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 날짜에 해주는 환영파티
연말은 안 그래도 바쁜 시즌이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캐나다인들은 얼마나 준비할 것이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행사가 많이 있다. 우리 결혼기념일도 있고, 내 생일도 있다. 그리고 남편이 꼭 챙겨주는 기념일이 또 하나가 있으니, 그게 바로 "캐나다 환영 디너"이다.
5년 전 오늘 나는 캐나다에 왔다.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살러 왔다. 짐가방 달랑 두 개 들고, 관광비자로 왔지만 나는 여기 눌러앉을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지금 이 남자와 결혼을 하러 왔다.
그래서 이 날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 어느 날보다도 뜻이 깊은 날이다. 그래서 매년 이 날이면 남편이 나를 환영하는 저녁식사를 차려준다. 처음에는 어느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먹으려고 했으나 너무 촉박하게 연락하는 바람에 자리가 없었고, 그렇게 해서 이 디너는 남편이 차려주는 것이 전통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이탈리안 식사로 말이다.
올해도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을 해보겠느냐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했다. 항상 최고로 잘해 주고 싶어 하는 남편은 역시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메뉴를 짰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근사한 저녁식사가 차려졌다.
이 식사는 무조건 풀코스로 차린다.
식탁에는 식탁보를 깔고, 촛대를 세웠다. 그리고 평소에 아끼는 접시를 꺼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마당에 있는 호랑가시나무와 노바스코샤에서 온 전나무 가지로 꽃꽂이를 해서 옆에 두었다. 원래 첫 코스인 아페리티보(Aperitivo)는 식탁이 아닌 곳에 따로 차려서 먹지만, 이번엔 그냥 식탁 한쪽 구석에서 준비했다.
아페리티보는 입맛을 돋워주는 코스이다. 이탈리안 스파클링 와인인 프로세코(Prosecco)로 시작하는데, 올리브와 견과류를 안주로 조금 준비했다.
그러고 나면 전식(Antipasti) 차례이다. 우리 부부는 둘 다 해산물을 좋아해서 늘 해산물 코스로 차리는데, 그러자면 훈제연어가 전식으로 제맛이다. 집에서 훈제한 연어를 올리브오일과 버무려서 케이퍼와 단단한 과자를 곁들인다.
음식은 전적으로 남편이 혼자 차린다. 따라서 제때에 따끈한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식재료의 전처리 및 준비를 다 해놓고 시작을 하고, 코스의 사이사이에 재빠르게 요리를 마무리해서 상에 올린다. 즉, 잠깐씩 조리 타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제 첫 코스인 프리미(Primi), 즉, 파스타 코스 차례이다. 마늘과 크림소스 파마잔 치즈를 넣은 새우 파스타이다. 링귀니 파스타는 식사 시작 전에 삶아 놓았고, 이제 새우를 버터에 빠르게 볶아낸 후, 건져내고 거기에 소스를 만들면 된다. 여기에 파스타 넣어서 살짝 끓여주고, 다시 새우 투하해서 완성!
양은 진짜 조금만 담는다. 앞으로도 먹어야 할 코스가 계속 남아있으니 지금 배가 불러지면 안 되니까 말이다. 사실 이 파스타 코스는, 외식할 때는 건너뛰는 코스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배가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집에서 차릴 때에는 양을 조절할 수 있으니 풀코스로 간다.
곁들임 와인으로는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를 선택했다. 남편은 코스 요리 차릴 때 음식에 맞춰서 다양한 와인을 곁들이도록 구성한다. 외식에서 정말 이렇게 사 먹으면 둘이 가볍게 천불(백만 원)은 나올 것이다. 외식할 때는 애피타이저 안 먹거나 하나로 나눠먹고, 본식 하나 선택하고, 와인도 남편만 딱 한잔 넣는다. 디저트만 얹어도 값이 올라가고 술은 정말 외식비를 크게 바꾼다. 그러니 집에서는 최대한 사치스럽게 가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이제 진짜 메인 차례다. 킹새먼 또는 치누크(chinook)라고 불리는 연어를 선택했다. 오일함량이 높고 육즙이 풍부한 고급 연어다. 선드라이드 토마토와 시금치를 넣어서 마늘 크림소스를 만들고, 아스파라거스와 버섯, 구운 호박을 곁들였다.
여기에는 샤도네(Chardonnay) 와인을 곁들였다. 우리 집에서 2년 전에 만든 와인이다. 집에서 만드는 와인은 시중에서 흔히 사는 와인과 맛이 차이가 나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부가 첨가물을 전혀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맛이 상당히 깔끔하고 순수하다. 또한 와인 마신 후에 겪는 두통이 생기지 않는다.
사진에 있는 물 잔은, 남편의 부모님께서 사용하시던 크리스털 잔이라고 했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부모님은 늘 이 잔을 사용하셨다고 했다.
음식을 전부 양을 적게 잡았는데도, 결국 메인 코스를 먹고 나니 엄청나게 배가 불러졌다. 뭘 또 먹을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입가심을 해야 하기에 적은 양의 샐러드(insalata) 코스로 이어졌다. 샐러드는 이미 남편이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기에 드레싱만 섞어서 서빙해서 나왔다.
페넬(Fennel)과 붉은 양파를 넣고 파마잔 치즈를 곁들였는데 아주 상큼한 맛이 났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 치즈와 과일(Formaggi e Frutta) 코스다. 이탈리안 치즈로 남편이 골라왔는데, 이름은 뭔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이번 와인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으로 준비해서 곁들였다.
사진에 보이는 촛대는 이번 여름에 시누이가 노바스코샤에서부터 들고 왔다. 아주 유서 깊은 물건이라 했다. 남편은 이렇게 조부모님부터 대를 이어 내려온 물건들을 소중히 아끼다가 기분을 내고 싶은 순간에 사용하는 것을 즐긴다.
이제 마지막 코스인 디저트가 남았지만, 우리는 정말 너무 배가 불렀다. 그래서 잠시 배를 꺼트릴 겸 선물을 풀기로 했다.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선물을 준비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선물은 준비되어 포장되어 있었다.
참고로 이 날에 주고받는 선물은 거의 보통은 로맨틱하지 않다. 아예 선물이 없기도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생필품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 나름의 유머코드이다. 사실 선물을 주고받을 날들은 많이 있다. 곧이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도 있고, 새해에는 결혼기념일도 있다. 더불어 1월 초 내 생일까지 줄줄이 행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굳이 값비싼 선물을 이 날 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 대신 뭔가 의미를 부여하는 재미난 물건을 넣는다. 평소에 사고 싶었는데 어쩐지 사지 못한 물건이라든가, 특히나 한쪽에서만 주로 원하고 상대방은 굳이 뭘 그걸... 하는 경우도 있다.
첫해에 남편은 내게 스테인리스 전기밥솥을 사줬다. 무슨 이런 가전제품을 선물로 주느냐 싶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전까지 남편은 플라스틱으로 된 밥 짓기 전자 찜솥을 사용했었다. 나는 그 플라스틱이 싫었고, 건강에 나쁠 것 같았지만, 우리는 각자의 물건을 가지고 타박을 하지 않는지라 그저 끙끙 앓았다.
내가 사고 싶던 밥솥은 거창한 것이 전혀 아니었고, 가장 단순하게 취사만 되는 일반 밥솥이었다. 다만 내솥이 코팅솥이 아니라 스테인리스였던 것이다. 계속 그걸 사고 싶어서 망상거리는 것을 알고 있던 남편은 그걸 선물해서 나를 웃게 만들었다.
반면에 그 해에 나는 남편에게 마요네즈를 선물했다. 또한 웃기는 것이, 나는 무설탕 아보카도 오일 마요네즈를 원했고, 남편은 기본 마요네즈를 원했는데, 그러다 보니 의견 마찰이 나서 아예 마요네즈를 안 사고 몇 달이 지난 상태였다. 그래서 그 사슬을 끊고 싶어서 마요네즈를 두 가지 모두 사서 박스에 담았다.
우리는 둘 다 유쾌하게 웃었고, 그렇게 서로와 더 가까워졌다.
올해에는 남편이 날더러 크리스마스 선물을 뭘 갖고 싶냐고 묻길래 천연덕스럽게 유리볼이라고 말했었다. 집에서 스테인리스를 사용하는데, 생크림이나 달걀을 휘핑할 때마다 그 칼날이 그릇을 깎아내는 기분이 들어서 계속 찜찜했기 때문이다. 물론 남편은 그런 조리기구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줄 생각이 없기 때문에 계속 진짜 그걸 원하느냐고 물었다. 사실 내가 그걸 선뜻 사지 않는 이유는, 그걸 사서 둘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날 유리볼 4종세트가 선물로 등장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가 준 선물은 거대한 목욕타월이었다. 큰 목욕수건을 쓰는 서양인들이지만, 그중에서 더 큰 종류가 있는데, 정말 온몸이 쏙 들어가는 이 배쓰 시트는 쉽게 살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쓰는 것이 오래되어서 상당히 얇아진 상태였고, 지난봄에는 가장자리가 닳아서 보기 흉하게 되었길래 남편이 버린다고 내놨는데, 내가 다시 주워다가 천으로 씌워서 사용 중이었다.
너무나 실용적인 물건에 실용적이지 않은 것이 하나 얹어졌다. 그것은 딸이 보낸 선물이었다. 5년 전 그날,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이틀 전에 딸이 먼저 도착했다. 새아빠가 될 사람과 둘이서 나를 기다리던 딸. 그래서 이 환영저녁식사에는 딸이 같이 참여하곤 했었는데, 올해는 도착일이 늦어서 날짜를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노랑오리로 장난을 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내용은 아직 글로 안 써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언급할 것이다) 어디선가 도자기로 구운 오리를 발견하고 선물로 보낸 것이다.
세 가지 선물 모두 웃음을 선사해 주었길래 우리는 기분 좋게 웃고는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디저트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안 디저트라면 뭐니 뭐니 해도 역시 티라미수가 아니겠는가. 이 모든 코스 중에 내가 만든 유일한 음식이었다.
남편이 먹을 수 있도록 밀가루 없는 레이디핑거를 만들어 바닥에 깔고, 서빙하는 마지막 순간에 코코아 가루를 추가로 얹어준 후, 에스프레소와 마살라 와인을 섞어서 뿌려줬다. 그리고, 다시 마살라 와인을 곁들여 먹으니, 달콤한 날의 마지막 장식이 참으로 달콤했다!
우리가 함께 한지 만으로 5년을 꽉 채웠다. 처음의 두려움과 환희는 사라졌지만, 이제는 깊은 신뢰와 아늑함이 남았다. 우리는 여전히 매일 사랑을 표현하고, 매일 감사한다.
사실 이런 근사한 저녁을 꼭 차려야 할 이유는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는 매일 환영받는 기분이니까. 그래도 남편은 매년 이렇게 반겨주고 싶은가 보다. 그러면 나는 또 매년 감동을 하고... 이런 것들이 아마도 우리를 계속 신혼 같은 기분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삶이 30년간 이어지기를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고마운 남편, 오래오래 건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