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가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데이터도 안 터지고 와이파이도 안 돼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생각 또 생각만 할 수 있는 그 시간이다.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카톡을 보면서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연락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누군가의 직장 동료이고 딸이고 언니이고 친구이다. 모두에게 같은 ‘나’라는 존재는 될 수 없다. 그럼 난 도대체 누구일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엄마의 아낌없는 사랑을 딸이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기 전에 울면서 불안한 내 감정을 털어놓을 전화를 받아주며 같이 울어주는 누군가의 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직원이 되었고 업무가 서툰 낯선 동료이기도 하다. 또 예민해서 목소리 톤이 높아지며 말을 빠르게 하면서 서류를 빨리 달라고 조급해하는 누군가의 싹수없는 동료이기도 하다.
지금은 내 왼쪽, 오른쪽에 두 사람이 서로 직장 동료이고 난 그 가운데에 앉아있다. 두 사람은 나를 통해 대화를 한다. 나는 그 둘의 대화에 방해가 될까 봐 몸을 뒤로 눕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는 타인과 어떤 연결고리로 만나냐에 따라서 다른 수식어가 붙게 된다. 늘 사랑받는 누군가의 딸로 존중받을 수 없으며 늘 웃고 떠들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노는 친구라는 존재로 모두에게 통하지도 않는다.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들과 존재하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은 때에 맞춰 바뀌어야 한다.
한국이 아닌 외국에 산다고 해서 본질적인 나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나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자아들의 뿌리는 시작되는 곳이 나라는 사람으로부터 유래된다. 어쩌면 나는 가끔 나도 모르는 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할 때 꽤 큰 스트레스와 압박감으로 힘들 때가 있다.
경험해 보지 않았던 역할을 해야 하면 대본도 없이 감독의 지시도 없이 연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이름이 뭔지도 모를 수 있다.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나는 또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며 타인의 관람을 즐겨야 할까 고민이 많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상황에 따라 나의 캐릭터는 달라진다.
늘 한결같은 나로 살기에 이 세상은 나에게 바라는 역할이 많다.
한국에서도 늘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회사에서의 나와 회사 밖에서의 나를 분리하여 퇴근 후에는 직장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는 삶을 꾸리는 방법을 매일 찾았다.
나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존재는 사람마다 다르게 평가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타인에게 내가 준 마음이 동그라미인데 그걸 받는 사람이 세모로 받는다면 세모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
나는 동그라미로 줬으니 모양을 변형해서 받는 사람은 그렇게 하라고 내버려두어야 하는 세상이다. 내가 주는 마음의 모양조차 바뀌는데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어찌 더욱 다양하게 인식될까?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사랑스러운 딸이라서 나도 타인을 대할 때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점을 인식하지만 가끔은 그 인식이 무너져버려 그 사람 자체로 보게 된다.
내 감정에 나쁜 영향을 주는 말을 하거나 내 기분이 상하도록 올곧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절대적으로 호의적으로 상대할 수 없다.
모두의 강점과 약점을 인정하고 한결같은 태도로 동등하게 나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늘 같은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똑같은 감정으로 사는 로봇이 아니라서 매 번 다르게 사람을 상대하게 된다. 모순적이다. 나는 나의 정체가 이 세상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싫다면서 스스로도 다른 모습으로 상대를 가려가면서 내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 존재가 늘 한결같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곳에서 혼자 살고 싶다. 오로지 나의 존재는 그저 하나의 캐릭터로만 실존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