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안 되는 것 알면서도 그랬어
정말 제조사로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
제조업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사실 제조업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직장을 다니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 어떤 물건을 만드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지 그 보다 자세한 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절대 공장이 있는 회사를 다닐 것이라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연히 집 근처 공장이 있는 회사에서 수출 업무를 담당한다는 공고에 혹했다. 나는 외국어를 전공했으니까 조금이라도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취업한 회사는 완제품을 직접 만드는 공장이 있고 근무를 하면서 느낀 점은 이곳은 오래 몸 담기에 결코 좋은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오늘은 전화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제조사라서 우리가 생산한 제품의 라벨에는 제조사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그 전화번호는 회사의 대표번호이다. 운이 좋지 않게도 입사 후에 내가 앉게 된 자리의 전화기는 회사의 대표 번호로 전화가 오는 자리였다.
온갖 제품에 대한 상담 문의, 제품의 불량, 제품 관련 자료를 받기 위한 문의와 컴플레인 전화가 하루에도 끊임없이 울려댔다.
매출 규모가 꽤 큰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별도로 고객 서비스 담당 부서가 없었다. 막내인 내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나는 해외 수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국내 고객 문의까지 담당하는 것이 버거웠다.
막내가 별 수 있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전화기에 불이 난다는 말이 뭔지 알 정도로 수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뚜렷한 고객 응대 매뉴얼도 없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함으로 전화가 오면 문의 내용들을 처리했다.
회사 제품에 대한 문의가 오면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국내 영업 부장님들에게 전화를 돌려줬고, 회사 제품 관련 서류를 보내달라고 하면 그건 내가 갖고 있는 자료들을 메일로 전달하면 돼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컴플레인은 내가 이 회사를 대표해서 전화를 받기 때문에 이런저런 불량이나 제품에 하자가 있는 것들은 내용을 품질부서에 전달해서 답변받은 내용을 알려주면 나의 역할은 끝이었다.
가장 어렵고 난감한 일은 회사에서 관련 자료를 보내는 방식을 고객에게 설명하는 일이었다.
대부분 전화를 하는 사람들은 빠르게 자료를 받기 위해서 전화를 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하루에도 수많은 전화를 받다 보니 조금 더 원활한 처리를 위해서 회사 홈페이지 문의 게시판에 글을 남기면 이메일로 자료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안내를 했다.
조금 귀찮지만 가장 빠르게 회신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안내를 하지만 가끔은 전화를 했으니 바로 팩스로 보내 달라는 사람도 있고 빨리 받고 싶어서 전화를 했으니 당장 전화를 끊지 말고 이메일로 보내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나는 다른 업무를 보던 중간에 전화를 받으면 누군가의 이메일을 적은 후에 잊어버리기도 하고 또 메일을 잘못 받아 적으면 또 일을 두 번 하게 되니까 홈페이지에 문의글을 보면서 순차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고객도 좋고 나도 좋았다.
시발 내가 시간이 많은 줄 알아?
한창 바쁘게 업무를 보면서 정신이 없어서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힘든 날이었다. 유독 이 벨소리가 요란하더라니 전화를 받으니 거친 목소리 반말을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내가 그 회사 ㅇㅇ제품 쓰는데 ㅁㅁ 자료 좀 보내줘"
처음부터 반말을 하는 사람이 매우 무례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선생님, 혹시 ㅇㅇ제품 말씀하시는 건가요?
자료 요청 건은 홈페이지 고객문의 게시판을 통해 문의하시면 빠르게 처리 가능합니다."
"내가 시발 시간이 많은 줄 알아? 지금 보내달라니까"
"죄송하지만 문의게시판 대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회신받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거 참, 답답하네. 팩스로 좀 지금 보내 달라고"
"해당 자료는 10 페이지가 넘어가는 자료입니다. 많이 급하신 것 같으니 이번 건은 바로 이메일로 송부드리겠습니다."
"시발 내가 시간이 많은 줄 아냐고 이메일 못 본다고"
"선생님, 말씀드렸다시피 자료 장수가 많아서 이메일로 회신드리는 게 정확하게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팩스로 전달드리면 전송 중에 누락될 수도 있습니다."
"야 이 시발 내가 시간이 남아 돌아서 전화한 줄 알아?!@#$#@%$#^$*&^%#$"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더 이상 내가 왜 시발이라는 욕을 들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차분하게 회사의 자료 발송 매뉴얼 대로 응대 했지만 수차례 욕을 들으며 분노를 견뎌야 할 이유가 없다. 나의 직업은 콜센터 직원도 아니고 나의 주 업무가 고객 응대도 아닌데 더 이상 회사의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 중 한 사람에게 욕을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고객의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이 회사는 나의 회사도 아닌데 내가 왜 이 회사에 근무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욕을 들어야 하는 걸까 회의감이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그 고객에게 다시 전화가 오면 전화를 갑자기 끊어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지 나에게 욕을 한 사람에게 먼저 사과를 요구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나는 회사를 대표해서 전화를 받았고 우리 회사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 중의 한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전화를 끊은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해당 고객이 조금 더 상냥하게 요청했다면 나는 전화를 끊지 않고 급한 만큼 전화를 했으니까 다른 일 보다 이 자료를 먼저 보내줬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급하게 자료를 요청할 경우에 메일보다 전화를 먼저 하게 되는 경험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욕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다행히 그 고객에게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문의 게시판을 살펴봤지만 아까 전화로 요청 왔던 제품에 대한 관련 자료 요청은 한 건도 없었다. 그렇게 급한 건이 아니었다는 건데 나는 왜 그로부터 욕을 들었을까. 전화로 업무를 하다보면 이메일 보다 즉시 전달되는 감정때문에 마음을 잘 가다듬어야한다. 하지만 그 고객에게 시간이 남아 돌지 않듯이 나도 모르는 사람한테 욕을 들을 시간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 시간도 소중하다.
손님이 왕이라는 말이 있지만 월권의 정당성은 없다. 욕이라는 도구가 어떤 일도 해결 되는데 사용 될 수 없다는 것을 그 고객이 알았으면 좋겠다. 전화 업무를 하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상냥한 목소리만 들려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