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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다 May 27. 2024

폴란드 기차에서 쫓겨나서 밤에 철길을 걸어봤니

유럽에서 기차가 멈추면

한국에서 김밥을 사는 일은 매우 쉽다. 편의점에만 가도 참치김밥, 닭갈비김밥, 전주비빔김밥 어쩌고 김밥 종류가 많다. 하지만 유럽에 살고 있으니 김밥 천국을 찾아 김밥을 사 먹는 일은 나의 헛된 상상의 사치다.


그렇게 쉽게 사 먹던 김밥이 먹고 싶은 날에는 당장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갈 수 없으니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한다. 김밥을 만드는 재료는 현지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어묵은 현지마트에서 살 수 없어서 꼭 한국마트에 가야 했다.

어느 날처럼 기차를 타고 한국 마트에 가서 김밥 재료를 사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차가 중간에 멈추더니 꽤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잠깐 멈추고 다시 가겠지 싶었는데 이번에는 심상치가 않다.

갑자기 직원이 와서 뭐라 하더니 기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나도 눈치껏 사람들을 따라서 기차에서 내렸는데 소방차가 삐용삐용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듣자 하지 기차에 불이 났고 모두 다 내려서 걸어서 다음 역으로 가라는 것이다.


황당했다. 어떻게 안내방송도 안 나올 수가 있으며 폴란드어를 모르는 나 같은 외국인은 어떡하라는 걸까?

그렇게 기차에서 내려서 양손에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철길을 걷고 또 걸었다.

철길은 돌멩이가 많아서 걷기가 힘들었고 가로등이 희미한 곳에는 어둠이 가득해

혹시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무섭고 겁이 났다. 이 길을 걷고 걷다 보면 다음역이 나온다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질 수 있을까 생각할 틈도 없이 돌멩이가 발톱을 마구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을 따라서 계속 앞으로 걸어갔더니 드디어 다음역에 도착했다.


이제 다른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면 되는데 문제는 내가 타야 되는 기차가 어떤 건지 모르겠다.

처음에 온 기차를 타려고 했는데 나와 같은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그 기차를 안 탔다.

반대방향으로 가는 기차라면 집에서 점점 멀어지니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그렇게 다음 기차가 와서 나와 같은 기차에서 내렸던 사람들이 타길래 나도 그들을 따라 기차에 몸을 올렸다.

기차가 가면 갈수록 지도에서 보이는 기차의 방향은 어떤 일인지 점점 우리 집이랑 멀어지고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황당하다. 내가 탄 기차는 올바른 기차가 아니었다.

A-B-C를 거쳐 내가 B역에서 C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우리 집에 가는데,

A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서 C방향이랑 완전 반대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탔던 것이다.

결국 A 기차역에서 중간에 기차가 화재로 인해 멈추었고 집에 가는 기차를 타야 되는데

이 표를 갖고 탈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안 된다고 했다. 결국 표를 새로 샀다.

세상에 김밥 재료 한 번 사러 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일까

살다 살다가 기차가 멈춰서 철길을 걸어본 경험도 해보고 참 인생 별일이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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