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까?
글을 안 쓴 지 꽤 오래되었다. 몇 번의 시도는 있었지만, 왜 그런지 도통 글이 써지지 않는다. 이걸 writer's block이라고 불러야 할는지... 나의 일상은 그냥 침묵이 되어버렸고, 그나마 근근이 이어가던 레시피도 쓰다가 말고 저장된 상태로 쌓여있다. 끝을 못 낸다.
핑계로는 요새 한참 열중인 가드닝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상 내가 바쁘지 않던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평생 늘 뭔가 하느라 분주했고, 그런 와중에도 온라인 일기를 20년 가까이 썼으니 그걸 핑계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몸이 바쁜 것과 마음이 바쁜 것은 다른 일이겠지. 요새 이것저것 마음이 한가롭지 않은 탓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글을 써야 하는 것이겠지?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이웃 브런치 작가인 안녕워녕님이 새 글을 올렸다고 알림이 왔다. 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쭉 읽어 내려가다 보니, 친구가 했다는 말이 가슴이 와 닿았다. "중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어... 다만 내가 의미를 두지 않았던 거였더라고." 그렇다. 지금 겪은 이 힘든 시간도 내게 중요한 순간일 것이다. 사실 내 삶은 참 오랫동안 힘들었었고, 그 모든 순간이 다음 행복한 순간을 위한 역시 중요한 순간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중요한 순간들을 한동안 그냥 흘려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다시금 글을 써서 그 순간들을 담아보고자 시도해보고 싶다.
지난 이른 봄, 딸을 급히 한국으로 보내 놓고는, 한 두 달 후면 이 전쟁 같은 상황이 끝나고 재회하리라 믿었건만, 실정을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아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별 때문에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엄마는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다.
스물두 살이 넘은 자식을 가족의 범주에 넣지 않는 캐나다 법 때문에, 영주권이 없는 자식은 캐나다 입국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개인주의이고 독립성이 강한 서양인들이라지만, 부모는 나이와 상관없이 입국이 가능한데 유독 자식에게만 이렇게 모질게 하는 현실에 무척 화가 나서 마음이 너무 힘들다.
그러는 와중에 남편이 갑상선암 진단이 나왔고, 내 마음은 더더욱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반적으로 유순한 암이라지만, 내가 수술 없이 넘겼던 상태와 달리, 남편은 상당히 진전된 상태라고 진단이 나왔고, 캐나다로서는 이례적으로 한 달 이내로 수술 일정이 잡히고 나니,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마음속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세상 일들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그래서 때로는 더 멋지기도 하지만 이럴 때에는 역시 내 마음도 내 생각대로만 움직여주지는 않더라는...
그렇게 한 달이 흘러갔고, 우리는 그냥 묵묵히 가드닝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날이 갈수록 피곤해졌고, 수술 직전에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졌다.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날까지 생기면서 전이에 대한 공포도 스트레스에 한몫을 했다.
코비드 19의 영향으로 수술받는 환자도 보호자를 동반하지 못하는 현실. 수술하는 날 아침 일찍 나는 남편을 병원 입구에 내려줬고, 소식 없는 6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했다. 6시에 병원에 들어갔고, 수술이 7:45이라고 했는데, 정오가 넘도록 소식이 없으니 몹시 애가 탔다. 원래 이런 일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은 했지만, 보호자 연락처까지 받아둔 병원 측에서 한 번의 연락도 주지 않는 것이 너무나 서운했다. 결국 기다리다가 비상연락용으로 받은 병원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연결하여 연락된 곳에서, 수술 이후 회복실에 있으니, 두세 시간 이후면 일반 병실로 옮기고, 연락이 갈 거라고 했다. 수술이 잘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잘못되었다면 연락이 왔겠지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고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수술은 잘 된 거 같고, 갑상선은 완전 절제했다고 했다. 전이된 곳은 없는 거 같다고 한다. 뭔가 명확하지 않지만, 이렇게 문자를 할만한 상황이라면 괜찮은 거 같았다. 4인실이었고, 창가에 누워있다고 했다. 별 일 없으면 다음 날 퇴원한다는 말도 했다. 한국 같으면 암 수술을 했는데 다음 날 퇴원이란 불가하겠지만, 국가보험으로 모든 것을 커버하는 캐나다에서는 특별한 이상이 있지 않는 한, 병원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먼저 문자를 넣어서 무사함을 알렸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시차 때문에 잠자는 시간이었지만, 한국에 계신 어머니도 계속 궁금해하며 문자를 주셨기 때문이다.
함께 기도해준 가족들,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하고 한 시름 돌렸다.
안심되는 소식을 듣고 나서, 나는 마당으로 나가서 땅을 파고 징검다리를 묻는 일을 했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현관 꽃 바구니를 예쁘게 키우고 싶은 마음에 동네 화원으로 갔다. 나는 원래 비료 사용을 좋아하지 않지만, 바구니 화분에 주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꽃을 탐스럽게 키우기 위해서 비료는 필수였고, 최근 어떤 비료가 좋은지 미리 찾아 놓은 상황이었기에, 화원에 가서 비슷한 것으로 구매하였다.
남편이 없는 밤은 추웠다. 엄마가 없는 엄마의 집도 이렇게 허전하겠지. 딸은 매일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겠구나 싶으니 마음이 또 무거웠다.
아침이 되어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밤새 약 먹고 검사하느라 잘 못 잤다고 했다. 그러나 검사 결과가 괜찮아서 무사히 퇴원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나는 냉동실에서 사골국물을 꺼내고, 양지를 함께 고아서 점심을 준비했고, 시트 갈은 새 침대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서 하루 일찍 세탁기를 돌렸다.
남편의 목에는 스마일 모양을 수술 자국이 생겼다. 기술이 좋아진 지금은 더 이상 상처를 꿰매지 않고 본드로 붙인단다. 그래서 다음날이면 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다.
남편은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원래 엄살을 전혀 부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하루 전에 거대한 암이 달린 갑상선을 제거한 사람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큰 딸에게서 꽃다발이 도착했고, 우리는 석 달치의 약을 지어옴으로써 병원에서의 일들을 정리하였다.
유동식을 먹어야 할 줄 알고 준비했던 멀건 사골국이 무상하게 남편은 식사에도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엔 몸보신을 위한 샤부샤부로 마무리를 하였다. 하루의 휴식을 취하고, 그리고 그는 다시 힘센 나의 남편으로 돌아왔다.
갑상선 이상은 늘 피곤함으로 나타나는데, 제거 후 약을 먹으면서 수술 전의 피곤함을 무찔렀고, 남편은 그간 못했던 일들을 몰아서 하느라 바빴다. 나는 처음에 그를 말리느라 바빴고, 그리고 며칠 내로 포기하였다. 한국은 갑상선 암 수술과 달리, 동위 방사선 검사 같은 것은 하지 않으며, 주기적으로 피검사만을 한다고 하니 내심 불안하긴 했지만, 오히려 회복에 도움이 되고 면역력을 올릴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불안한 상상을 해야 했던 수술이 끝났고, 감사하게도 남편은 급속도로 회복하고 있다. 어느새 2주일이 지나서 병원에 체크업하러 갔더니, 자그마치 달걀 반쪽 만한 종양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컸으니 엄청나게 힘들었을 수밖에!
사실 삶 속에서 감사해야 할 일들은 끊임없이 벌어진다. 단지 여전히 방황 중이니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항상 긍정의 힘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요즘은 정말 힘들구나. 흔들리는 이 마음을 어찌할까나! 글쓰기로 잡을 수 있을런지...
다시 기운을 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