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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Oct 29. 2023

고구마가 생길지 몰랐어

줄기도 못 먹어 억울하다 했는데 말이야

한국에 한 달간 다녀왔다. 편찮으신 어머니 곁에서 시간을 보내고 왔더니 캐나다에는 이미 가을이 깊어져있었다.


가을은 마당의 색을 바꿔 놓았다. 수국은 완전히 분홍으로 물들었고, 두릅나무도 위쪽부터 서서히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꽃들이 있었다.


하얗게 피었다가 분홍으로 변하며 시들어가는 수국


확 추워진 날씨에 아침마다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마당에는 일거리가 넘쳐났다. 감상에 젖어있을 새 없이 일이 시작되었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리시안서스는 다음 꽃을 피우기 위해서 준비 중이었기에, 이왕이면 서리 맞지 않고 꽃을 피울 수 있게 해 주려고 밤 덮개를 만들어서 씌워줘 가며 관리를 해주었다.


밤에 씌우는 덮개로 이왕이면 할로윈 분위기를 내 보았다.


이미 많이 손상되어 버린 화초들은 과감히 정리를 해주고, 내년에까지 유지하고 싶은 일년생들은, 다년생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화분에 담아서 온실로 옮기기도 했다.


무는 이제 크기 시작하려는데 파내자니 아까워서 흙을 돋워주고 일단 버텨보기로 했다. 서리 맞아 죽는다면 그때 파낼 생각인데, 지금은 서리 약간으로 죽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다행히 낮에는 그래도 해가 제법 화창해서 일할 맛이 난다.


어깨를 드러낸 무


산기슭에 뒤늦게 심었던 배추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거의 자라지 못했기에 그냥 뽑아서 볶아 먹기로 했다. 줄기나 먹어볼 요량으로 심었던 고구마는 단골 방문객인 사슴에 의해 남아나지 못했다. 촘촘한 줄기가 채 한 뼘도 안 되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보니 그저 웃음이 나왔다.


고구마 줄기를 싹쓸이한 장본인. 호박잎을 먹는 중


어차피 거기에 마늘을 심어야 하므로, 고구마는커녕 줄기도 포기하는 마음으로 잡아 뽑는데, 어라, 이게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싶었다. 주변을 호미로 파면서 거칠게 잡아당겼더니 갑자기 쑥 하며 고구마가 튀어나왔다! 앗! 이게 뭐야? 나는 깜짝 놀랐다!


얼떨결에 고구마가 두 덩이 생겼다


내가 고구마를 심었던 적은 여러 번이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크기의 고구마를 얻은 것은 처음이었다. 밴쿠버는 따뜻한 날씨가 그리 길지 못하고 비가 많이 와서 고구마가 채 자라지 못하고 시즌이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온실을 지어서 일찍 시작하면 모를까 고구마는 그저 줄기를 먹기 위해서 키우는 작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고구마를 수확한 것이었다.


자연은 참 요지경이다. 땅도 척박했고, 잎은 뜯어 먹히느라 자라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고구마가 달릴 수 있었을까? 물론, 뿌리 밑으로 주렁주렁 달리지는 못하고, 오직 하나에 올인하여, 하나만 튼실하게 키웠기에 가능했지만, 식물은 무슨 기준으로 이렇게 행동할까? 예전엔 손가락만 한 것들이 여러 개 달리곤 했었는데 말이다.


그나마도 고구마 줄기를 자꾸만 와서 파헤쳐놓는 통에 고구마가 달릴 만큼 자란 것은 딱 두 개였고, 고구마도 딱 두 개가 나왔다. 하나는 좀 벌레 먹은 모양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럴싸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들여와서, 배추 뽑은 것은 모두 볶아서 저녁 식사에 던져 넣고 고구마는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집에서 키운 고추도 덤으로 들어가고, 사실 나머지는 어제 남은 음식들의 종합편이었지만, 역시 갓 뽑아온 야채라서 풍미가 좋았다.


풋배추와 꽈리고추를 넣은 다때복 저녁식사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다시 고구마를 기웃거렸다. 고구마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것보다 상당히 가벼웠다. 이거 이렇게 가벼우면 속이 빈 것은 아닐까 은근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저녁을 배불리 먹었기에 고구마를 더 먹기는 곤란했지만, 그래도 속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쪽에 벌레 먹은 고구마를 썩둑 잘랐다. 우려와 달리 안쪽의 색은 말끔했고, 노르스름한 흰색의 뽀얀 단면을 드러냈다.


냄새를 맡아보니 그냥 고구마 냄새였다. 썰어봤다. 딱딱하지 않고, 약간 속 빈 무처럼 쉽게 썰렸다. 설컹한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남편에게 한 조각 건네주고, 나도 한 입 물었다. 설컹설컹하는 고구마의 맛이 신선하고 시웠했다. 살짝 단맛이 나는데, 그렇다고 딱 고구마 맛이라고 하기엔 약한 맛이었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 원래 햇고구마는 별 맛이 없다. 수확 후에 숙성기간을 거치며 단단해지고 맛이 든다고 알고 있다. 내 고구마는 맛이 들기 전이었다.


하지만 달랑 두 개 있는 것으로 맛이 들 때까지 기다리기는 좀 곤란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고구마가 달렸다는 것. 나에겐 그게 가장 크고 기분이 좋다.


계획한 일이 잘 안 되는 일도 허다한 인생살이에서, 전혀 꿈조차 꾸지 않았던 일이 덜컥 발생해 버린 즐거움이 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자연의 힘에 또다시 숙연해진다.


음, 조만간 더덕도 파봐야 하는데, 그건 얼마나 컸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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