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기운 으슬으슬할 때 한잔?
내가 종종 오마이뉴스에 기고를 하는데, 나는 자칭 먹방 담당 기자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먹고사는 재미난 이야기들을 올리다 보니 그게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서, 먹거리에 대한 기사 요청이 종종 들어온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안 그래도 뭔가 크리스마스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뱅쇼에 관해서 한번 써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음... 뱅쇼(vin chaud). 솔직히 내가 좋아하지 않는 술이다. 아니 딱 한번 입 대보고 그냥 내려놓은 것이 내 경험의 전부였다. 그 이유는, 너무 달아서였다. 친구들과 겨울에 어느 카페에 들어갔는데, 추천 메뉴로 있길래 호기심에서 주문을 했다. 사실 나는 모르는 음식 먹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향기롭고 따뜻한 와인이라는 말에 호감이 갔는데, 웬걸, 내 입에는 설탕물 같았다. 물론 카페들마다 레시피가 다를 것이다. 그 카페가 유난히 달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설탕을 끊은 지 오래되었다. 가끔 조금씩 달콤한 디저트를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특히, 본식과 술은 달면 정말 싫다. 어쩐지 본연의 자세를 잃은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뱅쇼에 대해서 써달래. 그런데 나는 뱅쇼가 달아서 싫어."
남편은 뱅쇼가 뭐냐고 물었다. 음, 뱅쇼를 모른다고? 술 좋아하는 사람이? 그러나 내가 설명을 하자 바로 알아들었다.
"아, 멀드 와인(mulled wine) 말하는 거구나. 그게 왜 달아?"
안 해 먹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예전엔 크리스마스 때 종종 해 먹었다는 것이다. 물론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서 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남편도 단 술을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에 설탕을 넣고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럼 나도 먹을 수 있겠네!"
뱅쇼(vin chaud)는 불어로 따뜻한(chaud) 와인(vin)이라는 뜻이다. 영어 이름의 mulled는 이렇게 향신료를 넣어 뭉근히 우려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두 언어의 의미를 합치면 이 와인의 뜻이 잘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술을 먹는 것은 사실 동서양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겨울철에는 청주나 막걸리를 데워 먹기도 했고, 일본의 정종은 원래 따뜻한 술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도 꼭 와인뿐만 아니라, 럼주나 애플 사이다, 심지어 시원함의 상징인 맥주를 데워 먹기도 한다.
추운 날씨에 머그컵에 따끈한 와인을 먹는다면 몸이 잘 데워질 것이다. 거기에다 향신료까지 넣어서 먹는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향신료는 약성도 있어서 실제로 몸을 따뜻하게 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주버님은 젊었을 때, 몸이 으슬으슬하며 컨디션이 떨어지면 핫 버터 럼(hot buttered rum)을 만들어 마시곤 했다고 한다. 따뜻한 술은 추울 때 이렇게 제격이다. 감기 걸리면 소주에 고춧가루 뿌려서 먹는다는 옛 말도 생각나는데, 실제로 체온을 올려줘서 면역력을 상승시켜 주기도 한단다. 하하! 믿거나 말거나!
내가 뱅쇼 레시피를 물으니 남편이 고개를 저었다. 정해진 레시피가 없다는 것이다. 뱅쇼에 들어가는 향신료는 그야말로 엿장수 맘대로다. 자신이 좋아하는 향으로 넣으면 되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하는 레시피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된장찌개 끓일 때 레시피를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된장찌개에는 된장이 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내용물은 집집마다 너무나 다르다. 두부를 넣기도 하고, 고기를 넣기도 하고, 감자나, 호박이나, 버섯 등등, 그 양과 종류는 정말 다양하지 않은가! 걸쭉하게 끓이기도 하고, 좀 멀겋게 끓이기도 하고...
이 뱅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넣어서 우려낸다. 가장 기본인 와인에 몇 가지 향신료를 넣고 뭉근하게 데우는 것이다.
향이 강하길 원하면 향신료의 개수를 늘리거나 더 많은 종류를 사용해도 좋다. 월계수 잎을 쓰기도 하고 넛맥을 넣기도 한다. 과일향을 원하면 과일을 더 많이 넣을 수도 있다. 체리나 복숭아 등이 들어가면 달큼한 향이 확 살 것이다. 배나 사과도 쓸 수 있고, 아예 주스를 넣기도 한다.
우리 식구들은 사용하지 않지만, 흑설탕이나 꿀을 넣어서 풍미와 단 맛을 살릴 수도 있다. 한국에서 만든다면 쌀조청을 넣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최대한 깔끔하게 하고 싶어서 재료를 많이 절제해서 사용하는 편이다. 사실 장을 봐서 만든다기 보다는 집에 있는 것들을 손에 잡히는 만큼 넣어서 만든다. 그럼 만들어볼까?
과일은 오렌지 반개만 쓰기로 했다. 오렌지는 깨끗하게 씻어서 껍질을 아주 얇게 까서 준비했다. 때론 마른 오렌지 필을 쓰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냥 편안하게 오렌지를 그대로 사용했다. 껍질의 흰 부분이 들어가면 쓴 맛이 나기 때문에 최대한 주황색 겉 부분만 사용한다. 오렌지 향이 더 들기를 원하면 나머지 오렌지로 즙을 짜서 넣어도 좋다.
와인은 완전 고급 와인을 쓸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맛없는 와인을 쓰면 안 된다. 맛없는 것은 뭘 해도 맛없기 때문이다. 과일맛이 풍부한 멀로(Merlot)나 카버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같은 것을 쓰면 좋다. 우리는 만든 지 오래된 멀로가 있어서 그걸 넣었다.
냄비에 와인을 붓고, 오렌지 껍질과 정향, 말린 생강, 팔각회향, 카다멈, 그리고 통후추를 넣어 중간 불로 가열했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팔팔 끓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알코올 성분이 다 날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글거리기 전 단계에서 불을 줄이고 뚜껑을 덮은 후 뭉근하게 우려 준다. 최소 15분, 시간이 많으면 좀 더 우려도 좋다.
와인을 우리고 있으면, 온 집안에 향기가 퍼진다.
이제 내용물을 걸러내면 완성이다. 간편하게 국자로 떠서 잔에 담아도 좋다. 와인 글라스에 담기에는 너무 뜨거우므로 찻잔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금방 먹지 않을 때에는 뒀다가 먹기 전에 다시 데울 수도 있다. 물론 이때에도 팔팔 끓이면 안 된다. 알코올이 너무 날아간 거 같으면 좀 쨍하라고 브랜디를 약간 추가로 넣어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뱅쇼의 묘미는 그 풍미에 있는 것이지, 취하자고 먹는 것이 아니므로 굳이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이제 따끈한 와인을 잔에 붓고, 양손으로 그 온기를 느끼면서 마시면 된다. 회향 때문에 약간 화한 느낌도 나고, 오렌지의 새콤함과 기타 향신료의 맛들이 다정하게 입에 스며든다. 와인의 맛은 희미해져서 색다른 느낌의 음료가 되었다. 입안의 맛보다 코로 들어오는 향이 더 좋았다. 다른 볼일 보느라 좀 오래 두었더니 이미 알코올은 많이 날아갔지만, 그래도 뱃속이 따끈해졌다.
겨울의 정취를 느끼고, 눈이 내린 창밖을 내다보면서 한 잔 한다면, 안전하고 따뜻해진 기분을 만끽하기에 딱 좋다. 추운 겨울이 한결 온화하게 느껴질 것이다.
재료:
와인 1병. 멀로(Merlot), 까버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같은 것들이 좋다.
오렌지 반개
정향 5개
말린 생강 2~3 조각
가는 계피 1개
팔각회향 2 개
카다멈 3~4개
통후추 4~5 개
꿀, 흑설탕, 메이플 시럽 등의 감미료 (단맛을 원할 경우에 사용. 맛을 보며 적당량)
취향에 따라 복숭아, 사과, 배 등을 함께 넣어도 좋음
1) 와인을 냄비에 붓는다.
2) 오렌지는 껍질을 얇게 까서 와인에 넣는다. (이때 흰 부분은 벗기지 않도록 유의한다.)
3) 오렌지 향이 더 진하게 나게 하고 싶으면 오렌지 즙을 짜서 넣어준다.
4) 나머지 향신료를 다 넣고 뭉근하게 우려 준다. 와인이 따뜻해지면 그때부터 먹을 수 있는데, 향이 더 우러나오게 하려면 오래도록 데워도 좋다.
★ 레시피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취향껏 다른 재료를 가감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