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슈에뜨 La Chouette Apr 14. 2021

딸이 머물다 간 자리...

딸이 갔다. 가야 했기에 갔다. 생일도 당겨서 하고 급히 준비해서 갔다. 아이가 간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아이는 원래 조용한 성격이고, 방에서 별로 나오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는 편이었는데도 빈자리는 티가 나는구나.


사실 딸과 헤어지는 것은 정말 이력이 났다. 벌써 5년 전부터 떨어져 지냈고, 가끔씩만 와서 함께 지내곤 했으니까... 이별이 쉬운 적은 없었지만, 작년에는 정말 힘들었었다. 뜻하지 않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생이별을 했다. 허둥지둥 미국으로 딸을 찾아갈 때까지만 해도 한 치 앞을 모르던 상황에서 결국 모든 짐을 다 빼서 한국으로 보내면서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자발적 의지로 헤어질 때에는 그래도 각오된 마음이었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 당연히 갈 길을 간다 싶었지만, 있던 짐을 정리하고도 엄마한테 돌아오지 못하고 한국으로 혼자 가야 했던 현실은 참으로 무거웠다. 


그렇게 보낼 때만 해도 한 두 달이면 상황이 정리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은 가고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해서 더욱 힘들었다. 영주권자인 나는, 가족상봉을 위해서 어머니는 초대할 수 있어도 과년한 자식은 안된다는 이상한 규칙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렇게 마음고생하다가, 드디어 성인자녀에게도 국경이 열리면서 아이가 캐나다에 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작년 10월이었다. 


가족이라는 것은 원래 가장 힘들 때 함께 하는 사람들 이어야 하는데, 힘든 순간을 따로 보내는 것은 고통이었기에, 재상봉은 정말 가슴 뛰는 일이었다. (계속 구독하던 분들은 이 스토리를 다 아시리라) 그렇게 상처 받은 아이가 왔고, 우리 부부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나는 친엄마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편이 딸아이에게 보여준 사랑은 정말 고맙고 컸다. 친자식이 아니라고 느끼지 않게 해 주려고 정말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아이의 도착과 함께 침대를 만들어줬고, 함께 방을 꾸몄고, 한국에서 즐겨 먹던 음식들을 부족함 없이 먹게 해 주었고, 생일도 한 달 당겨서 근사하게 차려주었다. 엄마가 재혼한 곳에 나그네처럼 다녀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집이라고 생각하고 진정으로 편히 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한 남편의 뜻은 아이에게 잘 닿았다.


떠나기 사흘 전, 아이가 한 턱 쏘겠다며, 남편이 좋아하는 인도 음식을 주문했다. 여러 가지 맛을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넉넉히 준비해서, 온 식구가 재미나게 웃으며 배불리 먹었다. 이 식당은, 예전에 아이 대학 합격 후 캐나다 다니러 왔을 때, 멘토 선생님이던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저녁을 사준 곳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내가 사는 이곳은 겨울에 내도록 비가 오는데, 3월이 되어서도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다가, 막상 아이가 떠날 때가 되자 좋은 날씨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떠나기 전 날, 우리는 화사한 햇빛이 내리는 부활절 일요일을 함께 보냈다. 


애들이 어린 집에서는 부활절 달걀을 숨기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단계는 지났고, 그냥 아이 보내기 전날이라고 마음이 분주했는데, 아이는 아침에 이 셔츠를 벽장문 앞에 걸쳐 놓았다. 


분주한 남편이 계속 못 보고 지나치기에, "아직도 이스터 달걀을 못 찾았어? 두 개 있던데!"라고 슬쩍 말했다. 남편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이것을 발견하고 박장대소를 하였다. 이 셔츠는 자식들이 사준 셔츠인데 양쪽 다 팔꿈치가 해져서 구멍이 크게 뚫린 것을 그냥 입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 딸아이가, "내가 이거 뭐 덧대줘도 돼요?"하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잊혔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결국 가기 전에 완성해서 귀엽게 이렇게 걸어둔 것이었다. 팔꿈치에 두 개의 녹색 달걀이 예쁘게 붙어 있었고, 남편은 팔꿈치를 괴어도 딱딱하지 않고 폭신해서 좋다고 말했다.


짐을 싸던 아이는, 혹시 태블릿 케이스를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묻길래 내가 급히 후다닥 만들어서 대령했고, 가방의 케이스가 없어서, 남편이 안 입는 헌 티셔츠를 가지고 가방 껍데기도 대강 만들었다. 평소 같으면 뭔가 만들고 나서 사진 찍기 바쁜데, 이번엔 내가 정신이 멍했나 보다. 사진 한 장도 안 남겼네...


가기 전에 별로 할 일이 없다기에 우리는 함께 집 앞에서 놀았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꽃망울이던 벚꽃이 그새 반 이상 열려서, 아이를 떠나보내는 마음이 아쉬웠다. 이제 함께 바깥에서 놀만한 날씨가 되니까 떠나는구나 싶어서... 



날씨가 이렇게 화창하자 남편은 오픈카를 꺼낼 때가 되었다고, 덮어두었던 시트를 걷었다. 그리고 시험 운전을 한다고 시동을 걸었는데, 겨우내 한 번도 안 탄 차였지만 무사히 시동이 잘 걸렸다. 그 김에 아이 태우고 한 바퀴 드라이브! 남편이 이 차에 아이를 처음 태웠을 때가 5년 전이고, 그 이후 처음이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다!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당시에 딸아이가 너무나 좋아하던 멘토 선생님이었던 남편. 아이를 이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시켜주었고, 저녁도 사주었다. 아이는 그 당시, 나중에 다시 캐나다를 방문해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는 아빠가 되어 드라이브를 시켜주다니!



그러고 나서는 자전거를 꺼내서 동네를 다시 한 바퀴 돌았다. 그동안 계속 비 오고 날씨 안 좋아서 자전거도 거의 못 탔는데, 가기 전에라도 아쉬움을 달래 봐야지.



딸아이 타는 것을 보고 나도 타보겠다며 올라앉아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니 아이가 그네에 앉아있었다. 남편은 옆에서 비스듬히 서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정겹던지...



딸의 짐 싸기는 의외로 일찍 끝났다. 원래 밤을 새워서 가방을 싸는데 이력이 난 아이 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후다닥 미리 감치 다 쌌을까 생각해보니, 아이의 짐 싸기는 늘상 방을 비우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방학 때 집에 올 때면 늘 기숙사를 싹 비워놓고 와야 했기에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고, 로마에 갔을 때에도 역시 방을 비우느라 그랬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내 짐을 옮겨서 이사를 해야 했기에 아이도 자신의 물건을 급하게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엘에이에 살다가 떠날 때에도 그랬다. 쓰린 가슴을 안고 며칠을 밤새며 함께 아이의 아파트를 비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을 비울 필요가 없었다. 오래 가는 것이 아니니 많은 짐을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그저 옷가지만 챙기면 되니 가방이 훌렁훌렁 비었다. 늘 방을 비워야 했던 안쓰러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짠해왔다. 아이는 그냥 씩씩하게 웃었다.


저녁식사는 만두를 후다닥 빚어서 간단한 만둣국으로 해결했다. 아이의 소울푸드 넘버원이니까. 그 전날에는 유부초밥을 해줬고, 재료를 남겨뒀다가 출발하는 아침에도 유부초밥을 쌌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다 같이 웃고 떠들었다. 화창한 날씨가 참으로 짓궂게 느껴졌다.


아이가 다시 떠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멀리 가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냥 잠깐 비우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련다.


자기 방을 비우지 않고 남겨 놓고 갔으니까... 햇살같이 노란 방을 남겨놓고 갔으니까 말이다. 여기저기 딸이 머물다 간 흔적을 돌아보며, 딸아이가 다녀간 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남편이 좋아해서 딸아이가 자주 만들었던 마카롱. 그리고 매일 집안 어딘가 잘 보이는 곳에 숨겨두고 찾기 놀이를 했던 것을 생각해서, 아이가 남겨놓고 간 마카롱을 이제 내가 대신 이렇게 숨겨둔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마카롱을 저녁 디저트로 먹으며, 아이가 존재를 느낀다.


벚꽃이 다 떨어지고 나서 푸른 잎이 다 올라오면 다시 만날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딸의 방을 디자인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