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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Jul 31. 2021

잔디를 잠들게 하라

긴 가뭄에 조금씩 양보하여야 하는 현실

밴쿠버에 긴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레인쿠버(Raincouver)라고 불릴 만큼 비가 늘상 오는 이 지역에서 오늘까지 연이어 45일 동안 비 구경을 못했으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밴쿠버 공식 가뭄 기록이 1951년의 58일이고, 그다음에 1986년에 53일이라고 하니, 지금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간에 가끔 비 예보가 있곤 했지만 비 없이 지나가곤 했고, 이번 일요일에도 잠깐 비 소식이 떴었는데, 오늘 보니 사라져 버렸다. 비구름이 오다가 도망을 가나보다. 마당에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줄곧 비 오고 추운 작년 같은 날씨보다는 반갑지만, 물 주는 것도 아주 일이다. 아침에 나가서 앞 뒤 마당에 물 다 주면 두 시간은 그냥 간다. 


날이 너무 뜨겁던 어느 날, 호스도 망가졌다. 마치 불에 달군 듯이 녹아서 부풀어 오르더니 이틀 후에 찢어져서 새기 시작했다. 산지 한 달밖에 안 된 것인데 이리되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호스를 들고 가서 반품을 하고 새로 구입하려니 그쪽 코너가 텅텅 비어있었다. 판매원 말로, 급수 관련 제품은 모두 품절이라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온라인 쇼핑몰에서 원하는 호스를 판매하는 곳이 있어서 허둥지둥 주문을 했다. 뒷마당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제품인데 마음에 쏙 들어서 같은 것으로 샀다. 처음엔 남편이 너무 비싼 것을 샀다고 놀랐다가 완전히 마음에 들어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가볍고 편한 것으로 사용하자 싶어서 이번엔 내가 질렀다.


색이 같다고 같은 제품이 아니다! 가격보다 품질이 훨씬 차이 나는 물건


날이 이렇게 건조하니 사방에서 산불이 발생되고, 얼마 전에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타버리는 끔찍한 일도 발생했다. 눈앞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모습이 뉴스에 나오는데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화재 발생원인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지나가는 기차의 선로에서 튄 작은 마찰이 불씨가 되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그만큼 화재 직전의 완전 가뭄상태가 이어지고 있어서 작은 스파크까지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물론, 이 기간에는 캠핑족들도 산에서 캠프파이어가 금지되어있다. 벌금이 1인당 100만 원이 넘는데,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안전을 위해서 꼭 지켜야 할 사항인 것이다. 


이렇게 폭염에 가뭄이 이어지면서 잔디밭에 물 주기 규제도 강화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요일을 정해주고, 정해진 시간 동안 스프링클러만 돌리라는 안내문이 들어왔고, 오늘은 아예 잔디가 여름잠을 자게 하라(let your lawn go dormant over the summer)는 글이 떴다. 나도 한동안은 잔디를 살리려고 물을 열심히 줬지만 이미 포기한 지 꽤 되었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없으니 앞마당 잔디는 진작에 누렇게 떴다. 뒷마당은 그래도 그늘이 지는 시간이 많아서 그보다는 훨씬 낫지만 역시 여기저기 역시 누렇게 되었다. 


꽃 있는 쪽만 물을 주니 그 근처만 약간 푸르다. 꽃도 낮에는 기진맥진 상태다


사실 잔디 유지가 공이 많이 드는 일이다 보니 저렇게 되는 것이 안타깝지만,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할지 생각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생기고 물이 부족할 때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오이 밭에 물을 안 줄 수는 없으니 잔디가 양보하는 것으로...


열심히 물 준 덕에 수시로 이렇게 수확을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장미는 신났다. 봄철에 비 올 때에는 흰가루병도 생기고 진딧물 생겨서 고생하더니, 폭염 오면서부터 향기롭게 피어난다.  세상은 역시 늘 공평한가 보다. 까탈스러운 장미가 웃어주니, 잔디가 울고 있구나.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면 다시 일주일에 8일간(정말 이렇게 느껴진다!) 비 오는 날씨가 찾아올 것이고, 잔디는 여름잠에서 깨어나 다시 푸르름을 되찾을 것이다.


우리 사람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 때에는 긴 잠에 들어갔다가, 다시 상황이 여의로울 때 깨어나서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으면... 비록 우리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들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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