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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아 Mar 01. 2019

엄마의 인생을 닮고 싶지 않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잖아.


그것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다. 아주 오래전부터 수없이 다짐하고 되새겼다. 결단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그렇게 될까 봐 두렵고 무서웠다. 내가 엄마처럼 살게 될까 봐. 그렇게 사는 나를 보며 엄마가 가슴을 쥐어뜯을까 봐.


엄마는 나와 같은 범띠 며느리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결혼을 했고 나를 낳았다.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 콩깍지가 씌었으면 그 좋은 나이에 결혼이라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겨우 스물네다섯 살에 어린 딸을 둘러업고 다녔을까. 나는 괜스레 죄지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아빠는 젊은 시절 잘 나가는 영업맨이었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영업부서에서 실적 1위를 여러 번 달성하며 이름깨나 날렸다고 한다. 그런 영업맨의 행보가 대개 그러하듯, 아빠도 곧 회사를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 무역회사에 다니던 엄마는 결혼 후 회사를 그만뒀다. 친구들과 만나는 일도 줄었고, 좋아하는 쇼핑도 못 했다.


아빠는 조그마한 가구 공장을 운영했는데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공장 일을 도왔다. 생전 망치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니 톱밥 가득한 공장에서 능숙하게 못질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의 20대는 공장과 육아가 전부였다.


엄마도 꿈이 있었겠지 (사진=고백부부)


사업은 잘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많았다. 집에 빨간딱지가 붙은 적도 있었고, 빚쟁이를 만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간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무서워 엉엉 울었는데,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 훌쩍이기만 해도 먼저 통곡하며 울던 엄마였는데 그럴 땐 꼭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16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엄마는 우르르 몰려온 빚쟁이들 사이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악다구니를 쳤다. 그 모습을 숨어 지켜보며 속으로 엄마가 참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겨우 지금의 내 나이에 엄마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빚쟁이만큼이나 엄마를 힘들게 한 또 다른 사람들은 할아버님, 할머님이였다. 빚쟁이에게는 소리라도 지르고 욕이라도 내뱉을 수 있었지만 시부모에게는 싫은 소리 한 번을 할 수가 없었다.


알아주는 난봉꾼이었던 할아버님은 걸핏하면 결혼한 아들 집에 찾아왔다고 한다. 꼭두새벽부터 찾아와 대문을 두드렸는데 엄마가 놀라 뛰어나오면 돈을 달라고 엄포를 놓곤 했다. 친구들과 놀러 가야 한다, 차가 고장 났다, 강아지가 아프다 등등 별별 이유로 하루 걸러 한 번씩 찾아와 봉투를 받아 들고는 돌아가셨다. 엄마는 새벽마다 반복되던 할아버님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트라우마가 생겨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다가 몇 번씩 깨는 일을 반복한다.


왜 다들 엄마를 괴롭혔나요 (사진=응답하라1988)


명절이면 엄마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음식 준비를 위해 미리 시가에 도착하면 집안이 조용했다. 할아버님도, 할머니도 외출한 뒤였다. 할머니는 명절 전이면 항상 주방 정리를 하셨다. 냉장고며 수납장이며 어찌나 청소를 열심히 하셨는지 어제 이사 온 새집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럼 엄마는 깊은 한숨 한 번 내쉬고 고춧가루부터 소금, 밀가루, 쌀 등 음식 재료를 모두 새로 사 와야 했다. 종일 홀로 음식 준비를 하느라 하루는 금방 갔고, 저녁이 되면 시가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 저녁상을 차려냈다. 엄마는 명절을 보내고 나면 며칠씩 앓아누웠다.


식사를 하다가도 반찬이 떨어지거나 물이 필요하면 모두가 엄마를 바라봤다고 한다. 한참 나이가 어린 시누이, 시동생들은 엄마를 바라보며 “물 좀 가져다주세요”, “국 좀 더 주세요”라고 당연하듯 얘기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그리고 아빠마저도 “너희가 가져다 먹어라”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그들 역시 엄마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손님인 엄마만이 식사 중 수십 번씩 주방을 들락거렸다.


다들 나만 쳐다봤어.
물 가져와라, 술 가져와라, 상 치워라.
한 번도 고맙다고 말한 적이 없지.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조금 놀랐다. 엄마가 그런 것에 상처 받고 있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늘 엄마를 먼저 찾았고, 그것은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풍경이었다. 우리 집에서처럼 할아버님 댁에서도 엄마가 엄마처럼 행동하는 것이 속상하고 외로운 일이 될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내가 며느리가 되고 나서야 엄마의 기분이 이해가 됐다.    

 

내게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다 같이 모여 앉아 치킨을 먹고 있었다. 나는 닭다리 하나를 열심히 뜯고 있었는데, 앞에 앉은 시매부가 콜라를 찾았다. 술을 잘 못 마시는 그는 맥주 대신 콜라를 먹고 싶다고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콜라는 없나요?”라는 말은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나는 닭다리를 뜯는 것에만 열중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오직 치킨에만 집중한다 (사진=해리포터와마법사의돌)


잠깐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시누이는 “콜라가 있나?” 하며 느리게 일어섰다. 시어머니는 베란다에 있을 것이라며 시누이를 따라 주방으로 갔다. 시아버지는 닭다리를 뜯는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TV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장면이었는데 웃음이 났다. 시매부는 왜 나를 보며 콜라의 행방을 물었고, 다른 사람들은 왜 나만 쳐다보고 있었는지. 참 우스웠다. 엄마가 말한 게 생각나 실소가 터졌다.


엄마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나를 가족으로도 손님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그 거북한 분위기를 견뎠겠구나 싶었다. 엄마였다면 또 엉덩이를 떼고 콜라를 가지러 갔었겠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가 그러라고 했다. 엄마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강요된 희생으로 상처 받으면서 살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착한 며느리’의 정석이었다. 시부모의 말에 토를 단 적이 없었다. 명절에 혼자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밤낮없이 부르면 달려갔다. 필요한 게 있다면 사드리고,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대접했다. 그런데도 미안하다 혹은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용돈은커녕 양말 한 짝 선물 받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님,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를 찾았지만 손 한 번을 잡아주지 않았다. 착한 며느리의 끝이 허무하다는 것을 엄마를 보며 배웠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엄마처럼 살지 않길 바랐다. 굳이 사랑받으려 마음 쓰지 말라고 했다. 30년을 착한 며느리로 살아온 엄마가 가장 후회하는 일이었다.


고생했어 엄마 (사진=응답하라1988)


나는 엄마와 닮아가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소녀 같은 엄마 성격을 닮는 것이 싫어 일부러 사내아이처럼 굴었고 여느 딸들처럼 엄마 옷을 빌려 입지도 않았다. 요리 솜씨가 좋은 엄마가 음식을 가르쳐 준다 해도 배우지 않았고, 아빠와 가장 다른 사람을 배우자로 찾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인생이 향하는 길과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느리가 된 후 속상한 일을 겪을 때마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는 그 저주 같은 말이 떠오른다. 돌고 돌아도, 결국 엄마가 간 길을 밟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래도 똑같이는 살지 말아야지. 다 포기하고 혼자 짊어지고 상처 받으면서 나를 잃어버리는 것을 반복하지는 말아야지 생각한다.


나는 엄마 딸이니까,

절대로 엄마 마음 아프게 살지는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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