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여자들의 추석 로망이었다는 주장으로 우기다가 영주권이 빨리 배달된 덕분에 국경을 정말 넘어도 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딸에게 영주권 소식을 전하면서 국경을 넘을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잠시 후 문자가 왔다.
만약에 제가 주말에 시애틀 간다면 두 분 내려오실 수 있으세요?
그냥 불가능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딸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딸은 올해 미국 대학을 졸업하고 OPT 비자로 일 하고 있다. 이 말은, 학생 비자가 끝나서 출입국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이고 다만 1년간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함부로 출국하지 말기를 이민국에서 권하는 입장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미리부터 다니러 올 계획을 세웠을 텐데... 아이는 이 비자 문제 때문에 지난 6월 말에 있었던 엄마의 결혼 파티에도 오지 못해서 아이패드로 대신 참석했었던 아픔이 있었다.
갑자기 눈이 반짝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추석 때 아이를 부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우리가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뭔가 길이 열린듯한 느낌이랄까?
그러나 상황은 곧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비행기표가 너무 비싼거다. 평소 같으면 170불이면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날짜가 코 앞에 있으니 자그마치 3배의 가격을 줘야 했다. 꼭 그 돈이 당장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식으로 쓰다 보면 돈이 남아나기 힘들기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그래, 단 주말 보자고 그 돈을 들여서 오는 것은 낭비야. 차라리 10월에 있을 연휴에 움직이는 게 낫지. 다음 달에는 미국 콜럼버스 데이가 우리 땡스기빙데이랑 맞물리니 그렇게 움직이기 딱 좋겠다고 생각해며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시가를 피우던 남편이 어찌 되었냐고 묻길래 그냥 다음에 다시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아이 보고 싶어?" 당연하지. 늘 보고싶은 게 자식인걸. 게다가 추석이니 아이 좋아하는 송편이라도 먹이고 싶은 게 엄마 마음이다. 그런 나를 보더니 그럼 표를 사라고... 잠시 멍 했는데, 딸아이에게 직접, 일단 표를 지르라고 말했다.
남편은 평소에 참 알뜰한 사람이다. 슈퍼에서 물건 살 때에도 꼼꼼히 가격 비교해보고 구입하고, 허튼 물건은 사지 않는데, 이럴 때는 완전히 기분파이다. 남편의 신조는 그거다.
뭣이 중헌디!
만일 한국 사람이라면 정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상황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추석이고, 아이는 그곳에서 쓸쓸할 거고, 엄마는 아이 때문에 마음이 쓰일 것이다. 그러면 만나지 않는다 해도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 주말을 보낼 것이다. 어쩌면 나중에 후회하며, 그냥 그때 볼 걸... 이럴지도 모른다. 2년 전인가 크리스마스 때 아이와 떨어져 지내면서, 눈물 흘리고 후회했던 기억이 난다.
돈을 아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써야 할 때 쓰는 것도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 늘 결정이 어려워 망설이는 나와 달리 남편은 꽂히면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다. 지난 딸 생일 때에도 나를 아이에게 보내줬었고, 이번 신혼여행도 그의 결정 덕분에 이루어진 일이다.
아이의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 나왔고, 나도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갑자기 분주해졌다. 갈 준비를 해야지. 얼른 호텔도 잡고, 주말 동안 해야 할 일들도 처리하고, 남편은 어느새 아이에게 줄 선물을 챙겼다. 허니문 간 사이에 샀던 아이 선물에다가 카드를 얹어서, 내가 바쁜 사이에 다 포장을 해버렸다.
그리고 나는 오늘 송편을 빚었다. 비트 삶은 물과 쑥으로 물을 들이고, 콩과 깨를 넣어서 부지런히 빚었다.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송편을 좋아하는 아이, 엄마가 만든 송편만 먹는 아이를 생각하며 남편이 어제 마당에서 따다 준 솔잎을 얹어서 쪘다. 아이는 회사 점심시간에 전화를 걸어, 자기가 엄마 뭐 가져다줄 거 없느냐며, 지난주에 산 셔츠를 어제 부치려나 못 부쳤는데 선견지명이 있었나 보다며 좋아했다.
이제 만나러 간다. 나도 올해 추석은 제대로 보내는구나! 이 만리타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