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서였을까. 자신의 이름으로 그녀의 곁을 평범하게 지켜준 그 외계인에게 k.o.패 당한 기분으로 먼지처럼 사그라져버릴 슬픔은. 그 이야기의 엔딩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더라면. 나는 지루한 이 곳에 계속 머무르는 선택을 했을까.
<지구인 여>
평일 오후 두 시의 6호선에서 간혹 눈길을 받을지 모르지만, 주말오후 붐비는 2호선 안의 눈에 띄는 외모가 아닌 한아에게 특별한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것도 역마살있는 오래된 남친의 모습을 하고. 늘상 그의 무심함에도 홀연히 자신을 떠나던 그의 이별 목적을 합리화 해주던 모습이 지쳐갈 무렵.
초록빛 광선을 내뿜는 어느 한 외계인이 나를 좋아한단다.
알지도 못하는 우주 저 멀리서 지구에 오직 나를 만나러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반납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돌인지도 모르는 그 형체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할까?
그런데 희한하게
그런 그가 좋아져버렸다. 나를 위해 인간의 관습을 익히고, 사랑의 표현을 배우고 정서를 익히며 어색한 지구인의 모습으로 나에게 맞춰준다. 늦은 밤 망원경을 통해 함께 바라보는 우주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지하창고에 보관중인 우주선의 비밀을 눈감아 줄 수 있는 동지가 되어버렸다. 지구에 그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려는 존재로, 현아가 눈감는 그 순간까지도. 죽음 그 이후에는 또 다른 곳에서 그와 나는 불사의 존재로 우주밖에서 새로운 사랑이야기를 시작한다. 죽음 이후 다시 만나게 될 그 외계인과 함께.
소설, 드라마, 영화에 등장하는 흡혈귀, 좀비, 시간여행자, 외계인이 문득문득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 평범한 이웃이진 않을까? 내 친한 친구의 모습으로 내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사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이 세상이 엄청 비밀스럽고 재미있는 일들을 감추고 있는 스펙타클한 무대가 되어버린다. 평범한 외모와 직업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아와 같은 나에게 그 어떤 존재가 나를 위해서 수 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찾아온다면 과연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초록빛 광선을 내뿜는 그의 낯설음을 과연 용기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어도 서로의 다른 환경들로 인해 결코 섞일 수 없는 이들이 수 없이 많이 존재하는 여기에서 조차도 누군가의 손을 잡는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데 말이다.
빛보다 빠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란 차라리 운에 맡겨버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낯설음과 두려움에 한발짝 앞으로 나갈 마음의 준비만 된다면 기꺼이 내 옆에 평생 함께할 돌을 찾아 나설지도. 우리는 운명이라 느끼는 그 순간에 생각보다 무모하고 용기있어 진다는 본능을 잘 알고 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수 십만개, 무한의 행성에서 나만의 B612를 찾는 행복한 여우가 내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서로의 마음 속에 각인을 하는 용기 정도는 필요하잖아.
제 아무리 잘 된 영화래봤자 별 다섯 개가 고작인데
우리들 머리 위엔 벌써 수천 개의 별들이 떠있다. 윤제림 <한 여름 밤의 사랑노래>
반짝이는 섬광의 모습으로 지구밖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을 저 머나먼 곳의 한 사람을 위해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나의 안부를 전하고 싶어서 일까?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 하늘의 따뜻한 별을 보러 훌쩍훌쩍 떠나고 싶은 요즘이다.
혼자라서 외롭다는 투정어린 속마음에 누군가의 옆자리에서 외로운게 더 힘들다고
너는 여기서 혼자인 것이고, 나는 그들 속에서 외롭다고.
나의 불안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이해해주었던 큰이모뻘 직장동료분께서 해주신 말씀.
누구나 그런 존재라는 걸로 서로를 위로했던 어제.
마흔 전까지 자신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았으니 그 이후에는 나의 새로운 가족을 위해 살아보라는 말씀과 함께
인생은 그렇게 뿌연 먼지 머금고 며칠을 쌓아둔 이불을 맘먹고 탈탈 털어 한번씩 정리하며..주관적이나마 상쾌한 기분으로 새로움을 다짐하는 것.
전과 후에 나에게 달라진 건 없지만 이제껏 경험해본적 없는 날들처럼 하루를 새롭게 시작할 작은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