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야, 네가 아무리 좋아 봐라.
내가 일요일에 나가 노나, 잠만 자지.
다시 시작할 한 주를 열심히 뛰기 위해 체력 보강을 해야 하는 일요일. 해야 할 일은 야무지게 먹고 늘어지게 쉬는 것뿐이다. 늘어지게 쉬기에는 TV만 한 것이 없다. 손에 리모컨 하나만 쥐면 인생의 희로애락을 소파에 앉아 느낄 수 있다.
지난 일요일에는 남편과 나란히 TV 앞에 앉았다. 암 걸린 아버님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찔끔거리고, 싱글 연예인의 사생활을 훔쳐보며 낄낄거렸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돼 TV를 끄려는데 본능적으로 한 다큐멘터리에 시선이 갔다. 주제는 ‘대한민국 며느리’. 볼까 말까 할 때는 안 보는 게 나은데, 순간의 착오로 시청을 시작했다. 하지만 30분도 채우지 못했다.
시베리아 벌판에 핀 개나리!
마음의 소리가 전두엽을 거치지 않고 툭 튀어 나와버렸다. 남편은 토끼 눈을 하고 상스러운 욕을 내뱉은 아내를 바라봤다. 본능에 충실한 나의 방정맞은 입이 민망해져 얼른 TV를 끄고 침대로 향했다.
캄캄한 방 안에 누워 가만히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상스러운 말은 누구를 향하고 있었을까. 시가에 처음 온 며느리를 자연스레 주방으로 불러들이던 다큐멘터리 속 시어머니? 그런 시어머니 곁에서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다며 해맑게 웃는 며느리? 그걸 보고만 있던 남편?
아니다. TV 속 누군가를 향해 한 말이 아니다. 착한 며느리를 꿈꾸었던 그 시절의 나. TV 화면 위로 겹쳐진 그때의 나에게 던지는 질책과 원망이다.
지금이야 시부모님 사랑은 개나 주라며 삐딱해졌지만 나도 처음부터 못된 며느리는 아니었다. 남들처럼 시어머니와 함께 쇼핑 다니는 딸 같은 며느리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결혼 전 시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잠시 입원을 하셨을 때는 예쁨 좀 받아보겠다며 남편 몰래 혼자 병문안을 하기도 했다. 기특하고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였다. 물론 그 행동의 팔 할은 진심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좋은 마음으로 좋은 행동을 했더랬다.
착하고 효심이 깊던 며느리가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다. 나의 호의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깨달아 버린 그 날.
결혼 후 6개월쯤 지났을 때였나. 그 주 토요일에는 시가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금요일이 1년에 한 번 있는 회사 전체 회식 날이었다. 회식이 뭐 어때서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날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곧 인사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A부서에 근무하는 나는 B부서로 자리를 옮기고 싶었는데, 도통 방법이 없었다. 회사의 핵심 업무를 담당하는 B부서는 공석이 나면 다른 부서에서 인원을 차출하는데, 그 인사권은 B부서 높으신 양반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분과 친분이 전혀 없는 나는 어떻게든 나란 사람도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야만 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날은 1년에 한 번 있는 바로 그 전체 회식이다.
안 먹던 아침밥도 챙겨 먹었고, 점심 식사도 든든히 했다. 일본에서 공수한 숙취 해소제는 퇴근 30분 전에 미리 마셨고, 건배사도 미리 준비해 핸드폰에 저장했다. 이제 심호흡 크게 하고 주먹 불끈 쥐고 전쟁터로 향할 시간이다.
자리 배치는 늘 똑같다. 높으신 양반들은 그들끼리 모여 앉아 한 테이블을 차지한다. 그 옆 테이블은 높으신 양반을 모시는 높은 분들, 그 옆 테이블은 언젠가 높으신 양반이 되실 분들, 그 옆 테이블은 언젠가 높으신 양반이 되실 분을 모시는 분들…. 나 같은 조무래기 일개 직원들은 술집의 가장 구석, 조명도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침침한 아랫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오늘의 타깃 B부서장은 가장 윗동네 테이블에 앉았다. 아마도 그 자리에선 아랫동네 모인 우리가 그저 비슷비슷한 돌멩이 정도로만 보일 것이다. 키가 큰 돌멩이, 작은 돌멩이, 지각하는 돌멩이, 칼퇴근하는 돌멩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비슷비슷한 돌멩이들. 그 속에 나라는 원석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술, 술, 술!
술이 그것을 가능케 하리라!
테이블이 초록빛 소주병으로 채워질 때마다 하나둘 빈자리가 늘어난다. 알코올에 취약한 이들이 픽픽 쓰러지며 전사하고, 만취한 몇몇은 울고불고 욕하고 싸우다가 강제 퇴장 처리다. 나는 전사하는 동료 돌멩이들에게 눈물의 작별 인사를 건네면서도 숨죽여 때를 기다렸다. 살아남은 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이는 그 순간을.
회식이 길어지면 열 개의 테이블은 여덟 개로, 다섯 개로, 세 개로 줄어든다. 남은 사람들이 가까이 모여 앉고 끝까지 버틴 남은 자들은 하나의 테이블에서 잔을 부딪친다. 오늘 나의 목표는 그 마지막 테이블 입성이다.
악으로 마셨고, 깡으로 버텼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 끝까지 살아남은 돌멩이가 됐고, B부서장과의 점심 식사 자리를 얻어냈다. 미션 클리어! 식사 약속을 잡은 뒤에야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집에 오는 길, 차를 다섯 번이나 세워 속을 게워냈다.
다음 날, 나는 죽었다.
알코올에 KO 당했다.
세상 다시없을 숙취가 나를 집어삼켰다. 혈액 대신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변기통을 부여잡고 반갑다며 얼마나 인사를 정답게 나누었던지. 이렇게까지 먹고살아야 하는 내가 안쓰러워 눈물이 났다.
문득 시부모님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떠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나갈 준비를 해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5분마다 변기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정말 미안한데 오늘 말고 내일 가면 안 될까?”
퀭한 눈빛으로 최대한 불쌍한 척하며 말했지만 남편은 나를 흘겨보기만 할 뿐이었다. “결혼한 여자가 술을 그렇게 마시는 것이 말이 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똑같이 사회생활을 하는 처지에 내 상황을 이해 못 해주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원망은 짜증과 비난으로 표출됐고 결국 남편과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하며 첫 부부싸움을 했다. 남편은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들더니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늘 우리 못가.”
“왜?”
“악아랑 싸웠어.”
나의 귀를 의심했다. 저 말은 분명 보복성 발언이다. 인공지능 스피커도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이 시대에 30대 성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치고는 너무나 저질이지 않나. 나를 사지로 제대로 몰아넣겠다는 악의적 행동임이 틀림없다. 역시나 피드백은 즉각적이었다. 남편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는데도 휴대폰 너머로 시어머니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 라이브 방송처럼 귀에 팍팍 꽂혔다.
“아니! 걔는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시가 오기 싫다며 지 남편을 잡아!”
그제야 남편은 정신이 들었는지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상황은 늦어버렸다. 전화기를 뺏어 들었다.
“어머님, 저예요.”
“그래.”
“제가 가기 싫다고 한 게 아니고요.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내일 가자고 얘기한 거예요.”
“너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네 맘대로 몸이 안 좋다고 안 오니?”
1년에 한두 번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저녁 식사를 오늘에서 내일로 미루는 것이 엄청난 죄인 줄 상상하지 못했다. 아프다는 며느리에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 안 나올 정도로 저녁 약속은 중요한 자리였을까.
“제가 안 가겠다는 게 아니고요. 오늘 정말 몸이 너무 아파서요. 좀 나아지면 뵙는 게 나을 것 같아 내일 가자고 말했어요.”
“오늘 온다면 오늘 와야지, 무슨 소리 하는 거니?”
“…네, 그럼 지금 출발할게요.”
“됐다. 오지 마라.”
‘아프다’는 며느리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시어머니는 결국 오지 말라며 싸늘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더했다.
지금 너 때문에 우리 아들이 기분 나쁘잖아. 그런 기분으로 오면 뭐하겠니? 됐다.
헛웃음이 터지는 한방이었다. 저녁 약속을 내일로 미룬 것이 시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니다. 감히 며느리 따위가 당신 아들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는 그 사실이 분노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아프거나 말거나,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전화를 끊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숙취보다 더한 서러움과 치욕감에 다리가 풀렸다.
잘하고 싶었고, 잘하려고 했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의 존재감은 딱 그 정도였다. 찰나의 순간에 마주한 본심에 나는 상처받았다.
나와 그들 사이에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망각했다. 깨끗이 지울 수 있다고 착각했다. 잠시 한눈팔면 금세 자라나는 흰머리처럼, 조금만 게으르면 논밭을 뒤덮는 잡초처럼 그들과의 경계선은 내 작은 흔들림과 방심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경계선이 보이지 않게 죽어라 닦는 것은 억울하게도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아등바등 매일같이 지우고 지우길 반복하는 대신 더 명확하게 선을 긋고 살기로 했다. 물론 선을 넘나들 때보다 내게 허락된 자리는 좁아졌다. 그래도 지금이 낫다. 상처받는 일도 줄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