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기간, 버리기 아까운 물 활용
며칠 전이었다. 온몸이 으스스한 것이 딱 감기 직전의 기분이었다. 변덕이 심한 날씨에 갑자기 몸에 찬기가 들은 것이다. 이럴 때에는 얼른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 하는데 갑자기 이불을 쓰고 눕는다고 해서 금방 몸이 따뜻해지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처럼 방바닥이 따뜻해서 지질 수 있는 그런 곳도 아닌 캐나다에서는 갑자기 몸을 데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욕조 활용.
나는 원래 빠르게 샤워하는 성격이고, 몸을 푹 담그는 타입이 아니지만, 이런 날에는 반신욕이 딱 필요하다. 다리를 감싸고도는 냉기를 빼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욕조에 물을 뜨끈하게 받고, 엡솜염을 조금 넣어 몸을 담갔다. 비누 종류는 어차피 부작용이 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들어앉아서 딸내미와 통화하면서 몸을 데웠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니 냉기가 빠지고 살짝 땀이 나려 해서 목욕을 그만두려는 순간, 욕조에 잔뜩 남아있는 물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가뭄 때문에 잔디밭에 물 주기도 금지인데, 이렇게 많은 양의 물을 그대로 하수구에 흘려보내자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비누를 푼 것도 아니고, 때를 민 것도 아니고, 그저 조용히 앉았다가 일어난 물이니, 이대로 화초에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퍼다 나를지 막막했다. 게다가 우리 안방 욕실은 이층에 있으니, 들통에 퍼 나르다가는 카펫에 잔뜩 흘릴 수밖에 없을 테고, 한 두 번으로 될 일도 아니니 엄두가 안 났다.
일단 그렇게 그날 밤은 그렇게 방치했다. 어차피 거실에도 욕실이 있으니 그쪽을 사용하였다.
다음 날, 남편과 고민을 했다. 호스를 이용해서 사이펀(syphon) 방식으로 하면 될 거 같은데, 무슨 수로 욕조의 물을 빨아낼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남편은 와인이나 사과주를 만든 후, 이것을 병에 담을 때 주로 사이펀을 이용한다. 높은 곳에 있는 액체가 튜브관을 통해 아래로 흘러나오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냥 튜브를 댄다고 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고, 그 튜브가 닿는 곳이 아래쪽 튜브 끝보다 낮아야 하고, 위쪽의 용액이 일단 튜브 아래쪽까지 일단 온전히 빠져나와서, 튜브 안이 공기 없이 액체로만 가득 차야 가능하다.
방식은 좀 다르지만, 어렸을 때 흔히 보았던 시골의 우물펌프나, 곤로에 석유를 채우던 펌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압차와 중력을 이용하여, 물을 한쪽에서 끌어내서 반대쪽으로 보내는 방법이다. 우물 펌프의 경우, 지하에 있는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펌프를 사용하지만, 그 펌프가 처음 작동되기 위해서는 마중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그 통로 안이 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다.
석유 펌프 같은 경우는 펌프의 힘으로 물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펌프가 없는 일반 사이펀의 경우는 그래서 더욱 마중물이 필요하다.
즉, 처음에 용액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욕조에서부터 창문까지 물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펌프가 없는 사이펀의 경우 흔히 입으로 액체를 빨아서 뽑아내고 그다음에 그것을 아래쪽 병으로 흘려 담기도 하는데, 욕조의 물을 가든 호스를 통해 바깥으로 옮기려면 그걸 무슨 수로 빨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다가 생각해 보니 욕조에 있는 수도꼭지를 이용해서 물을 흘러내리게 하고,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욕조 물로 연결하면 되겠다는 답이 나왔다.
일단 가든 호스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노끈을 이용했다. 남편이 욕실 창문으로 끈을 늘어뜨리고 내가 그 끈에 호스를 묶어주자 남편이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남편은 물을 연결했고, 그 물이 제대로 흘러나오는지 날더러 보라고 했다.
잠시 후 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급한 대로 수레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다시 수레의 물을 화단에 또 어떻게 줘야 하나? 일일이 물조리개에 퍼담아서 다시 뿌려야 하는데, 그러느니 그냥 직접 화단에 물을 주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호스를 화단에 직접 뿌리니 간편하게 해결되었지만, 물줄기가 너무 굵었다. 결국은 물 주는 샤워꼭지까지 달아서 본격적으로 화단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꼭지를 달자 수압이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잘 나왔다.
그제야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더러 사진을 찍으라고 외쳤다. 내 주머니에는 전화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욕조의 물이 넉넉해서 앞과 옆화단에 충분히 물을 줄 수가 있었다. 순수 물은 아니고 엡솜염이 있으니 한 군데에 뭉치게 주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고루 퍼지게 주도록 노력했다. 원래 엡솜염에 마그네슘이 많아 화단에 좋다고 일부러 풀어서 주기도 하니 우리는 그 효과를 볼 수 있는 셈이었다.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쉽게 물을 끝까지 다 퍼 낼 수 있었고, 물 사용에 대한 죄책감을 덜었다. 세탁기 마지막 헹굼물을 활용하고 싶어서 오래 고민하고는 해결책을 못 찾았는데, 앞으로라도 이렇게 담금욕을 하게 된다면 죄책감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