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살부터 경쟁이 시작된다.

by 라슈에뜨 La Chouette

우리는 홈스쿨링은 꿈도 안 꾸고 있었고, 아이 아빠의 회사 파견으로 잠시 나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치열한 한국 학교가 아닌 자유로운 미국 학교가 부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결국, 거기에 남지 못하고 아쉬움만 남긴 채, 아이가 유치원도 가기 전인 나이에 귀국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홈스쿨링에 대해서 잊어버렸고, 아이는 유치원에 잘 적응하였다.


그나마 몇 단어 배운 영어는 한국어로 떠들기 시작하면서 빛의 속도로 잊어버렸다. 오히려 아이가 혀 꼬부라진 영어 발음을 하면 사람들이 귀엽다고 깔깔 웃었더니, 그게 부끄러워서 아이는 영어를 아예 안 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아깝다며 집에서라도 영어를 써보라고도 했지만, 한창 말 배우는 나이에 우리말이라도 편하게 실컷 하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핑계였고, 나 역시 그렇게 끄달리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유치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편안했다. 사교적인 아이는 어디 가든지 잘 적응했고, 선생님들도 다 예뻐하였다. 오지랖이 넓은 아이라서 학기 끝날 때면 종이 접기라도 해서 선물을 돌리는 성격이다 보니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교육은 좀 획일적인 면이 있긴 했어도,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나는 아이가 없는 시간 동안 내 자유를 누리며 돌아다닐 수도 있고 아주 좋았다.


아이는 수학 쪽으로는 좀 빠른 것 같았지만, 언어는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6살이 되면 한글을 익힐 수 있다 했기에 나는 집에서라도 좀 앉혀놓고 글자를 가르쳐 보려고 시도를 해봤다. 그러나 아이는 도통 알아듣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만 엄마가 읽어주는 책을 즐길 뿐, 별로 글자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몇 번 더 시도해보다가 그냥 포기해버렸다. 서로 스트레스만 쌓일 일은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고, 다 때가 되면 하겠지 하는 귀찮은 마음도 들었다. 집에서 글자도 못 가르치면서 무슨 홈스쿨링을 하겠는가? 나는 그쪽은 정말 꿈도 꾸지 않았다.


아이는 7세 반으로 올라가면서 유치원에서 글자를 배워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글을 읽기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빠르게 받아들였고, 어느샌가 6세 반 교실에 내려가서 동생들에 책을 읽는 자원봉사를 스스로 시작했다고 유치원 선생님들께서 깔깔 웃으며 소식을 전해주셨다. 굳이 안 되는 것을 나이가 되었다고 억지로 주입하려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우치는 순간이었다.


사실 유치원 교육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곳이어서 가깝다는 이유로 보냈는데, 딱히 뭔가를 배워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즐기며 다니니 그만하면 충분하다 싶었다. 하지만 좀 불편한 일도 있었다. 미술대회를 하였는데, 아마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그린 그림을 대회장으로 보내면 거기서 선출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딸아이의 그림이 마음이 들었던 선생님은 아이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싶어서 그림에 손을 대었다. 바닷속을 그리고 있었는데, 해초를 이렇게 그려야 더 그럴듯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이는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했고, 그래서 다시 그리기로 하였는데,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하였다. 어차피 버릴 그림이니까 이 그림을 옆자리 친구에게 주자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의 이름을 달고 제출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딸아이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고, 그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억지스럽게 유치원의 수상 성과를 올리겠다는 그 행위가 그런 교육현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이었지만, 아무래도 유치원에서는 학부모들의 입김이 센 관계로 추후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아이 역시 금방 잊어버린 것 같았고, 여전히 유치원을 재미나게 다녔다.


그렇게 2년의 유치원 생활을 즐겁게 마치고,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른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그때 인천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전학은 아니지만, 새로운 지역에 아이를 등록해야하므로, 학교에 신고서를 내러 갔다. 그곳에서 담임 선생님을 미리 만났는데, 다정하고 예쁜 젊은 여선생님이었다. 6학년 담임을 맡았다가 1학년을 처음 맡는다는 선생님 인상이 너무 좋아서 마음이 놓였고, 모든 것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는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젊은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무척이나 귀여워하셨고, 아이도 용기 있고 씩씩하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나도 다른 엄마들과 어느 정도 교류를 하기도 하면서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부분에선가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 아이들과 함께 협동하면서 뭔가를 배워 나가고 꿈을 펼쳐 더 큰 물에서 놀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하였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내가 학교 다닐 때에 비하면 학급당 아이들의 수는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은 교실에 아이들은 한 명의 교사가 감당하기에 많은 수였으며, 그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경쟁이 시작되었다. 스티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그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서 모든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또박또박 예쁜 글씨를 쓰던 아이는, 정신없이 휘갈긴 글씨로 알림장을 순식간에 써 내려가 스티커를 획득하고 기뻐했다. 종합장 같은 노트에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수업이 있었는데, 그 공책을 열어보고 나는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정말 영혼 없는 노트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주어진 작은 모티브를 이용한 그림을 그려야 했기에 성의 없는 빠른 손놀림으로 색연필로 끄적거렸다는 것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림을 열 장 그릴 시간에, 좀 더 생각하고 느끼고, 즐기고, 다듬는 그림을 한 장만 그리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게 정해진 커리큘럼이었으리라.


별 볼일 없는 그 스티커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아이들은 더 많은 스티커를 위한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은 무엇을 위해 경쟁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경쟁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물론, 그 경쟁의 뒤에는 엄마들이 있었다. 1학년 초, 아이를 데리러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아이가 나오자, 그 아이의 엄마는 순식간에 아이의 가방을 열고는 뒤적였다. “오늘 받아쓰기 몇 점 맞았어?” 하고 따지듯 묻더니, 이내 결과물을 쳐다보며 충격을 받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손에 든 핸드폰으로 남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 우리 아이가 오늘 받아쓰기에서 하나 틀렸어! 어떡하지?” 나는 정말 충격적으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무섭기까지 했다. 그 엄마에게는 그게 정말 그렇게 중요했을까? 이것은 현실이 아닌 무슨 시트콤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받아쓰기 점수에 목을 매고,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게 하려고 미술학원에서 미리 준비 그림을 그리게 하고, 원어민 영어학원에 보내고...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초등학교 때의 학교 성적은 대학 입시할 때 내신 성적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사생대회 결과도 입시원서에 써넣을 수 없는 항목인데도 그게 왜 벌써부터 그렇게 중요할까?


하지만, 내가 다른 엄마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봤자, 내가 하는 이런 이야기는 그저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 집 애는 잘하잖아! 야무지고, 똘똘하고!” 하지만 애들이 야무져봐야 얼마나 야무질까. 어차피 다 어리바리하다. 당시에는 성적표에 등수 같은 것이 없었는데, 엄마들은 어떻게 해서인지 등수도 다 알고 있었고, 누가 공부를 잘하는지, 어느 집 아이가 상을 탔는지 등등을 다 알고 있었다.


나는, 뭔가 "이건 아닌데..." 같은 생각을 계속하면서도 홈스쿨링에 대해서는 이미 까맣게 잊은 상태였기에 다른 방도 없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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