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또한 아이가 빈집에 들어가서 14일 격리 동안 뭘 먹을까 등을 고민했더니, 친구들이 여러 정보를 나눠주었고, 그중 한 친구가 미리 가서 집 환기도 시켜주고, 장 봐다가 냉장고에 넣어주고, 보일러도 미리 돌려주고... 아이고 진짜 얼마나 고맙던지! 아이를 한국으로 보낼 때는 내가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아이가 힘든 일이 생기면 나서서 도와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그랬다. 벌써 마스크보내주겠다는 친구와,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한국의 입국 검역은, 아이가 미리 대비해서 자가격리 앱을 다운로드하여 본인인증을 시켜놓았기에 열 전혀 없는 딸은 쉽게 통과해서 나왔다. (그 다음 날부터 미국 입국자도 무조건 공항에서 진단을 받아야 해서 입국절차가 6시간이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아이는 오히려 너무 빨리 나와서 당황했다. 오랜만에 온 한국, 부모가 마중나오지 않은 첫 귀국에서 어리바리하는 사이에 한 택시 기사가 와서 자기 차로 가자고 했단다. 아이고 겁도 없이 그냥 따라갔다. 그래도 이상한 차는 아니었고, 아마 콜밴이었던 것 같다. 아이는 와중에, 짐을 3층까지 올려줄 수 있는지만 먼저 물었다고 했다. 


그리고 가는 길 내내 요금이 너무 무섭게 올라간다고 문자가 왔다. 나는 처음에 일반 택시를 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엄마, 아직 반도 못 온 거 같은데 벌써 4만 원이나 나왔어요..."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는가.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다. 무사히 가기만 하면 된다고. 그냥 평생 어쩌다가 럭셔리하게 사치를 부리는 날도 가끔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했다. 집에 잘 도착하고, 아저씨가 친절하게 3층까지 다 들어 올려주셨다고 했다. 그래서 팁까지 해서 십만 원을 드렸단다. 예상금액의 두배가 나왔지만, 무사히 들어간 것만으로도 무조건 감사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엄마의 이사 간 집에 도착한 딸은, 그래도 다 아는 물건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엄마를 느꼈다고 했다. 고향에 온 기분, 내 집에 온 기분이라며 좋아했다. 집안에는 익숙한 물건이 빼곡히 차있었으리라. 자기가 어릴 때 데리고 놀던 인형도 거기 있었다. 이불장을 열어 이불을 깔고, 그 안에 넣어둔 파자마를 찾고 자리에 들 때까지 나는 짠한 마음을 손에 쥐고 그저 밝게만 아이를 대했다.  한국시간 저녁 6시 반, 이 곳 시간 새벽 3시 반에 드디어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그제야 자려고 침실로 내려갔다. 원래는 2층이 우리의 침실이지만, 혹여라도 남편이 올 때까지 바이러스가 남아있을 가능성을 생각해서 아래층 손님방 (옛날에 큰딸이 쓰던 방)을 쓰겠다고 내가 우겼다. 방에 들어서니 남편이 이부자리를 잘 정리해놓고 꽃과 편지를 남겨놨다. 세상 최고로 로맨틱한 남편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서 생각하고 챙겨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냉장고에는 바비큐 햄과 통닭, 사골국 냉동해놨던 거랑, 연어랑... 뭐든 해 먹을 수 있게 준비되어있고... 잘 챙겨 먹으라고 여러 번 잔소리해주는데, 집에 온 기분이 드는구나...



자면서도 푹 자지 못하고 계속 자다깼다 했다. 아마 아직 긴장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리라. 그렇게 밤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떠서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정말 꿈만 갔다. 이 모든 일이 정말로 내게 벌어진 일들일까 싶다. 머릿속이 멍해서 한참 누워있었다. 그러고나서 남편이 냉장실로 꺼내놓은 곰국을 데워먹고, 눈에 붙일 핫 팩을 헌 냅킨으로 제작해서 눈에 얹었다. 그리고는 걱정이 태산인 남편을 안심시키려고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비타민 먹었는지, 식사는 했는지 계속 챙기는 남편은, 옆에서 도와줄 수 없음이 무척 안타까울 것이다. 



가족이란... 늘 마음이 함께 하고, 어디에 있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 딸아이를 엄마도 없이 그렇게 한국에 떨어져 있게 해서 마음이 짠하고, 남편을 먼 곳에 불편하게 지내게 해서 마음이 또 짠하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택이었고,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도와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너무나 감사한다. 힘든 순간 속에서 그래도 축복속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이제 14일 격리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아이는 아이대로 한국 생활을 당분간 즐길 수 있기를... 그리고 나는 남편을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도해본다. 



관련된 이야기를 보시려면... 


1편: 


2편: 


3편 (현재 이야기):


4편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