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찾아온 기회, 해외에 살면 다 좋을 것 같았다.
2달 동안의 단기 어학연수를 하면서 재료를 사서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네이버에 김치찌개 만드는 방법, 제육볶음 양념 만드는 방법,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떡 파는 곳을 검색했다.
그때는 한인마트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시장에서 김치를 사고, 떡을 샀다.
정수기가 없어서, 물이 석회수라서, 식수용과 요리용 물을 구매해야 했다.
1리터 페트병 물을 사면 금방 써서, 5리터 대용량 물을 사서 사용했다.
석회수 물이라서 물 정화를 하는 브리타라 불리는 것도 사야 했다.
매 번, 물을 사 마시기에는 돈도 돈이고, 무거운 물을 들고 오는 것도 꽤 힘들었기 때문이다.
빨래를 직접 하게 되었다. 단체 세탁기는 오래 사용을 해서 오히려 빨래를 하고 나면 먼지가 달라붙어 옷이 더 더러워졌다.
처음 겪는 살림에 조금씩 지쳐갔다.
이때부터인가 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술은 개강파티, 종강파티, 과팅을 하면서 단체로 모이면 마시는 술이었는데,
해외에 살다 보니 어떻게 여가생활을 보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술을 사서 기숙사에서 몰래 마시는 것이 삶의 낙이 되었다.
한국과 달리 맥주 가격이 꽤 저렴했다. 날씨가 추우니 밖에 나가는 날보다 기숙사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처음 사는 해외 살이인 지라 새로운 것도 많고 신기한 것도 많았다.
그렇게 첫 단기 연수가 끝나고 대학교 2학년 때, 한 학기 어학연수 공지를 보게 된다.
힘들었던 단기연수 때의 기억은 없고, 그때 먹고 논 재밌는 기억만 남았다. 나쁜 기억은 미화된다는 말이 맞았다.
나는 또다시 어학연수를 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저 한국이 아니면 해외에 살면 다 좋아 보였으니까.
어학연수를 가는 곳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벨라루스라는 곳이었다.
학비는 대학교에서 지원되고, 역시나 생활비만 내가 부담하면 됐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야외 카페에서 일을 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야외에서 손님들이 떠나면 테이블 위의 빈 그릇을 정리했다.
마감 조를 하면 그 많은 양의 그릇과 컵들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맥주 주문이 들어오면 간단한 안주도 만들었다.
다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었지만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면서 어학연수를 가는 날만 생각하면서 주먹을 꽉 쥐고 버텼다.
2학기 개강이 되었고 나는 비행기를 타고 벨라루스라는 나라의 수도, 민스크에 도착했다.
이 곳은 동양인을 찾아보기가 정말 힘들었다. 정신없이 핸드폰을 개통하고, 이것 저것 필요한 물품을 샀다.
이번 기숙사는 3인용 기숙사이고, 1개의 샤워실과 1개의 화장실을 6명과 공유한다.
너무 불편했다. 하지만,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과 요리를 해 먹고, 야식도 해 먹고, 같이 장을 봤다.
한국 가면 먹고 싶은 음식들을 끝말잇기 하듯이 나열하며 밤을 지새웠다.
러시아와 다르게 중국 마트도 없었다. 한식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아시안 마트라 해서 라면을 팔았고, 김밥과 김치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한국인이 있었지만 이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한국으로부터 각종 한식 조미료와 한국 물품을 택배로 받게 된다.
느지막이 일어나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놀았다.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2만 원대에 뮤지컬과 발레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다.
빨래를 하려 하는데 은행에서 빨래하는 표를 사야 한단다. 세상에나....
장을 보고 짐이 무거워서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그냥 잡아서 타면 매우 비싸서, 전화를 해서 택시를 기다려야 한단다......
이 외에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느린 행정처리에 속에서 열불이 났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해외에 살면 다 좋을 줄 알았다.
해외에 살면 매일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외국인들과 대화를 하면서 멋진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해외에 나와보니 먹고 싶은 한식을 자유롭게 못 먹고, 제한된 언어 실력으로 외국인과의 대화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국가 기념일에는 같이 축하할 가족이 곁에 없고, 낯선 사람이 돼서 그 나라의 왕따가 된 느낌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나의 외로움을 더 크게 만들었다.
대학 선배 오빠는 배추를 사서 김치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대단했다. 그 오빠는 이미 나보다 해외 살이 경험치가 높았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