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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아 Feb 15. 2019

잊지 못할 그날의 낙지덮밥

누군가 나에게 ‘시가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를 묻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입장표명서를 A4 기준 10매 이상 작성할 자신이 있다. 그 안에는 수십 가지 크고 작은 이유가 빼곡할 텐데, 그중에서도 한동안 내게 큰 스트레스를 준 것은 바로 ‘밥’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밥값’이다.

 

언젠가 슬쩍 말한 적이 있듯, 우리 시가는 미래지향적인 22세기형 가정이라 집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시어머님도 시아버님도 일을 하고 계셔 외식이 일상이다. 그러니 나는 결혼 후 지금까지 시어머니가 손수 지은 밥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는 셈이다. 물론 거기에 대한 서운함은 밥알 한 톨만큼도 없다.

 

한 끼 식사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내는 우리 집과 다른 가정환경이 낯설고 이상해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집에서 밥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상당히 가벼워졌다. 그래서 한동안은 철부지 왈가닥처럼 ‘우리 시가는 밥 안 한다’며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생각이 짧았다. 외식의 즐거움만 생각했지 누군가는 반드시 밥값을 계산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매번 내가 된다는 것은 더욱더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라 (사진=놀라운 토요일)

 

결혼 후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시가로 소환당했다. 그때마다 당연하게 외식을 했다. 처음에는 ‘결혼했으니 부모님께 식사를 대접해야지’라는 마음으로 흔쾌히 계산대로 향했다. 하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면서부터는 부담감이라는 것이 명치 아래 어디쯤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가끔씩 나의 못난 손이 계산대로 향하는 남편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은 적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시부모님은 ‘잘 먹었다, 아들’이라며 홀연히 식당을 빠져나가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 호의는 의무로 변질됐다.

 

겨우 한 달에 한 번 있는 식사 대접이니 쿨해지고 싶었지만 대출과 함께 빚잔치를 벌이는 우리 부부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한 끼 식사에 30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 나가버리니 매달 초면 시가와의 식사 비용을 생활비에서 미리 빼놔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친정에 가면 엄마가 해준 밥을 먹거나 외식을 해도 부모님이 계산을 하니 나는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시가에서는 밥을 사고, 친정에서는 얻어먹는 꼴이라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달까. 그렇다고 공평함을 위해 친정에 가서도 밥을 사기에는 나의 월급이 너무나 비루했다. 가난은 이렇게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


가난이 죄요 (사진=나혼자산다)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하고 불합리한 상황이었다. 변화가 절실했다. 나는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며 길고 긴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나는 망설임 없이 행동을 옮겼다.

 

”밥값이 매번 너무 많이 나오는데, 한 두 번은 부모님께서 계산하시면 안 될까?”

“먼저 내신다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말해. 어쩔 수 없지.”

“그럼 아가씨도 가끔씩 사거나 같이 부담하면 안 되나? 남자 친구도 매번 데려오는데...”

 

비싼 뷔페만 고집하고, 게다가 사주는 사람 허락도 없이 남자 친구를 끌고 오는(시누이의 결혼 전) 시누이에게 한 번쯤 계산할 기회를 양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영 내키지는 않았는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을 하겠다’며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동생에게 밥을 사라고 말하기가 영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남은 인생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꼭 다음 생애는 남편의 동생으로 태어나겠노라 다짐했다.   

 

며칠 뒤, 일 년에 한 번 성대한 잔치가 열리는 시어머니의 생신이 다가왔다. 역시나 잔치 장소는 비싼 뷔페로 정해졌다. 나는 참으로 쩨쩨하게도 시어머니의 생신날이 다가올수록 ‘어떻게  즐거운 잔치를 할까’보다 ‘어떻게 밥값을 줄일까’를 더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가난은 이렇게 사람을 초라하고 속물적으로 만든다.

 

"자기야, 출근 잘했어? 오후에 2만 5000원만 동생 계좌로 보내줘."

"2만 5000원? 무슨 일인데?"

"동생이 엄마 생신 케이크 주문하는데 5만 원이라고 하네. 반씩 내자고 해서 2만 5000원 보내주면 될 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렸다. 50만 원도 아니고 5만 원짜리 케이크를 혼자 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시누이가 가난했다니. 케이크를 ‘엔빵’하자는 말을 해야 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절망적이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흐 미안해서 눙물이 (사진=놀라운토요일)

 

"그래. 대신 2만 5000원 보내줄 테니까 15만 원 보내라고 해. 케이크도 반씩 하는데 밥값도 같이 내야지."

 

남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일단은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케이크는 동생이 혼자 준비하기로 했으니 밥은 우리가 사자며 문자를 보내왔다. 시누이는 가난하지만 산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나구나.

 

시누이와 함께 밥값을 내려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나는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두 번째 묘수는 시가 방문 횟수를 줄이는 것.

 

한 달에 한 번 가던 것을 두 달에 한 번 가면 일 년에 열두 번 사야 하는 밥을 여섯 번만 사면 된다. 나는 남편에게 우리 가정의 빈곤 상태를 브리핑하고 시가에 가는 횟수를 줄이자는 제안을 슬며시 던졌다. 귀가 얇은 남편은 별생각 없이 나의 제안에 오케이 했다. 오호라, 문제 해결! 인줄 알았지만 결혼생활은 해피엔딩의 주말 드라마가 아니다.

 

"아들, 언제 집에 올 거니?"

"회사가 너무 바빠서 당분간은 힘들 것 같아요. 악아도 계속 주말에 일 있어서 출근하고요. 다음 달에 갈게요."

"뭐. 라. 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목소리의 떨림까지 잡아내 마치 옆에 있는 듯 전달하는 통신기술의 발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는 것이 뭐가 힘드냐며 화를 내셨다. ‘악아가 오기 싫다고 했냐’,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 등 분노의 샤우팅이 이어졌다. 가만히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들으며 ‘이번 작전도 실패’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때, 불쑥 튀어나온 시어머니의 말이 뇌리에 꽂혔다.

 

밥 사기 싫어서 안 오는 거니?

 

아마도 시누이가 ‘오빠가 밥값을 나에게도 내라고 했다’는 소스를 제공한 것이 분명했다. 예상 못한 부분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심 시누이가 그렇게 말하길 바랐던 것도 있다. 그래야만 시가에서도 ‘밥을 사는 게 부담이 될 수 있겠구나’라고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은 나의 발칙하고 앙큼한 기대였다. ‘그깟 게 얼마나 된다고’로 시작된 샤우팅은 그 후로도 몇 분간 쭉 계속됐다. 두 번째 작전도 실패로 돌아갔다.


울지마 바보야 (사진=나혼자산다)

 

나는 포기를 모르는 여자다. 밥값 줄이기를 매일 같이 고민하던 나는 남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번에는 메뉴 변경이다. 지금까지는 늘 외식 메뉴가 소고기, 장어, 뷔페 같이 비싼 것들뿐이었다. 조금 저렴한 메뉴를 선택해 10만 원 선에서만 식사를 해도 흔쾌히 밥을 살 용의가 있었다.

 

"가끔씩은 가성비 좋은 음식을 먹는 건 어떨까? 뭐 해물찜이나 전골, 샤부샤부 같은 것 말이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

"왜?"

"그런 건 외식 메뉴로 생각하지 않으시니까. 식사 대접 메뉴로는 좀 부족한 느낌이잖아. 그런 걸 먹자고 하면 ‘무시하냐’면서 화내실 것 같은데."


"... 그렇구나. 그럼 낙지덮밥은 어때?"

 

나는 쿨한 사람은 절대로 못된다.

다시금 이 시점에 낙지덮밥을 떠올리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그날은 대망의 예단비를 들고 시가를 찾았던 날이었다. 애지중지 모은 돈 천만 원을 싸들고 사뿐사뿐 시가에 들어가 절을 하고 예단비를 바쳤다. 시가를 찾은 시간이 오전 10시 정도 됐을 때였는데 그날은 신혼집을 보러 가는 날이기도 해 일정이 빡빡했다. 예단비 전달식을 끝낸 뒤 곧바로 시가 식구들과 함께 신혼집을 보러 갔다. 식사는 집을 보고 나서 하기로 했다.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바로 옆이라더니 한참을 걷고 이동해야 했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차를 타고 몇 번을 이동하는 등 진이 빠졌다. 마음에 드는 집이 쉽게 나타나지도 않아 생각보다 더 많은 집을 보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집 보기 미션이 일단락됐다. 너무 배가 고프다 못해 이제는 배고픔이 사라졌을 정도였다. 젊은 내가 그 정도이니 어른들은 더욱 힘드셨을법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얘 악아야, 배고프지? 얼른 맛있는 것 먹자."

"네, 배고프시겠어요."

"그래, 네 아버지 배고파서 기력이 없으신가 보다. 이 동네는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네. 찾기 힘든데 그냥 저기 보이는데 가서 먹자. 괜찮지?"


눈에 보인 것은 낙지집이었다. 나는 낙지를 좋아하지만 그날은 왠지 썩 내키지 않았다. 낙지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나는 무거운 발을 옮겨 낙지집에 들어가 앉았다. 그래, 기력 회복을 위해 산낙지를 열심히 씹어보자! 연포탕도 먹고 몸보신을 하는 거야!


시어머니는 낙지덮밥 5개를 시켰다.


주문 끝? (사진=신서유기)

 

낙지찜, 철판볶음, 산낙지, 전골도 있었지만 8000원의 행복을 택했다. 돈 천만 원 싸들고 온 며느리에게 8000원 낙지덮밥 대접이 웬 말이냐며 바닥에 누워 단식투쟁이라도 벌이고 싶었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나 나약했다. ‘뜨끈하게 연포탕이라도 한 수저 하자’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비싼 외식 메뉴가 아니면 기분이 상하실 것 같다는 남편의 말은 다시금 내 기분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그때의 낙지덮밥이 마치 시가 식구들이 바라보는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다. 낙지는 나를 비웃었을 거다.


8000원짜리 낙지덮밥이 요즘도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날의 낙지덮밥은 더럽게 짜고 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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