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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Mar 29. 2020

딸 구출작전  

너무나 긴박했던 시간들...

엘에이 딸의 집으로 날아간 다음날 캐나다 국경이 닫히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몇 가지 옵션이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로 보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했기에 엄청나게 고민하며, 그리고 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모든 것이 다 제대로 안 된다면 나와 딸은 그곳에 갇혀서 이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기약 없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음식 공급은 제대로 될까? 더 이상 식재료 배달도 안 되는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빨리 정리하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차근차근 정리를 시작했다.


어차피 아파트는 한 달 전에 알려야 하는데 벌써 3월 19일이니 4월 치 렌트비는 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계약이 7월 말까지니 페널티도 물어야 하고... 여러 가지가 어렵지만 그래도 4월까지 버티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그냥 손해 많이 보고라도 일찍 빠져보자고... 


다행히 아파트 매니저는 흔쾌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반달 치만 추가로 내고 3월 말까지 집을 빼라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페널티도 생략해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감사한지. 빈 말이었겠지만, 차가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말까지 해줬다. 그래서 아직 어디로 갈지도 결정 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짐 정리부터 시작했다. 9월에 대학원 때문에 다시 와야 하는 아이는, 사실 이런 상황에서 학교들도 코로나에 관련된 업무처리를 하느라 대학원 일정도 늦어져서 합격 발표도, 그 후 뒤처리도 늦어졌다. 따라서 아이도 학교를 어디로 갈지 아직 확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면 짐은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고맙게도 내 초등학교 친구가 흔쾌히 짐을 맡아주겠다고 했다. 거기에 맡겨두었다가 나중에 바로 새 집으로 부쳐주겠다고 했으니 안심하고 짐을 싸도 되게 되었다. 스토리지 같은 곳에 맡기면 짐도 상하거니와 나중에 그것을 부치려 다시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에 돈이 이중으로 들더라도 동부의 내 남동생 집으로 다 부쳐야 하나도 고민을 했는데, 고마운 친구 덕에 한시름을 덜었다.


회사 사장님도 사태를 이해해주셔서 빨리 사표를 수리해주셨다. 원래라면 인수인계를 적어도 두 주일 전에는 해야 하는데, 하루 만에 간단히 일단 모든 것을 인계하도록 처리해주셨고, 이삿짐 싸야 한다니 박스를 잔뜩 가져다주셨다. 


내가 도착한 것이 화요일 밤이었고, 수요일과 목요일에 갈등하고 고민하고 결정해서, 금요일에 출근해서 사표 내면서 본격적으로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이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나는 캐나다 영주권자이고 아이는 한국 국적자이다. 캐나다는 시민권자와 영주권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국경 문을 닫을 상태였고, 오직 직계가족만 함께 입국할 수 있었다. 아이는 물론 나의 직계가족이니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처음에는 시민권자의 직계만 된다고 해서 좌절했다. 남편이 자기가 아이를 입양해서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입양은 그렇게 쉽게 금방 되는 것이 물론 아닌 데다가 아이가 한국 국적을 포기해야 하는 아주 복잡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영주권자의 자녀도 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만 그 소식을 전해준 상담자가 남편에게 아이의 나이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주는 바람에 우리는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다고 엄청나게 기뻐했다. 22살까지 가능하다고 했고, 다만 아이가 내 딸이라는 증명서가 필요하다 하길래, 아이 회사까지 가서 컬러 프린터로 영문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느라 애를 썼다. 그리고 캐나다행 비행기 티켓도 함께 구입하고 기쁨에 들떴다. 그러나 문구가 좀 이상해서 찾아본 결과 22살 미만이 기준이었다. 즉, 우리 아이는 현재 22살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의 실망은 엄청나게 컸다. 딸아이 데려와서 몇 달간 좀 푹 쉬게 하면서 건강을 회복시키고 싶었는데 그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한국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 한국은 어쨌든 방역도 잘 되고, 관리도 잘 되니까, 이런 상황에서 엄마랑 다시 떨어진다는 아픔이 있지만 그래도 그곳이 가장 안전할 테니 그리로 보내자는 결론이 다시 나왔다. 그럼 며칠에 갈 것인가? 비행기표는 이미 가격이 많이 오른 상태였고, 우리는 3월 27일과 28일의 표를 일단 각각 끊었다. 그리고 추이를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비슷한 가격의 표가 3월 25일에 있길래, 준비가 좀 빠듯할 거 같았지만, 안되면 아이 먼저 보내고 내가 나머지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다시 그 표를 구입했다. 그리고 뒤의 두 표는 취소를 했다. 나는 어쨌든 캐나다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비행기표 가격이 급격히 오르기 시작하더니 우리가 880불에 산 티켓이 순식간에 1500불이 되었고, 우리가 떠나기 전날은 3000불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가격이면 거의 400만 원 가까이 되겠구나. 그 이후의 고민은 이 티켓이 정말 유효할 것인가? 수시로 캔슬된다던데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이것이었다. 미주 관련 온라인 사이트들에서 티켓이 캔슬되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왔다. 


모든 것은 불확실했고,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나이티드 항공이 한국-미주 비행기를 25일까지만 하고 닫겠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그러면 우리가 구입한 그 날이 마지막 날이다. 그것도 다시 변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로 슬퍼하며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 날짜에 반드시 떠날 수 있게 하려면 짐 정리를 서둘러해야 했다. 주변에서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물어오지만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확정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일이 소식을 전할 여유도 없었다. 순간순간이 긴박했다.




우리에겐 가구들이 있었고, 그리고 애완동물 햄스터 헤이즐이 있었다. 너무나 착하고 사랑스러운 이 아이는 또 어디로 보내야 한단 말인가. 펫 스토어 들은 재입양을 중단했고,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런 동물은 길에 방사하면 반드시 죽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친절한 페이스북 친구가 엘에이 근동에 사는 분을 연결시켜주었는데, 너무 먼 데다가, 그분들도 6월에는 이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임시 보관밖에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친구 딸이 엘에이에 산다는 소식을 듣고 그쪽으로 SOS를 쳤다. 


절대 물지 않고 손에서 잘 노는 헤이즐, 휴지심을 좋아한다. 그리고 오른쪽은 새로 간 집에 장만 된 정원 넓은 집!


친구도 워낙 마음씨가 착한데 그 딸아이도 역시 모전녀전! 소식을 듣고, 쥐를 무서워서 어떻게 키우냐면서도 일단 당장 달려왔다. 헤이즐이 원래 낮에는 안 깨는데, 문을 살짝 열었더니 눈을 뜨고 나온다. 그리고 귀여운 새 언니에게 인사를 했다. 우리도 작별 인사를 하고. 친구 딸은 순식간에 헤이즐에게 반해서, 기쁜 마음으로 데려갔다. 가자마자 걱정 말라고 사진 찍어 보내고, 원래는 집에 개를 키우고 있으니 얘는 누군가에게 넘겨준다는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집도 넓은 것으로 새로 장만하였다. 유튜브 찾아보며 공부도 많이 했다는데, 호강이 늘어진 헤이즐은 정원 넓은 집에 살면서 언니 침대에까지도 올라가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니 우리는 정말 안심 푹 했다.


가구들은 Offer Up이라는 미국 사이트와 라디오코리아라는 한국 사이트 두 군데 내놨다. 정리하면서 수시로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연락 오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Craglist에도 올렸었는데, 전화번호를 보더니 사기꾼들이 들러붙어서 인증을 하라고 괴롭히는 바람에 그곳은 바로 포기했다. 매트리스와 사무용 책상, 책장, 식탁, 프린터, 플라스틱 서랍장 등등 큰 물건들 위주로 내놓고, 작은 것들은 이것저것 왕창씩 묶어서 내놨다.

연락하고 와서 바로 사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조건 반값 이하로 깎아버리는 사람이라든가, 아니면 온다고 철석같이 시간 약속하고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아주 골탕을 먹었다. 책상을 사겠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다른 사람 연락 왔길래, 불발되면 알려주겠다 했건만, 결국 처음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두 번째 사람 연락을 했더니 기다리다가 급해서 다른 것을 구매했다고 했을 때에는 정말 몸에 기운이 쫙 빠졌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날까지 해서 집의 가구를 모두 판매 완료했고, 마지막에 청소기 사러 약속 지켜 오신 분께는 이것저것 남은 것들 더 챙겨드렸더니 그냥 가져가기 미안하다며 돈을 더 주고 가시기도 했다. 역시 사람 사는 세상에는 무경 우인 사람들도 있지만,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있어서 세상이 돌아간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떠나기 전에 또 해야 했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아이의 세금보고였다. 이 난리가 나서 한 달이 연기되었다고 했지만 어차피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마치느라 애를 먹었다. 예전에는 늘 학교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없는 상황에서 미국 거주기간이 길어진 바람에, 갑자기 거주자로 자동으로 뜨는 사태가 발생했고 그걸 해결하려니 컴퓨터에서 자동 분류시켜버리고 해서 애를 먹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딱 맞는 프로그램을 찾았고,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잘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가로 또 신고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팔릴 뻔했던 프린터를 안 가지러 왔던 사람 덕분에 필요한 프린트를 마저 할 수 있는 전화위복을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출력하고 쓰고, 그래서 떠나기 직전에 우체국 가서 부치기로 했다.


짐은 한국으로 딸내미가 들고 갈 것과, 내 친구 집에 맡길 것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애매한 것은 내가 들고 오기로 하고, 책들만 동부의 내 남동생 집으로 부치기로 했다. 짐 싸기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걸 가져가? 말어? 이 짓을 한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또 이러고 있구나! 딸 대학 끝나고 기숙사 짐 뺄 때에도 그랬는데... 얘가 미술전공이다 보니 관련된 짐들도 많다. 일단 여행가방을 펴놓고, 가져갈 가방들을 분배했다. 그냥 하나쯤 오버될 생각으로 담아볼까 했는데, 예전에는 십만 원 하던 오버 금액이 이제는 200불이란다. 24만 원! 꺅! 그냥 마음 비우고 가방 두 개 24킬로 얌전히 채우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넣었다가 뺐다가 아주 쇼를 하고, 그러면서 나머지 짐들을 쌌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으며 일을 했다. 엘에이 도착한 다음날 눈에 올라온 눈 다래끼는 점점 커져만 갔지만, 결국은 손 대기를 포기하고 마냥 커지게 둘 수밖에 없었다. 내 눈 다래끼를 관리할 시간은 전혀 낼 수가 없었다. 보통은 첫날에 손의 혈자리를 따면 바로 가라앉곤 했는데, 이번엔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던 것 같다. 요지부동으로 커져만 갔다. 그러면서 약간 골치도 아픈 거 같아서 혹시라도 비행기에서 바이러스를 옮아온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눈이 너무 부어서 골치가 아팠던 것 같았다. 


냉장고도 비워야했기에, 냉동실의 맛난 음식들을 마음껏 탕진했다! 먹는 것도 일이었다.


짐을 금방 쌀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화요일에 나가야 하는데 정말 월요일까지 꼬박 쌌다. 월요일 밤에 1시까지 하다가... 이 정도면 대충 된 거 같으니 일단 자고, 나머지 잔손질은 내일 하자며 잠자리에 드는데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 해낼 수 있겠지? 그렇게 위로하며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잠들었다. 이제 헤어질 날이 정말 얼마 안 남았구나. 


그래도 짐이 다 정리가 되고 빈 집이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우리 계획은 오후 3시쯤 다 끝내고 나가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미국은 집 나갈 때 완전히 청소를 해놓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청소도 동시에 진행하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이 동네의 물이 석회질이 많은 듯했다. 석회 낀 욕조는 뭘로 해도 안 닦이다가 급기야 드라이버로 긁었다. 냉장고도 싹 털어서 치우고, 세탁기도, 오븐도... 엄마 파워로 쓱싹쓱싹 해치우고... 


우리가 택시로 짐을 친구네 집까지 가져간다고 했더니, 그러지 말라며 친구가 짐을 실으러 왔다. 감기 끝이라 컨디션도 별로인 상태였는데, 오히려 감기 옮으면 안 되니, 자기 가까이 오지 말라며, 혼자서 짐 다 척척 싣고 가져갔다. 짐은 걱정하지 말라며, 대부분 작은 박스들이기는 했지만, 20개나 되는 박스를 다 담았다. 생색내는 한 마디도, 짐이 진짜 많구나... 하는 소리도 없었다. 딸아이가 감동했다. "아저씨 정말 쿨 하세요! 너무 멋지세요." 내가 생각해도 정말 그렇다. 복도 많구나. 이렇게 고마운 순간이... 자기 짐 보며, 많다는 소리 안 한 사람은 아저씨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 말들도 애에겐 상처가 되었구나 싶다. 


집의 청소를 모두 끝내고, 우리는 우체국과 UPS를 가야 했다. 아이가 두 시간 걸려 간신히 통화해서 해지한 집 인터넷의 기계를 돌려줘야 하고, 세금신고서도 발송해야 하고, 외삼촌에게 보내는 책도 발송해야 했다. 이미 5시가 다 되었기에, 집 매니저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버를 불러서 이동을 했다. 마침 우체국에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나올 때에는 줄이 엄청나게 길어져서 깜짝 놀랐다. UPS 일까지 마치고는 우리가 여태 점심도 못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기가 졌다. 그래서 그 옆에 있는 피자집에 들어가서 피자를 주문했다. 그곳에서도 이제 먹을 수는 없다. 인기 많은 이 식당이 이렇게 한가한 것은 처음 본다. 모든 식당이 테이크아웃만 허용된다. 우리는 우버를 불러놓고 기다리며 한 조각씩 우걱우걱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집으로 가져와서 빈 집을 둘러보며 먹었다. 


한가한 피자집 / 드디어 방을 빼는 순간

매니저가 와서 둘러보고 오케이를 했다. 그렇게 집을 나선 시각이 7시가 살짝 넘었다. 예정시간을 3시간 넘겼지만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보인다. 우리는 이제 공항 근처 호텔에 가서 자고, 다음 날 떠나기로 했기에 짐을 모두 끌고 나왔다.  딸이 8개월을 살았던 그곳, 그러나 아이는 전혀 정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이곳에서 정말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 인간적인 교류가 없던 그곳, 완전히 타인으로 이방인으로 살았던 곳이었으니까. 더 짧았지만 정을 나누고 살았던 로마를 떠날 때에는 참으로 아쉬워했는데... 언제 또 오려나 하고 말이다.



To be continued... 

(너무 길어져서, 그 뒷 이야기는 다음 글로...)




1편:


2편(현재 스토리):


3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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