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면!
딸이 갔다. 딸은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집에 다니러 온다. 옛날에는 학교에 다니러 가는 거고, 집에 오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곳이 본 거처가 되었고, 여기 집에 다니러 오는 것이 되었다. 독립을 했다는 개념이 된 것이다.
비록 방 하나짜리 거처이지만, 아이의 공간에 아이의 물건들이 이제 제법 많아졌다. 방학 때마다 짐을 빼서 방을 비워야 하던 기숙사가 아니라, 돌아가면 내 집 같은 편안함이 있는 곳에서 아이가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보내는 마음도 예전보다 수월하다. 옛날엔 보낼 때마다 가슴이 참 아팠는데, 이제는 씩씩하게 격려하고 웃으며 보낸다. 그건, 아이가 아프지 않게 지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전날 딸은 짐을 싸고, 나는 옆에 침대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아빠 크리스마스 선물을 모조리 꺼내서 가방이 헐렁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방은 이미 넘쳐나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겨울 옷들이 범인이었다. 다들 부피가 크니, 작은 기내용 가방에는 몇 개 넣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 얼굴에 갈등이 비쳤다. 물건이 많지 않으면 소포로 부쳐줄까 싶었지만, 이런 스웨터는 부피가 크기 때문에 요금이 훅 올라갈 것이 뻔했다. 보아하니 이미 가져가기로 구겨 넣은 것들로 기내용 가방은 닫힐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가방 하나 부치지 그래? 30불이면 될 거야, 그 김에 짐도 좀 편히 싸고..."
나는 내가 내줄 생각이었다. 맨날 아끼고 쪼들리는 삶에 익숙한지라, 추가요금 내고 짐 부치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딸은, 가격을 듣고 보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좋다고 했다. 다만 가져온 가방이 없다고...
집안에 가방이 없겠는가. 지난번 한국 갈 때 끌고 갔던 기내용 중에서 크고 튼실한 것을 안겼다. 어차피 너무 큰 가방을 채울 만큼 많은 것을 가져갈 생각은 없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했다. 순식간에 그 가방이 가득 찼다.
온라인으로 짐 추가 비용을 내고 싶었으나, 딸아이는 유학생 비자로 입국하기 때문에, 서류확인이 필요해서 온라인 체크인이 되지 않는다고 떴다. 따라서 짐도 미리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사면 간혹 비용을 더 많이 받는 항공사들도 있긴 하지만, 그냥 감수하기로 했다.
소도시에 학교가 있는 관계로 밴쿠버에서의 직항은 꿈도 못 꾸는 아이는 최고 저렴한 표를 사다 보니 보통 세 번 정도의 비행기를 타느라 새벽에 떠난다. 이 날도 그랬다. 집에서 3시 반에 나가서 두 시간 전 공항 도착하니 4시 반이었다. 보통 밴쿠버 공항은 한산한 편인데 이날은 줄이 제법 길어서 당황스러웠다. 굽이굽이 늘어선 줄을 한참 기다려서 창구 앞에 섰다. 우리는 모두 피곤한 상황이었다.
직원에게 여권과 서류들을 보여주고 나서 아이는 짐 가격을 물었다. 무심한 듯 31불이라고 말한 직원은, 저울에 올린 가방을 흘끗 보더니, 잠시 후 데스크 앞으로 나와서 가방에 짐 표를 붙여줬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짐을 부치는 곳이 따로 있기에 저울은 창구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짐 표가 붙은 것을 보고는, "그럼 돈은 언제 어디서 내나요?"라고 딸아이는 당황한 듯 물었다. 나는 이미 지갑을 꺼내어 카드를 손에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직원은 "작은 가방인데요, 뭐."라며 쿨하게 말했다.
아무 조건 없이 짐을 무료로 실어준 것이었다. 물론 일반적으로 부치는 큰 짐에 비해서 무게도 반도 안 되는 것이긴 했지만, 규정으로 따지자면 똑같은 가격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맞았다.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그는 씩 웃으며, 좋은 여행 하라고 인사를 해줬다.
아빠는 딸더러 미모할인(beauty discount) 받았다고 껄껄 웃으며 놀렸다. 새벽에 부스스한 스타일로 미모 할인을 어떻게 받느냐며 함께 웃는 딸.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고단했던 마음에 보상을 받은 듯 기분이 좋아졌다.
딱 봐도 유학생이고, 보아하니 짐도 작으니 그냥 봐주고 싶었나 보다. 요새는 참 보기 드문 서비스이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항공사도 모든 곳에서 추가요금을 붙이면서 빡빡하게 구는지라 여행이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한동안 느끼곤 했었다.
한 번은 공항에서 짐 무게가 아주 조금 초과되었는데, 정말 에누리 없이 그 앞에서 가방을 열어서 꺼내게 했던 기억이 있다. 고압적인 자세로 허리에 손을 얹고 서서 지켜보던 그 직원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가 가진 권력은 그것으로 상대를 압도하여 규율을 지키게 하고, 정의를 실현했다는 사실로 의기양양해지는 용도일까?
반면에 옛날에 인심 좋던 시절에는 또 다른 권력남용도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급히 한국에 갔다가 당시에 살던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공항 직원이 내 옆에 서있는 어린 딸아이(당시 3살)를 보더니 라운지 입장권을 꺼내줬다. 아이 데리고 여행하려면 힘드는데, 가서 아이 간식도 먹이고 좀 쉬었다가 비행기를 타라는 배려였다.
그리고 그날 입국심사 줄이 아주 길었다. 미국 출입국 관리 직원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악명이 높은 편이기에, 아무 죄가 없어도 어쩐지 긴장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저 깐깐한 사람이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군데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내 앞쪽의 직원이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쳐다보더니 누가 우는지 찾는 것 같았다. 모두 긴장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직원이 나를 보고 손짓을 했고,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우리 아이가 운 것이 아니었는데! 무뚝뚝하게 우리의 여권을 체크하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아이를 바라보며, "힘들었어? 이제 즐겁게 여행하렴."이라고 말해주었다. 긴 줄이 힘든 어린아이를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우린 때때로 생각지 못한 파워의 남용을 만난다.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베풀어주는 친절. 그래서 그날 하루를 통으로 선물 받은 것 같은 기분을 갖게 하는 남용 말이다. 이것은 파워로 상대를 압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운명의 손길도 때로는 너무나 야속하게 우리를 때리지만, 또 뜻밖의 순간에 우리를 구원해주기도 한다. 요새 "더 글로리"때문에 시끌시끌한데, 가진 파워를 이용해서 누군가를 괴롭히고 해를 가하기보다는,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고, 삶에 활력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그런 부잣집 아이들이 모여서 몰래 선행을 베풀기 같은 놀이를 한다면, 그것도 재미나고 스릴 있지 않을까? 다른 아이들보다 여유로우니 돈보다는 몰래 한다는 것에서 짜릿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순진한가?
그러면 그 일을 겪은 사람은 세상에 복수를 하는 대신에, 세상에 더 유익한 일을 하고 싶어 질 테고, 좋은 파워는 더 퍼져나갈 테니까. 나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나도 내가 가진 파워를 보다 좋은 곳에, 보다 필요한 곳에 베풀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