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제안한 방 만들기 프로젝트
딸아이가 한국에서 이곳으로 돌아 왔을 때, 처음에는 예전에 왔을 때 지냈던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방에는 남편이 새로 짜준 침대가 있었고, 그는, 아이에게 자기의 침대를 갖게 해주고 싶다고 했었다. (그 이야기는 여기서 : https://brunch.co.kr/@lachouette/217 ) 나는 그 일이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었는데, 남편의 마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왕 와서 지내는 것인데, 임시로 머물다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기를 원했다. 집에 돌아와서 내 방에서 지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방을 본격적으로 수리하자고 했다. 자기 방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결정적으로 원하는 색으로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 그중 제일 중요한 작업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각자 자신이 원하는 색으로 페인트를 칠하게 해 준 아빠였던 그는 새로운 막내딸에게도 그것을 똑같이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내 집이 생기거든 햇살 같은 노란 방을 만들 거예요.
너무나 신기했던 것은, 그보다 며칠 전에 딸이 방의 페인트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독립해서 진짜로 자기 집이 생기거든 - 벽에 못질하거나 손 대면 안 되는 셋방살이 말고 - 방 하나는 햇살 가득한 느낌이 드는 노란 페인트를 칠하고 싶다는 말을 했었던 것이다. 일종의 버켓 리스트 같은 것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던 남편이 페인트 이야기를 꺼냈고, 딸은 생각지도 않게 자신의 막연한 희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무슨 색을 원하느냐 물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노랑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그것과 어울릴만한 색은 뭐가 있지? 문도 칠해야 하고, 아래쪽 걸레받이랑, 붙박이 장까지 커버할만한 색으로 뭘 선택할까 딸은 고민을 이리저리 해 보았다. 밤색? 잘 어울리겠지만, 기껏 환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다시 침침한 느낌을 얹어주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했다. 그러면 흰색? 흰색은 모든 색에 다 잘 어울리니까 괜찮을 듯. 그러나 어쩐지 약한 느낌이다. 그렇게 해서 딸이 선택한 색은 코랄이었다. 분홍도 아니고 빨강도 아닌 그 중간 어디메쯤 있는 색상. 그러나 목재로 된 부분을 모두 코랄로 칠하면 너무 강할 거 같은 느낌이고...
우리는 함께 페인트를 사러 나갔다. 아이는 열심히 색을 골랐고, 선택의 폭은 상당히 넓었다.
그렇게 해서 골라온 색은 바로 이렇게 개나리 같은 노란색에, 코랄에, 백곰 같은 흰색이었다. 칠했을 때의 분위기가 어떨지 봐 가면서 마음을 정하기로 하고, 각각 1통씩 샀다. 그리고, 간 김에 복도에 바를 흰색도 같이 사 왔다. 그래서 페인트가 4개...
남편은 당장 작업에 착수하고 싶었고, 그래서 밤중에 벽에 붙은 띠벽지부터 떼어내기 시작했다. 자야 하는데 말이지... 그리고, 칠을 하려면 가구를 바깥으로 끌어내야 하고... 이 색의 벽에는 이 서랍장의 색이 어울리지 않으니, 옆방에 있는 것으로 바꾸면 더 잘 맞겠다... 그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러다가 문득 남편이, "옆방이 더 넓은 데, 그쪽으로 옮기면 어떨까?"라고 말을 꺼냈다. 그 방은 둘째 아들이 쓰던 방이었는데, 사실 더 넓기도 하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 그의 짐이 많이 남아있었고, 사실상 양조 재료 등 많은 물건들을 넣어두는 창고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면 그 많은 짐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과, 아직 비울 준비가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이유들로 결정은 잠시 보류되었다. 딸은, 처음에는 방의 크기가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내, 이왕이면 넓은 방이 좋을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정적 이유는, 그림 그리는 작업을 하고 싶은데, 방이 넓으면 이젤을 펼쳐놓고 그릴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며칠간의 망설임이 지나고, 우리는 결국 큰 방으로 옮기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는 바로 방 비우기 작업부터 착수했다. 남편은 둘째 아들에게 연락해서, 물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봤고, 그래서 비울 것과 보관할 것들로 나눴다. 남편은 뭔가 결정을 하면 바로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그래서 바로 방의 모든 가구들을 싹 비웠다. 창문의 블라인드도 떼고, 전등갓도 떼고, 벽장 안의 가구도 다 비웠다. 덕분에 거실과 복도에 물건이 넘쳐나게 되었다.
이 방은, 딸이 원래 머물던 방의 두배 정도 되는 사이즈이고, 벽에는 띠벽지가 없는 대신 구름 그림이 있었다. 그 위에 노란색을 칠하면 너무 비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우려도 있었지만, 어차피 여러 번 칠할 거니까 괜찮을 거라고 했다. 방에 칠을 하기 전에, 못 박았던 자리들을 퍼티로 채우고, 천장 닿는 부분의 부실한 부분은 좀 더 두꺼운 재료로 남편이 막았다. 그리고, 퍼티로 우툴두툴 해진 부분을 샌드 페이퍼로 문질러서 평평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페인팅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바닥에 안 쓰는 천들을 깔아서 카펫을 보호하도록 준비한 후, 먼저 천장 근처와 모서리를 붓으로 칠했고, 그게 마른 후에, 그 위에 롤러로 칠을 했다. 방이 서서히 노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치던 푸른빛도 2회, 3회 칠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4면을 모두 칠할까, 아니면 일부만 칠할까 물었었는데, 딸은 단호히 4면을 다 햇살 같은 색으로 칠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방은 노랗고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페인트를 칠하면, 원래 생각했던 색보다 진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라며, 그래서 더 연한 색으로 골라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고른 색은 정확히 그 색의 느낌이 그대로 나왔다. 딸아이는 이미 컴퓨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방의 모습을 그려봤었고, 그것과 얼마나 흡사하게 나오려나 궁금해했었다. 결과는 만족! 딱 그 색! 놀랄 만큼 햇살 가득한 방이 되었다.
노란색 작업이 끝나고, 몰딩을 칠 할 순간이 왔다. 원래는 몰딩을 먼저 칠한 후, 조심해서 벽을 칠하는 것이 순서라고 했지만, 우리는 방의 분위기를 본 후에, 정말 코랄로 가야 할지를 결정하겠다고 해서, 결국 몰딩을 나중에 칠하게 되었다. 남편은 출근을 했고, 나는 딸과 함께 몰딩을 칠했다.
먼저 벽 부분에 마스킹 테이프를 꼼꼼히 둘러줬다. 행여라도 다시 노란색 벽에 붉은색이 묻지 않도록 말이다. 그런데 테이프를 붙이면 쉽게 칠해질 줄 알았던 구분선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테이프를 너무 꽉 눌러서 붙이면 나중에 뗄 때 노란색까지 떨어질 수 있는데, 반대로 너무 살짝 붙이면 그 사이로 붉은색이 새들어간다. 그리고 다 마른 후에 테이프를 뗄 때에도 조심하지 않으면, 페인트가 다시 벗겨져버린다. 역시 세상에 호락호락한 일 같은 것은 없다는...
이틀에 걸쳐 벽장의 테두리를 먼저 다 칠하고 나서 보니, 노랑과 코랄의 조화가 생각과 다르게 나타났다. 어쩐지 좀 코랄보다는 약간 주황빛이 도는 것처럼 보여서 엄청 당황스러웠다. 그러다가 보니, 낮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불빛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구를 주광색에서 백색으로 바꿔봤더니 다시 처음 생각했던 색으로 돌아왔다. 딸이 내던 안도의 한숨, 하하하!
그렇게 해서 나머지 몰딩이 다 페인팅이 된 이후, 벽장 안쪽의 흰색을 칠했다. 벽은 남편이 결국 다 칠했기에, 이 내부의 흰 부분은 딸과 내가 칠하기로 했다. 한 밤중에 붓질을 하고, 롤러를 밀고, 장난스레 작업을 하면서, 색이 바뀌어갈수록 함께 바뀌어가는 방의 분위기에 새삼 탄성을 내뱉으며 좋아하곤 했다.
벽장을 칠하고 나서는 문도 칠했다. 벽장 안과 벽장문, 방문은 흰색을 선택했다. 백곰 색상이라고 이름 붙은 약간 크리미 한 흰색이었는데, 나머지 색들과 잘 어울렸다.
이제 칠은 다 끝났고, 벽장 내부를 설치할 시간이 되었다. 남편은 아이의 주문에 따라서 설계를 했다. 손이 쉽게 닿는 선반도 있으면 좋겠고, 그렇지만 옷도 걸 수 있기를 원했다. 공간을 최대한 살리는 디자인으로 고민 끝에 설계가 완성되었고, 우리는 함께 나가서 가구를 만들 목재를 사 왔다. 쇼핑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떤 나무를 하는 게 좋을까 등을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소중했다. 우리는 침대를 만들었던 것과 같은 뽀얗고 예쁜 나무를 사 왔다. 그리고 남편은 순식간에 아이가 희망하는 대로 모양과 간격을 맞춰서 벽장의 칸들을 설치했다.
빨리 완성하고 싶은 마음에 샌딩을 안 했더니 약간 거친 느낌이 났다. 그러자 남편이 출근한 사이에 딸내미가 완전히 샌딩작업을 했다. 한참을 방 안에서 이리저리 하면서 다듬느라 시간을 보냈다. 샌드페이퍼를 단계별로 바꾸며 꼼꼼히 작업했고, 그러느라 완전히 톱밥먼지를 뒤집어썼는데, 방역 마스크가 유용한 순간이었다! 어찌나 정성껏 작업하던지! 자기 방을 직접 꾸미는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그렇게 샌딩이 끝난 후에 남편이 벽장 내부를 완성하였다. 지지대를 세우고, 위에 선반을 두 개 올리고, 옷걸이도 설치했다. 원래 있던 옷걸이 봉이 워낙 오래된 것이어서 새것으로 갈았는데, 어찌나 뽀샤시하던지!
원하는 대로 색상이 칠해졌고, 벽장도 아이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 이리저리 고민하던 때와 달리, 막상 달라붙어서 하니 일주일 안에 모든 작업이 다 끝났다. 남편은 워낙 꼼지락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빨리 끝내고 싶어 했고, 우리는 서로 손발이 잘 맞았다.
이제 완성이 되었으니 가구를 넣어야지! 옷장과 책장은 흰색이었고, 책상과 침대는 나무색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다 잘 어울렸다. 아이는 입이 귀에 걸렸다. 옆방에 있던 물건들도 부지런히 옮겨왔다.
다 들여놓고 책상 앞에 앉으니, 무슨 촬영용 세트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통 노란 방. 아이가 먼 미래로 꿈꾸던 방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방이 변해가면서 아이는 신기하고 재미있어했으며, 방이 완성되자 무척 마음에 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외동딸이었기에 자기 방을 일찌감치 가졌었지만, 이렇게 자기 방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칠하고 계획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특별했으리라.
남편은 조명이 마음에 안 드니,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고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구를 들여놓은 다음 날, 남편이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던 그 사고. 남편을 그렇게 드러누웠는데,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는 와중에도 그는 몇 번이고 이렇게 말했다.
"사고 전에 아이 가구를 옮겨서 이사를 시켜놓았기에 천만다행이야!"
물론 그렇겠지. 남편 성격에, 다 만들어놓은 방에 가구를 못 넣어서 아이가 못 들어갔다면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그렇게 반복적으로 말했고, 우리 모두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그래서 방의 마무리는 미뤄졌지만, 아이는 원하는 전등을 선택해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할 수 있게 되자마자 우리는 아이가 찜해놓은 전등을 함께 사러 갔었다. 막상 처음에 찜했던 전등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또 하나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크기도 딱 적당하고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독특했다. 그러나 전등만 찾았지 맞는 전구를 찾느라 해를 넘겼고, 결국은 새해 들어서야 전등을 새로 달았다.
가구의 대부분이 이케아 물건이었는데, 전등까지 이케아 대표 전등을 달고나니, 이 방은 이케아 전시실 같았다. 벽에는 아이가 원하는 보드를 붙여서 필요한 물건들을 꽂을 수 있게 했고, 결국 거울까지 같은 회사 것으로 구입하여 방이 마무리되었다. 완성!
마지막 거울 설치의 에피소드라면, 뭐든 말끔히 정리하는 남편의 성격이 한몫했다. 포장을 풀자마자 얼른 겉의 포장 박스부터 갖다 버렸는데, 설명서를 펼쳤더니 포장 박스를 버리지 말라는 표시가 확실하게 되어있었다! 하하! 남편은 그래서 얼른 나가서 다시 박스를 들여오고 우리는 한참 웃었다. 그 포장박스를 기준으로 벽에 설치할 구멍을 뚫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방이 완성되었고, 아이는 그 방을 정말 자기 방이라고 여기며 하루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며 행복해했다. 몇 번이고 방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고 또 말했다. 노란색 화사함으로 가득 찬 방은 아이의 마음을 많이 밝게 만들어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방을 두고 떠난다는 마음이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또한 이 방이 이렇게 있기에, 집이 생겼고, 또 돌아올 수 있는 나의 공간이 있다는 믿음이 생겨서 덜 힘들게 떠날 수 있었으리라.
처음부터 끝까지 온 정성을 들여준 남편에게 너무나 감사한다. 그의 마음은 방을 예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방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집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었다. 떠돌이가 아니라 갈 곳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표는 성공이었다. 아이에겐 진짜 자기 방이 생겼으니까. 햇살처럼 노란 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