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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Feb 06. 2021

잊혔던 퀼트를 다시 손에 잡으며

설렘으로 채워진 조각들

사랑스러운 문양의 천을 자르면서 가슴이 뛰었다. 그래, 모든 퀼터들은 천을 사랑하지. 나도 그렇게 천을 사랑했다. 작업실 벽면 하나를 천으로 가득 채울 만큼. 시장에 나가서 천을 보고 매료되어서 홀린 듯 구입해오고, 집에서 그것을 정리하면서 또다시 매료되곤 했다. 그리고 필요한 작품을 한다며 천들을 꺼내놓고 고민하는 순간에는 마땅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막막함을 느끼며 맥이 빠지기도 하고, 정말 이 원단이 딱 내가 원하는 그 색감이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작업을 위한 다림질을 하며 너무 예쁘고 기분이 좋아서 가슴이 막 두근거리곤 했었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퀼트를 하면서 나는 바로 그 기분을 다시 느꼈다. 아, 이랬었지... 이래서 내가 퀼트를 좋아했었지... 눈 앞에 놓여있는 천들이 너무나 예쁜 것이다. 구입할 때에는 비싸다고 상당히 망설였었는데, 다림질하고 자르면서 심장이 찌르르 해왔다.



나는 오랫동안 퀼터였다. 퀼트에 푹 빠져서 온 세상이 다 퀼트로 보였고, 심지어 다시 태어나면 퀼트를 절대 시작하지 않으리라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인생의 다른 맛도 보고 싶은데, 눈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길다가 보이는 보도블록의 문양도 퀼트 패턴이 되었고, 무엇이든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품들도 다 퀼트로 만들려고 했다. 퀼트를 가르친 기간만 20년이 넘고, 내 공방 이름을 건 그룹 전시회도 12회까지 하였다. 나만의 퀼트 작업실이 있었고, 기능이 훌륭한 재봉틀과 벽면을 가득 채운 원단이 있었다. 




처음 퀼트를 시작하던 순간은 아이를 임신한 지 8개월 되었을 때였다. 나랑 예정일이 같은 산모가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함께 병원에 검진을 다녀오다가 퀼트 샵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녀가 말했다.


"언니, 저것 봐, 정말 예쁘지? 우리 이거 배우자."


진열장에는 귀여운 아기 신발이 놓여있었고, 턱받이와 기저귀 가방, 그리고 아기용 작은 이불이 걸려있었다. 나는 마법처럼 그 신발에 끌려 들어갔다. 이제는 사진 조차 남지 않은 그 작은 신발과 턱받이가 내 첫 퀼트였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20년 넘게 그 길을 걸어왔다.


아래 사진은 나의 첫 퀼트 이불이다. 당시에는 전부 손바느질로 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결국 딸이 태어난 후에 마무리하여 완성되었지만, 그 이후 아이에게 정말 사랑받는 이불이었다. 완전히 해져서 더 이상 빨 수 조차 없게 될 때까지 사용하였고, 절대 버리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결국 같은 사이즈의 세 번째 이불을 만들었다. (중간에 만들어서 사용했던 두 번째 이불도 비슷한 형상이 되었는데, 역시 사진이 없다)



왼쪽 사진에 나란히 놓인 이불을 비교해보면, 첫 번째 이불과 세 번째 이불에 같은 원단으로 테두리 보더를 둘렀음에도 얼마나 색이 바래고 낡았는지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다. 지금은 저 이불도 역시 낡아버렸다. 





손바느질로 전 과정을 해야 만한다고 생각했던 퀼트의 세계였던 시절, 갑자기 미국에서 3년간 살게 되면서 나는 재봉 퀼트라는 신세계를 만나게 된다. 아이가 2살 때 갔기 때문에, 나가서 퀼트를 배울 사정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꼭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티브이에서 진행하는 퀼트 프로그램을 녹화해놓고 여러 번씩 돌려보면서 그렇게 재봉 퀼트를 배웠다. 미국 전역의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이 하는 강의였기때문에 오히려 동네에 나가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기술을 무료로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서점에서 재고정리하는 퀼트책도 백권 넘게 사 모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재봉 퀼트 강의를 시작했다. 이불 하나에 몇달씩 걸리던 일을, 일이주만에 할 수 있다니, 퀼트가 생활에 훨씬 가까워진 기분이었고, 이것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홈티칭으로 집에서 알음알음 사람들을 모아서 가르쳤고, 거기서 그치지 말자는 취지로, 그 사람들과 뜻을 모아서 매년 합동 전시회를 했다.


예전 전시회 사진들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퀼트로 소품들을 만들어 판매했고, 그 돈으로 불우한 청소년을 도왔다. 100만 원으로 시작되었던 우리의 바자회는 해를 거듭해가면서 천만 원이 넘는 액수를 매년 벌 수 있었고, 1명에서 시작했던 후원은 10명이 넘는 아이들로 매년 늘어났다. 아이들도 우리와 함께 성장했고, 우리는 감사와 협동을 배웠다. 정말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내 평생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때 함께 했던 이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감사해진다.






그랬던 내가 완전 빈 손으로 캐나다로 왔고, 퀼트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12년전 캐나다에 잠시 살던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퀼트 친구들이 재봉틀도 빌려줬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부족한 재료들로는 바느질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새롭게 시작한 삶에 적응하기도 무척 바빠진 것도 핑계 중 하나였다. 퀼트가 아닌 다른 것들에도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나는 점점 더 많은 것들로 손을 뻗치고 있었다.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고, 요리를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물론, 가끔 뭔가를 만들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머리만 열심히 굴리다가 주저앉았다. 재작년 크리스마스에는 나의 그런 염원을 충족시켜주려고 남편이 퀼트 원단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우리의 침대에 덮을 커다란 퀼트 이불을 만들고 싶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푸른색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일을 벌이면 내가 얼마나 거기에 매달려야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감히 시작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남편이 선물해준 퀼트 원단 묶음


그러다가 최근에, 내가 아끼는 처자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때 우리 집에 잠시 살았던 영국인 아가씨가 있었는데,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고, 그녀는 나를 이모라고 불렀다. 당시에 정이 듬뿍 들었는데, 그게 벌써 십몇 년 전이니... 떨어져 지내면서 이모 노릇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런 소식을 들으니 나도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들까지 통틀어서 내가 처음으로 할머니가 되는 순간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과감히 나는 다시 퀼트에 손을 대었다.


남편과 함께 나가서 원단을 구입했는데,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가장 아기에게 어울릴만한 색상으로 심사숙고하여 선택하였다. 누빔 할 솜도 함께 구입하고, 뒷감도 생각하고... 그러면서 머릿속은 아주 분주하였다. 패턴은 많이 복잡하지 않은 것으로 선택했지만, 아기에게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고민하다가 XOXOX 모양으로 디자인을 잡았다. 영어로 xoxo는 뽀뽀 소리 쪽쪽의 상징이다. 그렇게 이모할머니가 보내는 뽀뽀라는 의미를 얹어보았다. 





자르고, 박고, 다리고, 박고, 다리고... 마음이 제법 바빴다. 내가 바지런한 편이 못 되어서 좀 게으름을 떨 만도 한데, 마침 재봉틀을 빌려준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재봉틀이 필요해져서 다시 가져가야겠다는 것이다. 아, 이런!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네! 그 친구는 내가 퀼트를 끝낼 수 있도록 2주일을 주겠다고 했고, 그 덕에 나는 딴청 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릴 수 있었다. 


사실 작은 퀼트여서 바짝 붙어서 작업한다면, 일주일이면 될 거 같다 생각은 했지만, 한참 안 했던지라 타임라인 계산이 잘 되지는 않았다. 내심 걱정도 되었다. 결과물이 마음대로 안 나오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내가 쉬었던 기간이 무색하게, 만들다 보니 손이 알아서 많은 부분을 해주었다. 



한 과정이 끝나면 다림질은 필수였고, 필요 없는 시접 부분을 잘라내야 하기도 했다. 그런 일들은 남편이 옆에서 돕기도 했다. 생각보다 손이 훨씬 많이 과정이라는 사실에 남편은 놀라워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왜 그냥 사각형으로 잇지 않아?"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퀼터니까."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여전히 퀼터라는 이름을 내게 붙이고 싶었나 보다. 그냥 생활용품이 필요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머릿속에 있는 퀼트는, 생활에 밀접한 솜이불이다. 어릴 때부터 퀼트와 가까이 자랐고, 침대 위에 놓여있는 따뜻한 커버였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퀼트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진열장을 통해 처음 만났고, 퀼트를 공부하면서 수많은 예술 작품을 만났다. 퀼트 전시회를 다녔고, 퀼트 작품집들을 보았다. 내게 있어서 퀼트는 실용품 이상의 것이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고, 하나하나의 단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천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시침질을 마치고 누빔을 기다리고 있는 아기 이불 샌드위치


조각 잇기가 다 끝나면 싹 다림질을 하고 나서, 퀼트 샌드위치를 만든다. 먹는 샌드위치가 아니고, 솜과 뒷감을 대어서 세 겹을 함께 잇는 과정이다. 그냥 세 겹을 쌓아놓기만 한다고 고정되지 않으니, 여기저기를 누벼줘서 세장이 붙어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시침질도 해야 하고, 지금까지 이은 곳들 근처를 꼼꼼히 누벼야 한다. 그걸 바로 퀼팅이라고 부른다. 누비는 방식은 그야말로 작가의 개성이다. 전체를 수놓듯이 아름다운 패턴으로 눌러주기도 하고, 이번에 내가 한 것처럼 조각 이은 부분들 옆을 눌러주듯 박아주기도 한다. 그리고 조각이 너무 커서 들뜰만한 곳도 눌러준다.


선을 그리는 것보다 이렇게 마스킹 테이프를 이용하면 깔끔하게 퀼팅할 수 있다.


이번 퀼트는 아기이불이기때문에, 나는 누비는 분량을 최소화해서, 되도록이면 이불이 폭신한 느낌이 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부분들만 누볐다. 그렇게 퀼팅이 끝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테두리를 깔끔하게 막아 정리해준다. 이렇게 바인딩까지 끝나면 완성이다. 




원단을 빨고, 다리고, 자르기 시작해서부터 완성하기까지 딱 일주일이 걸렸다. 나 같은 꼼지락 쟁이가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완성하고 보니 마음에 든다. 예술성이 있거나 한것은 아니지만, 포근하고, 아기에게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직 만나지 못한 아기지만 말이다. 나의 딸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아기도 이 이불을 끌고 다니며 마르고 닳도록 애용해주면 좋겠다. 



이렇게 다시 퀼트를 시작하고 보니, 다른 것들 만들고 싶은 마음이 막 샘솟아 오른다. 내가 그러지 않으려고 많이 주의를 하는데, 내 가슴속에서는 아직도 이 사랑이 살아있다고 드러내고 싶은 모양이다. 자꾸 피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것을 일단 손에 쥐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이 뒷전이 되기 때문이다. 한참을 펼쳐놓아야 하고, 또한 상당히 집중을 요한다. 그래서 이 덕에 브런지 글쓰기도 또 밀렸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춤추는 다른 생활 소품들과 딸을 위한 덮개, 우리 방의 이불, 아니면, 아기 이불에 따라갈 뭔가 다른 소품? 여러 가지가 빠르게 내 머릿속을 점령한다. 하지만 과연 나는 이 이후에 다시 바느질을 또 하게 될는지, 그것은 며느리도 모른다. 빌린 재봉틀도 이제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아가야, 이모할머니의 뽀뽀를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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