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크리스마스 준비 글만 올리고, 막상 크리스마스는 너무 정신이 없이 빨리 지나가서 글도 못 올렸다. 그냥 두면 곧 파묻혀 버릴 테니, 기억을 더듬어서 흔적을 남겨본다.
크리스마스 아침, 침대에서 약간 뭉그적 거리다가 일어났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는 남편의 손을 잡고 거실로 따라 나오니, 이브 밤에 준비한 크리스마스 양말보다 더 많은 물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스에 담기지 않는 것들을 아침에 겉으로 꺼내놓은 것이다. 정말 밤 사이에 산타가 다녀간 기분이었다.
크리스마스 양말은 산타의 선물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고, 아이들에게 모자람이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질구레한 것들을 잔뜩 담아서 풍성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목표이다. 옛날 겨울철에 신선한 과일을 먹기 힘든 시절을 반영해서, 양말의 가장 안쪽에는 귤을 하나 넣어주고, 양말을 채운 후 가장 겉에는 지팡이 모양의 사탕을 걸어주어 산타가 다녀갔다는 상징을 보여주는 것이 규칙이란다.
자식들과 매년 해오던 행사인데 올해부터는 졸업이다. 아마 자식들도 아버지 혼자 쓸쓸히 크리스마스 지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여태 계속해오다가 아빠의 결혼 이후로 마음이 놓여서 그만두게 된 게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다. 아무튼 그래서 올해는 애들도 없이 우리 부부만 애들처럼 목욕가운 바람으로 앉아서 산타의 선물을 열었다. 자잘한 살림도구부터 장난스러운 물건들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선물을 많이 받아서 좋다는 기쁨보다, 내가 그동안 지나가면서 유심히 봤던 물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챙겨줬다는 사실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
특히나 부엉이 커플 인형은 장 보러 갔다가 발견했는데, 너무 귀엽다고 두 개 나란히 세워놓고 사진 찍고 좋아했지만 막상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니 구입하지 않고 지나갔었다. 나중에 다시 가서 보니 금세 품절되고 없어서 아쉬워했건만, 아침에 딱 나오자 난롯가에 서있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심한 척 빨리 장 보고 집에 가자던 남편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행복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딸에게서 온 양말에는 간식이 종류별로 들어있었다. 맛있는 크리스마스 되라고...
오후에는 남편의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러 왔다. 물론 우리는 그전부터 메뉴를 짜고 음식을 준비했다. 남편은 수프를 끓이고,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 때마다 먹는 통 거위와 햄을 준비했다. 다른 요리는 자식들과 함께 한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시저(Caesar) 칵테일 만들기. 제대로 된 완성 사진이 없다만, 시저 칵테일은 가히 캐나다 대표 칵테일이다. 야채와 매운 소스를 넣어서 만드는 칵테일인데, 우리 집에서는 크리스마스 때 먹는 칵테일이다. 솜씨 좋은 막내아들이 만든다고 냉장고를 열자 안쪽에 보이는 김치. 맏딸이 냉큼, "오, 김치다! 김치 넣어서 만들자!" 앗! 칵테일에 김치를?? 나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모두 찬성해서 김치가 칵테일에 들어갔다. 매콤한 칵테일, 의외로 맛있었고, 남편은 지금까지 먹은 시저 중에 제일 맛있었다고 극찬을 했다.
아이들이 한국 음식 좋아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김치를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칵테일 만드는 동안 손으로 막 집어 먹을 만큼 즐기더라. 심지어 스스로 김치를 사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맏딸더러 내일 갈 때 좀 챙겨주려나고 물었더니 정말 좋아했다. 먹을 사람 없다고 달랑 두 포기 반 했는데, 다음번에는 좀 넉넉히 해서 나눠줘야겠다.
그러고 나서는 선물 풀기 시간이었다. 내 선물 때문에 다들 고민을 너무 많이 하길래, 글라스락 유리용기 좋아한다고 남편이 얘기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넉넉하게 유리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요리 좋아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서 밴쿠버 시내에서 하는 고급 요리 클래스 수강권을 줬다! 오, 이런 럭셔리한 취미가!
다 같이 선물을 풀고 나서는 저녁식사 준비에 돌입!
우선 남편이 끓여놓은 콜리플라워 리크 수프로 시작했다. 진짜 맛있었다. 위에 장식으로 쪽파와 베이컨을 뿌렸는데, 의외의 쪽파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수프에는 샴페인과 와인이 곁들여졌는데, 딸내미가 막내 오빠에게 선물로 보낸 병따개가 개시되었다.
먹는 일은 그렇게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 하나 먹고 나서 같이 다음 거 해서 먹고.. 그런 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위와 햄은 진작에 오븐과 바비큐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완성되기 전에 샐러드를 먼저 먹었다.
그러고 나서 완성된 오리를 꺼냈다. 익으면서 생기는 기름은 따로 받아서 나중에 조리용으로 사용하면 좋아서 따로 받았다. goose fat은 고급 요리기름이다. 요리에 깊은 풍미를 내어준다. 그리고 다 발라먹고 나면 육수 고아서 얼려두었다가 쓰면 된다. 비싸지만 완전히 다 먹으니 정말 버릴 것이 없다.
저녁식사는 뷔페처럼, 준비해두고 각자 담아서 식탁으로 가져간다. 카운터 쪽은 육류, 그리고 불 있는 프라이팬에는 야채들이 준비되어있었다. 꼬마 양배추와 당근, 감자가 각각 조리되었고, 햄과 거위를 푸짐하게 담았다. 어찌나 배가 부르던지! 그리고 디저트는 백조모양 슈크림과 초콜릿 아이스크림이었다. 이건 원래 밀가루로 해야 하지만, 그러면 남편이 못 먹어서 쌀가루로 했는데, 반죽이 마음같이 되지 않아서 엄청 애 먹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결과물이 나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은 실리콘 머핀 컵에 담았더니 예쁜 모양으로 얼어줘서 좋았다.
실컷 먹고, 마시고, 떠들고 나서는 부엌 치우고 취침. 잠은 꿀잠을 자는 걸로... 아이들이 살던 집이니 방은 하나씩 차지하고 잘 수 있다.
그리고 아침에는 각자 편한 시간에 일어나서 편한 것을 먹는 쪽으로 했다. 나는 아몬드 스콘을 구웠다. 하나는 로즈메리를 넣어서 좀 더 식사스럽게 하고, 다른 하나는 블루베리를 넣어서 둥글게 빚었다. 아무래도 밀가루처럼 부풀어주지는 않았지만 맛은 괜찮았다. 동부 누님 댁에서 날아온 잼이 곁들여졌고, 맏사위가 오믈렛을 만들어서 어제 남은 햄과 곁들여서 푸짐한 식사가 되었다.
노닥노닥 모여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점심까지 함께 하고는 각자 귀가했다. 어제저녁에 거하게 먹었으니 점심은 요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들로 준비되었다. 그래도 역시 또 푸짐했다. 역시 모든 행사는 먹거리와 함께 추억되는 듯하다.
이번해에는 딸 없이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다음번은 꼭 같이 보내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