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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아 Jan 04. 2019

범띠 며느리의 탄생

 

-생년월일.

-1986년 범띠요. 9월 5일 오후 2시에 태어났어요.      


결혼을 한 달쯤 앞둔 어느 날. 

회사 동기와 함께 영등포구청에 위치한 철학관을 찾았다. 이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얼마 전 청첩장을 전달하며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 전 꼭 가보라’며 전화번호를 넘겨준 바로 그 철학관이다. 친구는 "아는 언니가 먼저 다녀왔는데, ‘강 선생님’께서 소름 끼치게 미래를 척척 잘 맞췄다"며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 속삭였었다.

      

-그 언니가 결혼해서 쉬고 있었는데, 곧 취업하게 될 거라고 했대. 그런데 취업하고 얼마 안 돼서 애가 생겨서 그만두게 될 거라나? 아들 낳는다고 했는데 정말 다 맞췄어. 그 언니 쇼호스트 합격했는데 아기 생겨서 다시 쉬었거든. 얼마 전에 아들 낳았다.      


뿌리치기 힘든,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쉬이 넘길 수 없는 고난도 유혹의 워딩이었다. 팔랑귀인 나는 다음날 곧바로 예약을 했고, 회사도 땡땡이친 채 강 선생님 앞에 조신하게 앉았다.      


-제가 곧 결혼을 해요. 다음 달이요. 이건 남편 될 사람 생년월일인데, 같이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보인다, 보여. 너의 사주팔자가~ (사진=tvN 응답하라 1988 캡처)


불이요, 물이요, 땅이요, 나무요…. 온갖 자연 만물이 등장하고 내가 물인지, 네가 불인지 실체 없는 단어들이 둥둥 떠다녔다. 뭐, 결론은 찰떡궁합이라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어 신사임당 언니를 흔쾌히 지갑에서 꺼내는 것이 아니었던가. 


의미 없는 안도감에 미소가 번지던 그때, 강 선생님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한 마디 툭 던졌다.      


-시어머니 자리가 세요.      


용하다, 여기 진짜 용하다!


하마터면 육성으로 터질 뻔했다. 그 한마디에 강 선생님에 대한 신뢰도가 30퍼센트에서 300퍼센트로 솟구쳤다.

        

-맞아요. 저희 시어머니 되실 분이 좀…. 

-뭐,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본인이 더 세니까.      


위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강 선생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동기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쩐지 승리한 기분이 들어 우쭐해졌다. 짜고 치는 고스톱에 임하는 타짜들의 기분이 이런 걸까. 취업 청탁을 한 아버지 빽을 믿고 면접장에 들어서면 이런 기분이려나. 결혼, 그까짓 거! 내가 다 이기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냥 참아. 

-네? 

-이기지 말고, 참아요. 본인만 참으면 모두가 다 행복해.   


며느리둥절 (사진=JTBC 비정상회담 캡처)


필라테스로 단단히 다져온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던 전투의지를 한 방에 무너뜨리는 한 마디였다.      


나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하다. 

나만 참으면, 나만 참으면.      


참을 인(忍)이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  나는 우리 모두의 행복을 책임지는 대한민국 며느리라는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참고 인내하며 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결혼 4년 차, 

이제와 돌이켜보니 강 선생님의 말에는 작은 오류가 있었다.     


나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하다가 아니다.  

나만 참으면 '나를 뺀' 모두가 행복하다. 

    

용하다더니, 순 개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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