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허락하는 날까지 사랑하기
살다 보면 유난히 애착이 가는 물건이 있다. 사실 나는 상당히 놓아버림에 강한 사람이다. 뭔가를 잃었을 때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냥 거기서 인연이 끝났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마무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물건이 비싼 것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물론, 써 보지도 못한 비싼 물건을 날리게 되면 속이 쓰린 것은 인지 상정이다. 본전 생각이 나니까...
작년에 파리 방문을 계획했다가 비행기 파업으로 무산되면서, 거기에 미리 계산했던 호텔비를 그대로 날렸을 때 무척 속이 상하긴 했다. 파리 못 가게 된 것과 그 숙소 비용 날린 것 모두가 타격이었다. 더구나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서 나름 거금을 들여서 지불했던지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덕에 남은 시간을 여유 있게 시칠리아와 로마에서 보내겠다고 하루 만에 마음을 접었다.
내가 놓아버림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이십 때부터였다. 애착이 심하다 못해 의처증 증세가 강한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가 헤어지면서 과연 애착이란 무엇일까를 참 많이 고민했었다. 그러다가 법정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게 되었고, 내가 구입한 것이나 선물 받은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체의 일부도 절단되어 내게서 떨어지면 나와의 인연이 끝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지금은 내 손 끝에 달려있는 손가락이지만, 잘려나가서 나와 떨어지면 다시 나의 일부가 될 수 없고, 치과에 가서 이를 뽑으면 그 이는 더 이상 내게 쓸모가 없다. 거기에 이르고 나니 나는 이별이 훨씬 쉬워졌다. 사람과의 인연도 그렇고, 물건과의 인연도 그렇고 나와 인연이 닿는 순간까지만 최선을 다 하자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내 삶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잃은 것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편하다.
그런 반면 나는 상당히 애착이 강한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고, 그만큼 내게 주어진 것들만큼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다. 물건도 버리지 못해서 오만가지를 다 끌고 다닌다. 아직도 30년 전 원피스를 입고, 낡은 물건도 더 쓸 수 있을 때까지 써 보자며 궁상 떨기 선수이기도 하다. (이번 허니문 때, 여행용 칫솔 커버의 잠금장치가 고장 나서 머리고무줄로 동여맸더니 남편이 어찌나 놀리던지!)
물건에 애착이 더해지는 것은 어떤 사연이 있을 때 더 그렇다. 이번 허니문 전에 딸아이를 보러 엘에이에 잠시 갔었다. 이사를 도와주기도 했지만 함께 나가서 외식도 하고, 쇼핑도 했다. 엄마와 딸이 함께 쇼핑하는 것은 남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우리는 비싼 상품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주로 아웃렛 매장에 다닌다. 일반 아웃렛도 아니고 제일 마지막 단계인 종합 아웃렛 매장인 TJ Maxx가 우리의 단골 가게다. 둘이 가면 이것저것 실컷 입어보고 놀면서 쇼핑한다. 그릇도 사고, 옷도 사고... 그리고 지난번에는 딸한테 여름용 긴팔 셔츠를 사주려고 했는데, 막상 딸이 이 셔츠를 집어 들더니 엄마 입어보라고 하고는, 여행 가서 입으면 딱 좋겠다고 사 주는 게 아닌가? 이제 막 대학 졸업해서 취직한 딸에게 받는 선물은 엄마에게 무척이나 특별했다.
그리고 그 이유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나에게 아주 잘 맞았다. 사이즈도 그렇고, 어울리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얇고 시원하고, 아무렇게나 넣어도 구김이 가지 않아서 여행 초반에 정말 유용하게 잘 입었다. 노르망디는 날씨가 그리 덥지 않아서 쌀쌀한 저녁에도 딱 좋았다.
그런데 그만... 파리에서 베니스로 이동하면서 어딘가에 이 셔츠를 흘리고 말았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분명히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진들을 뒤져보니 들고 이동하고 있었다. 베니스에 도착해서 짐 풀고 나서야 알았으니 뒤늦게 공항에 연락을 해볼 수도 없고, 사실 아무 방도가 없었다. 딸에게 얘기하고 미안하다 했더니, 옷이야 또 사면되는 거고 마음 쓰지 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이 옷은 그렇게 쉽게 포기가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점점 더 뜨거운 곳으로 여행을 다니는데 해 막이 할 셔츠가 없으니 그 옷이 한없이 아쉬웠다. 여행이 한 달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짐을 최소화했고, 긴팔 셔츠는 딱 그거 하나였다.
베니스에서도 로마에서도 소렌토에서도 그리고 시칠리아에서도 우리는 계속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마땅한 셔츠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너무 크거나, 너무 비치거나, 너무 두껍거나... 입맛에 맞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셔츠는 끝까지 사지 못했고, 우리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밴쿠버에서는 더 이상 그 셔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어쩐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만한 셔츠를 못 찾을 거 같다고 딸에게 하잠깐 하소연을 했던가?
며칠 후 딸아이에게서 문자와 함께 셔츠 사진이 왔다. "엄마, 이거였어요? 비슷해 보이는데..."
색은 다르지만 같은 시리즈의 셔츠인가 묻고 있었는데, 나는 마침 저녁 준비 중이었고, 불에 뭔가 올라가 있어서 허둥지둥 대충 봤다. 같은 셔츠는 분명히 아니었지만, 그냥 그걸로도 대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했더니, "그런데 이건 폴리 100%이네요"라는 답변이 다시 왔다. 나는 폴리에스터 셔츠를 원래 사지 않는다. 전에 것은 아마도 레이온이 섞인 뭔가 다른 소재였던 거 같은데 사실 정확히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나네." 그렇게 말하고는 저녁 준비하느라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다음 날, 딸에게서 이 사진이 도착했다.
매장 피팅룸에서 입어보고 인증샷 찍은 것이다.
사실 내가 좀 더 성의 있게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딸아이는 쉽게 포기가 안 되었던 거 같다. 엄마가 아쉬워하는 게 그렇게 마음에 걸린 거겠지. 정식 매장도 아니고 아웃렛 매장에 있는 물건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마는 딸.
그렇게 애착이 남아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아직 인연이 끝나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어쩌면 딸의 세심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서 잃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하며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