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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Oct 05. 2020

봉숭아 키우기, 씨 받기

손 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외국에 나와 살다 보면, 한국에 있을 때 가볍게 여겼던 것들이 그리워지곤 한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그런 것들이 갑자기 생각나곤 하는데, 가드닝을 시작하고 보니 한국의 화초와 야채들 생각이 많이 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봄에 모종 살 때 채송화도 보이길래 사다가 심었고, 나팔꽃과 분꽃씨도 심었다. 채송화는 콩벌레들의 공격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몇 개는 데크에서 키웠더니 안전하게 자라서 나중에 큰 다음에 마당으로 옮겨서 꽃을 오래 보았다. 사실 채송화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꽃이라 더욱 남다른 기분이었다. 



나팔꽃은 오래오래 버티다가 두 주 전부터 드디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분꽃은 무슨 연유인지 잘 자라지 않아서 아마도 올해에는 꽃구경이 힘들 듯하다.


그리고 내가 그나마 몇 번 키워 본 봉숭아! 그걸 키우고 싶었는데 찾을 길이 없었다. 어릴 때 집에서 키워서 손톱이 물들이던 봉숭아. 나도 키우면서 두세 번 키워본 적이 있어서 특별히 애정이 가는 꽃 중 하나이다. 

2005년에 키웠던  꽃 없는 봉숭아

베란다 창 밖으로 난간을 만들어서 키웠다가 아이에게 손톱에 물들여주기도 했고, 난간이 없는 베란다에서 키웠을 때에는 꽃이 전혀 안 피어서 희한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아마 직접 받는 햇빛과 비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빗물에서 오는 미네랄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고 추측해보기도 했다. 아니면 쌈채소 키우는 흙을 사 왔을지도 모르지. 그때는 흙의 종류에 대해서도 정말 하나도 몰랐으니까.  






여름 들어서면서 봉숭아가 생각났는데, 올해는 못 심더라도 내년에라도 심어보고 싶어 졌지만 어떻게 씨를 구해야 할지 난감했다. 검색해봤더니 impatiens의 일종이라고 하고,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봉숭아는 이곳에서의 일반적인 impatiens는 전혀 다르게 생긴 꽃이다. Touch-me-no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으로 봐서 같은 과 식물인 것은 맞는데, 우리처럼 수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퍼지는 스타일이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결과 우리의 봉숭아는 impatiens balsamina 또는 garden balsam, 좀 더 짧게 줄여서 balsam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이미 7월이 시작된 마당에 이 씨를 찾아서 심기도 어렵거니와, 막상 가까운 화원에서는 파는 곳도 못 찾았다. 그렇게 검색하다가 시들해질 무렵, 밴쿠버 지역 포럼에 물어보면 씨앗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헬로밴 카페에 혹시 씨 있는 분 계신가요? 하고 올렸더니, 역시 조회수가 올라가면서 한 시간 만에 답이 왔다.


누가 모종을 나눔 해줘서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 와서 가져가겠느냐는 덧글이었다. 오 예! 우리 집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다 보니 평소 같으면 선뜻 가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바로 그때 우리 부부는 마침 그 지역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오이 피클을 담그려고 검색하다가 당일 수확 판매하는 무농약 오이 농장을 찾아서, 주문해놓고 가지러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차 안에서 그 고마운 분과 문자를 주고받았고, 오이 픽업 후에 오는 길에 들러서 화분에 곱게 담긴 봉숭아 모종 네 개를 얻을 수 있었다.


선뜻 내어주는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그날 우리가 구입한 오이 몇 개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살짝 집 문 앞에 놓고 왔더니, 맛있게 잘 먹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럴 때, 객지에 살면서도 한국인들끼리 정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지 다시금 느끼게 된다.



그날 정신이 없어서 오이 픽업한 사진도, 화분에 담겨있던 봉숭아 사진도 못 찍었지만, 다른 거 다 제쳐두고 바로 화단에 옮겨주고는 위 사진 한 장을 건졌다. 아주 탄탄해 보이는 애들이 너무 이쁘고 탐스러웠다. 아직 꽃이 피지도 않았지만 이미 잎부터 예뻤다. 


이때 우리는 옆 마당 화단 만들기가 한창이어서, 막 꽃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었고, 그래도 아직 빈자리가 남아있던 상황이라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받아 온 날짜가 7월 20일이었는데, 7월 29일에 첫 꽃을 피웠다. 이렇게 예쁘다니! 나는 무조건 반가웠지만, 이 꽃을 처음 보는 남편도 예쁘다고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8월 중순이 되자 모든 꽃이 다 피었다. 3가지 색이 고르게 있어서 더 예뻤다. 이웃집 소닐라가 놀러 왔다가 보고 연신 감탄을 하길래, 내년에 꽃씨 나눠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가든에 예쁘게 자리 잡은 봉숭아


내 기억 속의 봉숭아는 그다지 예쁜 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의례 따서 물들이는 데 사용하는 꽃이라는 것이 주는 특별함만 남아있었는데, 나이 들어서 다시 만난 색색의 봉숭아는 정원을 화려하게 만드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모양이 살짝 특이한 것이 자세히 보면 정말 봉황을 닮은 듯도 하다.


꽃이 지면 따줘야 꽃이 더 핀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 뒤에 조롱조롱 매달리는 씨방 또한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씨가 너무나 탐이 났다. 올해는 4개를 심었지만 내년에는 더욱 풍성하게 심고 싶었다.  



씨는 방울처럼 조롱조롱 매달렸고, 자그마한 초록색에서 큼직한 초록색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다시 노르스름한 색으로 변하면서 안에 씨앗을 머금고 있다가 언제든지 쏟아낼 것 같은 복주머니 모양으로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 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 

유행가 가사처럼, 정말 이 씨앗이 그렇게 톡 터질까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봉숭아 씨를 모았던 생각은 나지 않았다. 나팔꽃 씨앗도, 분꽃 씨앗도 눈 앞에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쩌면 이렇게 생각이 안 나던지...


궁금해서 매일매일 씨방을 들여다보다가, 어제는 정말로 터뜨려 보리라 하면서 노랗게 여물은 씨앗을 하나 땄다. 그리고 손바닥에 올려놓는 순간, "탁!" 하고 바로 터져서 깜짝 놀라며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꽃말이 "건드리지 마세요"이고, 영어로는 "Touch-me-not"이라고 불리는가 보다.  실제로 서양에서는 이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올림포스 궁전 연회장에서 황금사과 한 개가 없어졌다. 어떤 신의 짓궂은 장난이었는데 음식을 나르던 한 여인이 의심을 받아 쫓겨나고 말았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던 그녀는 억울해하다  끝내 슬픈 최후를 맞았고, 피를 토하고 죽은 그 자리에서 봉선화가 피어났다. 그래서 봉숭아는 요즘에도 조금만 건드리면 열매를 터뜨려서 속을 뒤집어 내 보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터지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색이 누르스름하게 여문 것들을 몇 개 따서 터뜨려보았다. 이웃집 소닐라의 손에 올려놓고 터뜨리기도 하였고, 재미 삼아 촬영도 해 봤다. 



봉숭아 키우는 데에 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비옥한 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비료가 많은 곳에 심으면 싹을 틔우지 못하므로 비료 없는 곳이 심어야 한다. 또한, 옮겨 심고 싶다면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 옮기기를 추천한다. 너무 일찍 옮기면 힘들어한다고. 그리고 자라면서도 비료가 많으면 웃자라서 단단히 서지 못하고 쓰러진다 하니 내년에 특히 조심해야겠다. 




오늘의 스토리를 여기서 끝 내기는 아직 뭔가 섭섭하다. 그래서 나는 결국 몇 개 안 남은 봉숭아 꽃과 봉숭아 잎을 따 가지고 들어왔다. 손톱에 물을 들여야지. 이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남편에게 이러쿵저러쿵 나 어릴 때 이야기를 해주면서 설명을 했다. 



천으로 감싸고 실로 동여매다 보니, 너무 조이면 피가 안 통해서 아팠고, 느슨하면 잠결에 빼버려서 물이 들다 말았던 이야기와, 항상 같은 천을 빨아서 잘 말려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매년 봉숭아 물을 들일 때면 꺼내와서 엄마 앞에 내밀었던 이야기들을 해줬다. 생각해보면, 우리 자매가 손톱에 물들일 때에도 어머니와 이모는 당신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 번은 백반인 줄 알고 넣었던 것이 뭔가 다른 것이었단다. 그래서 밤중에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깨서는 다 빼고, 자매가 나란히 개울가에 앉아서 손을 찬물에 담그며 달랬다던 이야기는 우리가 제일 흥미진진하게 듣던 이야기였다.  


봉선화 물들이기에 관련해서는 우리나라의 설화가 따로 있다.

백제때의 한 여자가 선녀로부터 봉황 한 마리를 받은 꿈을 꾸고 딸을 낳아 봉선이라 이름 지었다. 봉선이는 곱게 커 천부적인 거문고 연주 솜씨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결국에는 임금님 앞에까지 나아가 연주하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궁궐로부터 집으로 돌아온 봉선이는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님의 행차가 집 앞을 지나간다는 말을 들은 봉선이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하여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이 소리를 알아보고 찾아간 임금님은 봉선이의 손으로부터 붉은 피가 맺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매우 애처롭게 여겨 무명천에 백반을 싸서 동여매 주고 길을 떠났다.

그 뒤 봉선이는 결국 죽고 말았는데, 그 무덤에서 이상스러운 빨간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그 빨간 꽃으로 손톱을 물들이고, 봉선이의 넋이 화한 꽃이라고 봉선화라 하였다.

출처: 봉선화설화 [鳳仙花說話]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봉숭아 물을 들이려면 꽃과 잎이 있어야 한다. 사실 꽃보다는 초록색 잎사귀가 막상 물이 더 잘 든다. 꽃은 그냥 기분 내려고 넣고, 없으면 잎만 가지고 해도 충분하다. 잎은 초록색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붉은 색소도 함께 있다고 한다. 비록 양이 적어서 초록색으로만 보이지만, 붉은색은 물이 오래 남고 초록은 쉽게 빠지기 때문에 손톱에는 막상 붉은색만 염색이 되는 거라고 한다. 


잎을 따자마자 해도 되지만, 하루 정도 살짝만 마르게 뒀다가 사용하면 수분이 덜 나와서 꽃물이 샐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만일 하루 이상 뒀다가 물을 들여야 한다면 심지어 냉동을 해도 된다.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 살 때, 친정에서 봉숭아를 얻어다가 냉동해뒀다가 편한 타이밍에 아이에게 물들여주기도 했다. 냉동이 가능하니 참 편리하지 않은가? 지금은 딸이 곁에 있지 않지만, 잎을 좀 따 뒀다가, 딸이 오면 물을 들여주고 싶다.



매염제로 원래 백반을 사용하는데, 우리 집에는 물론 백반이 없었다. 소금이나 식초를 사용해도 된다고 하니 처음으로 그렇게 시도해보았다. 


이렇게 절구에 콩콩 빻아서 손톱에 올리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의 붉은 물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에 잎만 가지고 했을 때에도, 빻아서 손으로 만지다 보면 이미 엄지 검지에 빨갛게 물이 들곤 했는데, 이번엔 만지작거려도 초록물만 나올 뿐, 조짐이 수상하였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니 그냥 해 보자 하고 감행하였다.


내 손톱에도 올리고, 남편 손톱에도 도독하게 올려줬다. 일회용 장갑을 잘라서 덮어주고, 반창고로 감아줬다. 옛날처럼 실로 처매지 않아도 되니 참 편하다. 손가락 전체에 물이 드는 것이 싫어서 살갗 부분에 매니큐어를 미리 발랐던 적도 있었는데, 반창고를 미리 붙여두어도 마찬가지 효과를 볼 수 있다. 



손을 얌전히 이불 밖에 꺼내 두고 자면서, 처맨 게 빠지고 움직이는 꿈도 꾸고 (생각해보니 옛날에도 그랬다!) 아침에 일어나서 풀어보니... 애게게! 마치 김칫국물에 담갔다가 꺼낸 것처럼 약하게 들었다. 평생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꽃을 하나도 안 쓰고 했을 때에도 정말 빨갛게 물이 잘 들었었는데 말이다.


백반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캐나다 씨앗은 종자가 다른가? 캐나다 흙이 다른가?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지만 정답은 모르겠다. 친구가 백반이 좀 있다고 했는데, 얻어다가 다시 한번 해봐야겠다!




푸념은 이 정도만 하고... 봉선화를 내가 굳이 봉숭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불러왔기 때문에 친숙해서 그렇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을 보면 원래 이름은 봉선화가 맞을 것 같다. 그것이 자꾸 불리다가 발음 편하게 순 우리말로 봉숭아가 되었으리라. 봉선화라는 이름을 들으면 톡 터지는 씨앗의 유행가도 떠오르지만, 사실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김형준 詩, 홍난파 曲의 가곡 봉선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시인 김형준의 집의 처마 밑에 봉선화가 가득했는데, 그걸 보며, 그는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사실 이 곡은 원래 홍난파가 1920년 단편집을 내면서 '애수'라는 곡으로 발표했는데, 추후 김형준이 거기에 가사를 붙였다. 그 후 20년이 지나, 김천애라는 가수가 일제 강점기에 이 곡을 부르면서 일제강점기의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내용 출처: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초라한 곳에서도 아름답게 피었다가, 모진 풍파 만나서 처량해진 꽃 봉선화에 우리 국민을 빗대면서, 그래도 혼이 살아 있어서 다시 환생할 것을 희망하는 내용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찡 해 온다. 그러니 손톱에 비록 물이 잘 들지 않았어도 구시렁거리 말고 씨앗을 차근히 모아서 내년에는 더욱 찬란하게 꽃 피워야지.


그래서 오늘은 김천애 님이 1940년대에 부른 봉선화를 들으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한다. 내 입가에도 종일 이 노래가 떠 다녔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 너를반겨 놀았도다.


언간에 여름가고 /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 네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 네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꾸는 / 너의혼이 예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 환생키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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