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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아 Jan 11. 2019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다


나는 명품 가방이 좋다.

책 서너 권쯤 넣어도 쉽게 망가지지 않는 튼튼함은 기본이요, 한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과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멋스러움은 그냥 뻘소리. 비싸서 좋다.


명품 가방 하나면 ‘저는 200만 원짜리 가방쯤은 언제든 살 수 있는 경제력을 갖췄답니다’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있는 척’할 수 있다. 속물 중의 속물처럼 보이지만 그게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명품 가방이 좋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명품 가방을 들고 있는 내가 좋다.


내 꿈은 이 구역의 쇼핑왕!


이렇게 말하면 명품 가방을 이마트 장바구니만큼 잔뜩 갖고 있을 것 같지만 실은 두 개가 전부다. 하나는 동생이 이탈리아 여행 중 아웃렛에서 사다 준 Y 브랜드 가방.


동생은 짐을 줄인다며 상자부터 더스트 백까지 몽땅 버리고는 그 고귀한 가방을 캐리어 안에 처박아 왔다. 덕분에 가방은 내게 오던 그 순간부터 이미 누군가 10년은 쓴 것 같은 행색이 됐더랬다. 아웃렛이 아니라 프리마켓에서 산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나의 첫 명품 가방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주름을 펴기 위해 온 집안의 스카프를 끌어다 가방 안에 구겨 넣으며 기도했지만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한번 생긴 주름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이나 명품이나 똑같다.


첫 명품 가방의 쓰라린 기억을 잊을 때쯤, 두 번째 명품 가방이 찾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님의 선물이었다.


처음 결혼을 앞두고 양가 모두 결혼 준비를 간소하게 하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시부모님께서 현금 예단만큼은 생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현금 예단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결혼 풍습을 보면 남자는 함께 살 집을 마련하고, 여자는 그 집을 채울 혼수를 준비해왔다. 혼수보다 집을 사는 데 훨씬 돈이 많이 드니, 남자 측에 감사하다는 의미, 혹은 큰돈을 쓰셨으니 살림에 보태시란 의미로 현금 예단을 보냈던 걸까. ‘현금 예단은 집값의 10퍼센트를 한다’는 것이 지금도 통용되는 무언의 규칙 같았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집 한 채 들고 장가오는 남자는 많지 않다. 남자, 여자가 함께 돈을 모아 집도, 혼수도 마련하는 일이 늘었다. 그런데도 현금 예단은 여전히 여자의 몫이라니 아이러니하다.


남편은 일한 지 1년 만에 결혼해 모은 돈이 거의 없었다. 시가에서 전셋집 보증금을 보태주셨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그 정도의 결혼 비용을 지출했다. 어느 한쪽이 차이가 날 만큼 크게 돈을 쓴 것도 아니건만, 나는 그놈의 전통이 뭐라고 ‘피 땀 눈물’로 모은 천만 원을 내 손으로 인출해, 내 손으로 포장하고, 내 손으로 갖다드렸다.


물론 그게 아까워서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사이드 미러를 다 깨부술 뻔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유쾌한 경험도 아니었다.


어쨌든 우리는 예단비 외의 사치스러운 과정, 예를 들면 시계나 가방을 주고받는 일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상황이 좀 애매하게 됐다. 남편이 결혼 전 차를 사고 싶어 했는데 300만 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 금액만 할부로 하겠다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럼 차 살 때 보태”라며 300만 원을 내놓았다. 어머님은 내가 기특하다며 굉장히 칭찬하셨고, 아들의 차 값을 보탠 착한 예비 며느리를 위해 가방을 사주기로 단독 결정을 내리셨다.


답은 정해져 있다 (사진=무한도전 캡처)


“일하는 중이니?”

“네, 잠깐 통화는 괜찮아요. 어머님 어쩐 일이세요?”

“지금 백화점 왔어. 네 가방 사려고.”

“네? 가방이요?”

“응 그래. 돈은 없는데 네가 예뻐서 하나 사주려고 한다. 무슨 색이 좋니?”


근무 중 걸려온 당황스러운 전화였다. 대뜸 가방 색을 고르라고 하셔서 어리둥절했다. 어떤 브랜드인지, 어떤 모델인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매장이니 얼른 고르라는 말씀에 나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네..네이비요.”

“베이지?”

“아니, 네이비요.”

“그래, 베이지가 예쁘지.”


나의 발음이 잘못됐던 걸까, 이미 정답은 베이지였을까. 그렇게 두 번째 명품 가방이 생겼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아무리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라지만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디자인이 아니었다. 엄마가 보자마자 “아이고, 이거 어쩌니” 하며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가방은 땅 보러 가는 할머니 손에 들려 있을 법한 비주얼을 자랑했다.


아니야, 이거 아니야!! (사진=무한도전 캡처)


“어때, 가방은 마음에 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원하던 디자인과는 조금 달라서요. 이왕이면 마음에 드는 걸로 사는 게 좋으니 바꿔도 될까요?”

“아…그러니? 그럼 바꿔야지. 매장에 연락해두마.”


다음 날 나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매장에는 곱디고운 아이들이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말했던 네이비 컬러의 가방도 있었다. 매장 점원은 어머님에게 연락을 받았다며 마음에 드는 것으로 편하게 고르라고 말했다. 백화점 매장에서 명품 가방을 구경한 적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것저것 만져보고 들어보다가 드디어 한 놈을 콕 찍었다.


“이걸로 바꿀게요.”

“네, 손님. 이 상품은 사계절 언제 들어도 너무 세련되고 예뻐요. 추가 금액은 100만 원입니다.”


지금 무슨 이야길 들은 거지? 100만 원을 더 내라고? 점원은 새로 고른 가방이 어머님이 선물해주신 것보다 비싸다며 추가 금액을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나는 속으로 ‘그 정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하며 세련되지만 몸값 높은 그 아이를 내려놨다.


하지만 민망한 상황이 계속됐다. 그 옆의 아이를, 또 그 옆의 다른 아이를 골라도 추가 금액은 100~150만 원이 기본이었다. 결국 똑같은 디자인의 다른 컬러를 골랐는데, 그마저도 추가 금액 70만 원이 붙었다.  


“손님, 어머님께서 구매하신 가방이 세일 상품이라서 다른 것들은 모두 추가 금액이 조금씩 붙을 거예요.”

“아…. 그럼 여기 매장에서 이 가방이 제일 저렴한 건가요?”


얼굴은 붉어지고 목소리는 얇게 떨렸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점원은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더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했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이번에 새로 나온 신상인데 이왕 추가 금액 내시는 거, 이게 제일 잘 나가거든요.
시누이 분도 이걸로 사셨어요.


잠깐, 잠깐. 갑작스러운 시누이의 등장?

그렇다. 어머님은 나의 가방을 사러 시누이와 함께 왔고, 며느리에게는 매장에 진열도 안 하는 세일 가방을, 딸에게는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신상 가방을 사주셨다.


울면 지는 거다 (사진=슈퍼맨이 돌아왔다 캡처)


점원의 이야기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결혼 비용’이라며 매달 꼬박꼬박 넣어온 적금을 깨서 갖다 드린 나의 천만 원어치 피 땀 눈물이 세일 가방으로 돌아왔다니 허망했다. 눈에서 그야말로 피 땀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한다’는 말은 희대의 망언이다. 며느리와 딸은 세일 가방과 신상 가방만큼 다르다. 나는 두 번째 명품 가방을 한 번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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