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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Feb 17. 2024

해피 발렌타인스 데이!

즐기기 위해서 즐기는 시간

이런 닭살스러운 글이 올라오면 구독자 수가 줄어들지도 모르지만, 왜 글을 안 올리느냐는 타박을 들었기에, 눈 딱 감고 오늘도 우리 집 이벤트를 남겨본다.


결혼 5년 된 우리 부부는 매년 발렌타인데이를 즐긴다. 둘 다 이런 것은 전혀 신경 안 쓰던 사람들이다 보니 오히려 이러는 게 나름 재미있다.


나는 초콜릿을 만들어서 아침에 남편에게 내밀고, 남편은 꽃다발을 전하는 게 보통 우리의 방식이다. 남편이 은퇴 전까지는 나름 여유 있게 초콜릿을 만들고 선물도 구매하곤 했는데, 이제는 24시간 붙어있다 보니 뭔가 몰래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놓고 집에서 초콜릿을 만들었다. 남편은 슬쩍 자리를 피해 줬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허둥지둥하려니 쉽지 않았다. 실온에서 굳혀야 하는 초콜릿을 냉장고에서 급히 굳히니 꺼내자마자 녹기 시작하고 핸들링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 대로 대충 이래저래 손을 봐서 끝냈다. 나름 금박도 붙였지만, 전자레인지를 이용해서 엉터리로 녹여 붙인 초콜릿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일 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를 한 셈이다. 냉장고에서 굳히기, 전자레인지로 초콜릿 녹이기...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그냥 상자에 넣고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침대 밑에 상자를 숨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남편에게 카드와 초콜릿, 그리고 가죽지갑을 내밀었다. 남편은 껄껄 웃었다. 전날 내가 구시렁대며 초콜릿을 만들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남편은 고급 란제리를 선물했다. 그냥 고급진 게 아니라 100% 실크로 된 아주 우아한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이런 진짜 실크 란제리를 겉옷으로 입기도 한다. 물론 내가 이걸 입고 정말 밖에 나가겠느냐만 서도, 남편은 뭔가 고급스러운 것을 주고 싶었다보다. 하나도 야하지 않고, 아주 고급스러웠다.



낮에는 남편이 주문한 꽃다발이 도착했다. 색다르게 박스에 담겨서 도착한 꽃다발은 분홍과 빨강이 어우러진 꽃다발이었다. 남편 역시 나와 계속 붙어있다 보니 꽃집에 갈 새는 없었을 것이다. 꽃은 시간이 가니 점점 더 예쁘게 피어났다.



이번엔 특별한 저녁식사는 생략할까 했었지만, 우리는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엉성한 초콜릿 대신 좀 예쁜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고 싶었고, 남편은 좀 근사한 저녁식사를 준비해주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오후 내내 바빴다.


남편은 급히 나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 왔고, 나는 발렌타인데이스러운 초코 롤케이크를 만들었다. 최근에 퀼트 하느라 젤리롤 원단을 사용하면서 마음이 동했던 것도 이유이리라.


블렉베리 시럽과 크림치즈 필링을 사용했다. 그리고 돌돌 말아서 가나슈 크림을 부었다


빨간 케이크 안에 하얀 크림치즈를 넣고, 밖에 초콜릿을 뿌리고 싶었는데, 붉은색이 딱 맞게 나오지 않았다. 레드벨벳 케이크 레시피를 좀 참고할걸! 대충 눈대중으로 만들어서 나온 결과가 흡족하지 않았다. 내가 구시렁거리자 남편은 껄껄 웃었다. 그래도 초코 가나슈를 뿌리고 나니 대충 커버가 되었다.


다이닝 룸에 테이블 세팅을 하고, 꽃과 촛대를 놓았다. 식탁보는 발렌타인 데이니까 연분홍을 사용했고, 지난번 내 생일 선물로 받은 은 냅킨링이 사용되었다. 



남편이 준비한 음식은 해산물이었다. 관자와 새우, 랍스터까지 넣은 고급스러운 차우더라니! 풍미가 넘치면서 각각의 맛이 살아있었다.


한 입 먹고 나서 아차 싶어서  찍은 수프 사진!
해산물 파스타와 내가 좋아하는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샐러드


식사 시간은 즐거웠다. 꽃이 있고, 촛불이 있고, 맛있는 음식이 있고, 그리고 우리가 있었으니까. 건너뛰자 했던 발렌타인 특별 상차림이었는데, 풀코스 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차리고 나니 잘했다 싶었다. 우리는 진지하게 음식을 음미고, 또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행사라는 것이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한다면 가장 어렵고 불편한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하는 과정도 즐거워야 한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를 상상하면서, 그리고 함께 즐길 모습을 눈 앞에 그리면서 준비하는 행사는, 그 자체로 이미 즐겁고 행복하다.


사실 이렇게 나이를 먹고 나면 삶에 뭐가 그리 필요하겠는가? 실크 속옷이 필요할까? 가죽 지갑이 필요할까? 꽃이나 초콜릿이 필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당신이 있어서 감사하고, 우리가 함께 웃고 즐길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다.


이상은 더 이상 신혼이 아닌 부부가 여전히 알콩달콩 발렌타인 데이를 즐기는 이유라고 우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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