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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아 Feb 01. 2019

나를 헐크로 만드는 잔인한 세상

세계 여행을 다녀온 지인을 만났다. 동갑내기인 그녀는 2년 동안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나와 다른 점이라고는 결혼 하나 포기한 것뿐인데, 그녀는 깃털처럼 가볍게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내 앞에 앉았다.


적도 부근의 남태평양 아래서 까무잡잡하게 타버린 피부와 어깨에 훈장처럼 새겨진 타투, 툭 치면 터져 나오는 온갖 에피소드까지. 모든 것이 다 부러웠다. 그녀가 결혼을 포기했다는 그 결단력은 존경스러웠고.


어디가 가장 좋았느냐 물은 것은 나의 판단 착오였다. 그저 듣고만 있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미지의 풍경을 마치 동네 약수터 설명하듯 일상적인 말투로 그려내는 것에 몹시 배가 아팠다.


왜 눙물이 (사진=아는 형님)


조금 질문을 바꿔 가장 인상적인 곳을 물었다. 그녀는 고민 끝에 의외의 답을 했다. ‘인도’라는 것이다. 손을 매우 자유분방하고 활기차게 사용할 수 있다는 그곳, 인도? 아주 낯설지도 그렇다고 익숙한 곳도 아닌 인도가 전 세계를 누비고 돌아온 그녀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유가 궁금했다.


“인도는 제 모든 상식이 깨진 곳이에요. 지금까지 상식이라고 믿고 있던 모든 행동이나 생각이 그곳에서는 통하지 않더라고요.”

 

독특한 땅이라고 했다. 뒤돌아서면 30초 전 했던 말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요, 속고 속이는 사기가 일상인 곳. 빨간 불에도 너나할 것 없이 도로의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고, 개, 소, 돼지가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람과 어울려 사는 곳.

 

지금까지 ‘그게 상식이니까’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해왔던 행동들이 모두 무효화되는 곳. 그래서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곳이라 했다. 나중에는 그곳의 매력을 제대로 보게 돼 두 번이나 가게 됐지만 처음에는 꽤나 힘들었단다.

 

그녀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낯선 인도를 향한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엊그제도 다녀온 듯 이상한 친숙함이 뉴런을 자극했다.

 

“악아님은 인도에 가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인도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살아본 듯한 느낌이 들어요. 비슷한 곳을 알고 있거든요.”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곳

논리가 비논리를 이길 수 없는 곳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곳   

 

그곳을 이제부터  
내 마음속의 인도라 불러야겠다.  

웰컴 투 시월드



 
남편과의 연애 기간이 4년이다.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신기하게도 크게 다툰 적이 없었다. 가능하면 어디서든 분란을 만들지 말자는 평화주의자 남편의 공이 클 것이다. 내가 한 번씩 아니 꽤 빈번하게 제멋대로 행동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다 받아주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 남편을 만나며 나 스스로도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항상 까탈스럽고 문제 삼기를 좋아하는 내가 그의 무한 긍정 에너지를 받으며 조금씩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있었다. 나를 긍정적으로 변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이 험한 세상 함께할 유일한 짝꿍으로 손색없을 거라 확신했다. 그것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결혼을 한 뒤,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내 우리는 참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마치 연애 때 못한 싸움 경험치를 서둘러 채워나가듯 성실한 부부싸움을 반복했다.

 
남편은 내가 무한 긍정 에너지를 받아 과거의 까칠함을 벗어던지고 착하고 순한 양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랐다. 4년간 공들여 양까지는 아니라도 가젤 정도는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시월드라는 새로운 세계에 입성하면서 나는 너무 빨리 본성을 되찾았다.


본성이 돌아온다 (사진=나혼자산다)

 

시월드란 미지의 세계는 참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며느리가 순한 양으로 살길 바라면서도 끊임없이 자극하고 시험한다. 가만히 두면 피오나로 살 수도 있을 텐데 쿡쿡 찌르고 분노조절 테스트를 반복하니 결국 내 안의 초록 괴물 헐크가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헐크가 등장할 때마다 남편은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좌절한다.   

 

“너희 어서 아기 준비해야 하는 거 알지? 그래야 황금돼지띠에 낳을 수 있다.”

“아직 계획 없어요. 그런 게 뭐 중요한가요.”

“어허, 띠가 얼마나 중요한데. 토끼띠, 양띠는 얼마나 사람이 착하고 순하냐. 좋은 띠야. 범띠는 팔자가 세. 여자 범띠가 제일 안 좋아.”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주스를 뿜을 뻔했다. 입으로 주스를 뱉어내는 몹쓸 꼴을 겨우 모면하니 목구멍이 아닌 콧구멍으로 주스가 역류했다. 콧물처럼 흐르는 주스를 닦으며 컥컥거렸다.

 

남편은 토끼띠, 시누이는 양띠, 나는 범띠.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 십이간지 중에서 토끼, 양, 범 딱 3마리만 소환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궁금하고 어려운 문제에 기가 막혀 웃음까지 터졌다.

 

띵동,
헐크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헐크 소환! (사진=영화 어벤져스)


“푸핫, 저 범띠잖아요. 제일 안 좋은 범띠 여자. 저 범띠인 거 알고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나는 깔깔 웃으면서 말했는데 남편은 당황했고, 시부모님은 헛기침을 하셨다. 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역시 범띠 여자는 상종을 말아야 한다고. 어른들의 말씀은 하나 틀린 것이 없다. 범띠 여자라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해 며느리의 경거망동을 지적하신 시부모님의 그 사려 깊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또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못된 며느리.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돼?
부모님 말씀에 굳이 네 생각을 말할 필요는 없잖아. 괜히 우리 집에 분란만 일으키는 것 같아.

 

 

나는 불꽃이어라.

시가에 불화를 일으키는 작은 씨앗이어라.

시부모님의 속을 활활 태우고,

남편의 가슴을 시꺼멓게 태우는

불꽃같은 며느리어라.

 

남편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화목한 가정에 헐크 한 마리가 난입해 난동을 부린 꼴이었다. 자의식과 상관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내 안의 초록 괴물이 송구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시가의 평화를 위해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피오나로 살면 안 되겠니(사진=슈렉 2)

 

그래서 얼마 후 시가를 찾았을 때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은 금이라는 조상님들의 명언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입 한번 뻥긋 안 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헐크를 잠재우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이번에는 남편이 왜 말을 하지 않냐며 다그쳤다. 나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 매우 난감했다. 말을 해도, 안 해도 나는 시가의 트러블 메이커다.

 

모두가 헐크를 싫어한다. 나 역시 내 안의 헐크를 만나고 싶지 않다. 헐크를 잠재우고 피오나로 살고 싶다.

 

내 마음속의 인도에는 언제 평화가 찾아오려나.

나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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