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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Feb 19. 2021

우리에게 발렌타인데이는...

노부부도 이런 날에 초콜릿을 주고받을 수 있다.

연인들의 날로 유명한 발렌타인데이. 사실 한국에서는 초콜릿 먹는 날로 더 유명하다. 회사이고 학교이고 간에 초콜릿을 사다가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집에서도 별다른 것 안 해도, 슈퍼마켓에서 간단히 가나 초콜릿이라도 사다 식탁 위에 얹어 놓아야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랄까? 사랑고백이 목적이라지만, 사실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이미 연인인 사람들이 초콜릿 나누고 저녁 먹고 그러는 날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초콜릿을 받은 남자는 한 달 후 화이트데이 때 선물로 다시 되갚아야 하는 채무관계 같은 날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쓸데없이 상술에 휘말리는 사람들이라며 놀림거리가 되기도 쉬운 날이기도 하다. 혹자는 안중근 의사 서거일인데 사랑놀음이나 한다면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애국심과 이것을 꼭 엮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딸아이 학교에 가져갔던 마카롱

아무튼 발렌타인데이는 내게 그리 낭만적인 날이 아니었다. 그냥 재미 삼아 초콜릿을 먹는 날. 아니면 주변에 초콜릿이나 과자를 만들어서 나누는 날 정도의 느낌으로 늘 지나갔었다. 예전의 일기장을 뒤져봐도, 발렌타인데이에 뭔가 로맨틱한 것을 했던 기록은 전혀 없었다. 찾아낸 것이라고는, 딸이랑 함께 마카롱 구워서 학교에 돌린 이야기...


그리고 더 전으로 내려가면, 어린 딸과 나가서 영화 보고 맛있는 거 먹은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더욱더 전으로 거슬러 내려가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중학교 땐가 "여학생"이라는 청소년 잡지에서 발렌타인데이를 소개해서 처음으로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기해했었다. 세상 둘째 가기 서러운 숙맥이었던 나는, 그런 신기한 날은 그저 남의 세상 이야기였다. 교회라도 다녔으면 뭔가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중, 여고를 다녔던 나에게 남자와 연관된 일은 그냥 상상 속의 세계일 뿐이었다. 거기에 사랑고백의 초콜릿이라니! 내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이다.


발렌타인데이는 내게 있어서 그런 날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첫 발렌타인데이가 다가오면서 그 의미가 바뀌기 시작했다. 서양에서는 당연히 지켜지는 날이라고 생각했던 발렌타인데이, 그러나 남편은 한 번도 이 날을 로맨틱하게 축하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학교 선생님이니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카드를 만들어서 나눠주었던 일 같은 것 이외에 실제로 이 날을 기념해서 뭔가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발렌타인데이는 그저 남들의 잔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첫 해의 발렌타인데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몰랐다. 남편은 날더러 이 날을 기념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얼떨떨 애매하게 대답했던 것 같다. 그때는 우리가 결혼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여전히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았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뭔가 남편에게 선물하고 싶지만, 내가 뭔가 하겠다고 하면 남편도 해야 할 거 같은 부담감을 가질까 봐 선뜻 뭐라 대답하기가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두리뭉실하게 대답하며 넘어갔고, 발렌타인데이 당일이 될 때까지 우리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나는 몰래 셔츠를 두벌 사놨고, 처음으로 수제 초콜릿을 만들었다. 처음이어서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기에, 여러 가지 버전으로 실험하며 이틀에 걸쳐서 만들었다. 시간이 모자라서 남편이 퇴근한 이후에 아래층에서 뉴스를 보는 동안 커팅해서 포장하느라 통통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전날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선물과 초콜릿을 꺼내 건네면서 "Happy Valentine's Day!"라고 말했다. 남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깜짝 놀랐다. 초콜릿을 언제 만들었냐며, 그래서 어젯밤에 그렇게 위층에서 분주한 소리가 났구나! 하고 웃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옷을 선물 받아본 것이 처음이라며, 이제 아내가 생겼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원래 발렌타인데이를 기념하지 않던 남편이라 했기에 나도 아무 기대를 안 했는데, 남편은 혹여라도 내가 기대를 하고 있다가 실망할까 봐 나름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고급스러운 속옷을 준비해줬다. 실크 감촉의 여성스러운 캐미솔 세트였다. 남자에게 속옷 선물을 받은 것이 나 역시 처음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발렌타인데이를 축하하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두 번째 해에는 초콜릿 만드는 솜씨도 좀 늘었다. 그리고 좀 더 재미나게 하고 싶어서 남편을 위한 꽃다발을 주문했다. (https://brunch.co.kr/@lachouette/133) 미리 꽃집에 가서 꽃을 직접 보고, 종류를 확실하게 다짐받고, 발렌타인데이 아침에 배달되도록 준비했는데, 서로에게 즐거운 서프라이즈였다. 작년엔 정말 특별한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 




올해는 발렌타인데이 어떻게 할까? 그랬는데, 그 전전날부터 남편이 컨디션이 안 좋아서 출근을 못 했다. 그게 설날 때부터였으니, 남편 없이 설날 저녁식사를 준비했는데, 자기가 함께 돕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사실 침대로 식사를 가져다주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남편은 굳이 나와서 우리와 함께 앉아서 식사를 했다. 남편은 그냥 괜찮다고만 했지만, 내가 준비한 음식과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떡국과 남편 좋아하는 잡채를 했고, 녹두전 및 도토리묵을 했다. 재 놓은 엘에이 갈비는 부득부득 남편이 나가서 바비큐에 구웠다.



발렌타인데이는 다가오는데, 남편이 계속 집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몰래 초콜릿 만들기는 포기했고, 그냥 대놓고 초콜릿을 만들었다. 이번엔 크랜베리와 술을 넣은 것으로 만들었고 딸내미가 도왔다. 그리고 발렌타인데이 전날, 프랑스식 디저트 크렘 브륄레를 만들었다. 달다구리를 선호하지 않지만, 설탕 없이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으로 도전했다. 이거는 남편이 뉴스 보는 시간을 이용해서 들키지 않고 만들 수 있었다.



발렌타인데이 전날, 눈이 펑펑 왔는데, 누워있던 남편이 갑자기 나오며 말했다. "밖에 누가 왔어." 나는 부엌에서 뭔가 하느라 벨 소리를 못 들었는데... 남편이 내려가 현관문을 열자, 나를 찾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꽃배달이 내게 온 것이다. 원래 남편이 몰래 사다가 숨겨뒀다가 내게 주려고 생각했는데, 주문한 것을 찾으러 갈 처지가 못 되니 그냥 배달로 전환한 것이었다. 


흰 눈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빛나는 빨간 장미는 정말 아름다웠다. 30년 전부터 갖고 싶었던 흰 눈의 빨간 장미, 완전히 잊혔던 꿈이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그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는,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다니는 것이 창피하다면서 꽃다발 갖고 싶다던 내 말을 일축했다. 사실 꽃이 삶에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 사들고 들어갈 만큼 절실하지 않았다. 그냥 좀 낭만적이고 싶던 마음이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렇게 별거 아닌 유치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잊고 살았는데... 그 로망이 내가 부탁하지 않은 순간에 이렇게 이루어지다니!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안타까워하면서, 그래도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이렇게 내게 해줬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이라며 기뻐했다. 내가 얼마 전에 혼자 코스트코에 장 보러 갔을 때,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살까 말까 망설였다고 했더니, 꽃을 원하면 꼭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말했다. 자신이 직접 사는 꽃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꽃은 물론 다르니까. 하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꽃을 사려고 했던 이유는, 당신에게 주고 싶어서였어...라고 말이다.




발렌타인데이 아침이 밝았다. 나는 역시 첫해에 그랬던 것처럼 침대 밑에서 초콜릿과 선물을 꺼내면서 "해피 발렌타인스 데이!"라고 말했고, 남편도 역시 준비된 선물을 내밀었다. 아파서 포장을 예쁘게 못 했다는 멘트와 함께...



우리는 그렇게 초콜릿을 나눠 먹고 그날을 시작했다. 달콤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컨디션을 거의 회복했지만, 이번 발렌타인데이 저녁은 내가 준비한다고 했다. 이틀 전 설날 준비로 떡국도 끓였고, 녹두전도 먹으면서 고기전도 부쳤기 때문에, 소고기 동그랑땡 반죽이 남아있었다. 그걸로 간단히 한식을 차려도 되겠지만, 서양식 기념일에 한식을 하기보다는 좀 양식스럽게 먹고 싶었다. 명절 끝인 이유도 있었으리라. 같은 음식의 반복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래서 동그랑땡으로 미트볼을 만들고, 그것을 이용한 간장 소스 파스타를 만들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조합이었기 때문에 약간 긴장이 되었다. 머릿속에 자리 잡힌 레시피는 마구 갈팡질팡 했지만, 결과는 그럴듯하게 나왔다. 동그랑땡에 간장소스... 이거면 사실 맛없을 수가 없는 거 아닐까? 하하! 



남편은 내가 예전에 해봤던 요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지켜봤는데, 왜 그렇게 초 집중하며 요리를 할까 싶었다고 했다. 한 번도 안 해본 내 마음대로 요리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우리 세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많이 웃는 저녁식사를 했다.



볶을 때에도 깻잎을 넣었지만, 마지막에 장식으로 위에 조금 얹었더니 깻잎 향이 더욱 풍부했다. 마지막에 삶은 면을 넣어서 국물 자작한 간장소스에 다시 볶아주니 간도 잘 배었고, 국적 불명의 파스타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디저트는 비장의 크림 브륄레! 냉장고에 자리가 모자라서, 밀폐용기에 담아 밖에 내놓았던 크림 브륄레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남편은 그게 뭔지 몰랐다고 했다. 그냥 반찬통에 들은 무언가처럼 위장되어있었으니까! 


이제 크림 브륄레의 본격적인 마무리를 위해, 위에 설탕 대신 에리스리톨을 뿌려서 토치로 가열했다. 이렇게 하는 것도 사실 처음 해본 것이어서 과연 설탕 없이 가능할까 조마조마했다. 내가 토치로 달구면서, "흠! 잘 안 되네!" 했더니, 딸이 토치를 채가면서, "엄마, 좀 더 오래 해야 되겠죠, 조바심 내지 마세요." 하더니 전투적으로 불을 내뿜었다. 그러자 투명하게 녹았던 감미료는 처음에 내가 머릿속에서 상상하며 계산했던 것처럼 그렇게 브라운으로 변하며 달콤한 막을 형성하였다.



톡 깨니 안쪽에 부드러운 푸딩이 위의 달콤함과 어울려 입에서 살살 녹았다. 완전 성공이었다. 딸이 만든 마카롱과 아침에 건네준 초콜릿, 그리고 최종의 크렘브륄레. 이렇게 디저트까지 골고루 음미해 먹으면서 우리의 발렌타인데이 이벤트는 막을 내렸다. (무설탕 크렘 브륄레 레시피:https://brunch.co.kr/@lachouette/252)




밤에 잠자리에 눕자 남편이 말했다. "오늘 멋진 저녁이었어! 고마워!" 나는 "내가 고맙지!"라고 맞받아쳤다. 우리는 왜 발렌타인데이를 우리의 이벤트에 넣었을까? 이 날은 무엇을 기념하는 날일까? 흔히 말하는, 사랑을 고백하는 날인가? Be mine!이라고 말하며 상대를 찜하는 날일까?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에겐, 그대가 내 사람이고,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는 날이었다. 늘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남편에게 이렇게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새삼스럽게 다시 표현하고 싶은 날이었다. 물론, 감사하다는 말은 우리 부부가 매일 나누는 말이지만, 이 날을 핑계 삼아 그것을 더욱 확실하고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이 날, 남편의 컨디션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Thank you for being mine. 내 사람이어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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