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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May 07. 2020

남이 가지 않은 길, 홈스쿨링

무모함으로 가득 찬 시작, 그러나 후회 없는 결정

지금 24살, 다 큰 아가씨가 되어버린 딸아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니, 강산이 변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돌이켜 보면 그때 그 결정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했던지! 정말 매일 초주검이 될 만큼 고심하고 알아보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딸아이는 사랑이 많고 창의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사람에게 선뜻 먼저 다가가고 마음을 여는 아이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다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이 생각만큼 열려있지 않았고, 방어적이었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어른들도 이기적이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운이 좋아서 표현 많은 젊은 담임선생님을 만났고, 아이는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며 학교를 다녔다. 2학년 때에도 무뚝뚝한 남자 선생님이었지만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있는 분이어서 학교생활을 무리 없이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3학년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완전 구식 수업을 하는 선생님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기 시작했고, 자율성이 사라진 그곳은 창의적 성격의 아이에겐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성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가 어느새 책을 까먹고 안 가져가는 아이가 되었고, 나중에 아이의 고백을 들어보니, 그게 너무 싫어서 몇 번씩 확인했는데도 학교에 가면 꼭 그 책이 없었다고 말했다. 아이의 강박이 아이를 무의식 속에서 거부하도록 했었던 것이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한 달도 안 되었지만 아이가 시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의 획일적인 교육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과연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서 또박또박 쓰던 글씨는 마구 날아가기 시작했고, 자유롭게 그리던 그림은 하늘을 파란색으로 칠해야 한다던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자신감을 잃어갔다. 훌라후프를 처음 가져간 날 200번을 돌리지 못한 벌로 운동장을 뛰어야 했고, 리코더를 가지고 가자, 단지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뭔지 배운 후, 그다음 날 “꼬까신”을 알아서 불 수 있게 해 가지고 가야 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학교에서 아이들이 선행학습을 해올 거라 생각하고 그에 맞춰서 설명을 했었는데, 세대가 바뀐 이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한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 그리고 건강도 약한 아이가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해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이 되었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반드시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학교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아이와 의논도 하고, 여러 대안학교들도 알아보았지만 결국은 홈스쿨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느라 어느덧 1 학기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더는 미룰 수 없이 담임선생님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도 이렇게 스트레스받는데 아이는 어떨까 싶었다. 혹시라도 엄마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얼떨결에 따라가는 것은 아닐까? 처음엔 그저 학교 안 간다는 게 신나서 야호 했다가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부모로서 당연히 그런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정말 홈스쿨링을 원하는 것이 맞는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아이는 이것저것 질문도 해가면서, 내 생각보다 의젓하게 자기 의견을 보여줬다.


학교 안 가게 되는 것이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홈스쿨링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나 스스로를 계획하고 이끌어가고 싶다는 게 아이의 답변이었다.


"제가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하는 거죠? 지금까지는 학교가 해준 일들을 제가 해야 하는 거고, 그 책임도 제가 지는 것이고요. 그리고 친구들과 했던 경쟁을 저 자신과 하는 거겠지요? 학교의 주인은 아이들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저의 주인은 바로 제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고 싶어요. 제가 저를 스스로 만들고 이끌어가고 싶어요."


아이가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정말 놀랐다. 물론 나의 내면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지만, 그건 좀 더 큰 다음에 이야기해보자 했던 것이고, 일단은 어린 나이니까, 좀 더 자유롭게 어린 시절을 즐기면서 가장 필요한 기초만 너무 떨어지지 않게 챙기자는 것이 내 계획이었는데, 아이는 나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구나 싶었다.


우리의 홈스쿨링은 그렇게 무모하게 시작되었다. 남들이 생각하듯 집에서 1교시, 2교시 만들어서 엄격하게 이끌어가지 않았으며,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우리의 시간을 활용하여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며 함께 성장해갔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녀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림들이 우리에게 앞으로 어찌할 거냐고, 대학은 갈 거냐고 물을 때면 난 늘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몰라, 그냥 열심히 살다 보면 길이 열리겠지.


그리고 정말 길이 차례차례 열려서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지금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내년에 다시 대학원에 간다. 한 치 앞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삶에서 어느 길도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또 도전할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무모해 보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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